작가연재 > 무협물
패왕의 별
작가 : 강호풍
작품등록일 : 2016.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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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화
작성일 : 16-08-18     조회 : 807     추천 : 0     분량 : 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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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4

 

 

 

 천류영은 팔백 오십 명이 암묵적으로 강요를 가장한 협박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세가 두려워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류영은 완강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저기……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건지. 저는 조금 관찰력이 좋았을 뿐입니다. 지금 마치 제가 대단한 책사라도 되는 것 마냥…….”

 독고무영이 천류영의 말허리를 끊었다.

 “자네는 내가 본 그 어떤 누구보다 훌륭한 책사의 재능을 가지고 있네.”

 한추광과 능운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류영은 잠시 머릿속을 굴렸다.

 유명 세가나 무림맹의 책사가 될 수 있다면?

 제법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공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표국에서 일하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튼튼한 무사들의 체력이 부럽기도 했으니까.

 나름 괜찮은 제안이고 유혹이었다.

 자신이 책사로서의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오판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판단에 백운회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이다.

 “죄송합니다만…….”

 천류영이 고사를 하려는데 독고설이 그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순간 천류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한기가 들었다.

 독고설이 천류영의 귀에 손과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은자 백 냥은 됐는데…… 어제 술값이 이백 냥이라는 건 아시죠?”

 “…….”

 “물론 제가 선택하고 산 것이지요. 하지만 그걸 산 이유는 녹림십팔채의…….”

 천류영이 당황하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 역시 독고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어제 제가 다 말했잖습니까?”

 “거짓말이잖아요. 대단해요, 그 만취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거짓말을 조리 있게 하다니. 난 당신에게 속아 방금 전까지 당신이 사기꾼인 줄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당신은 나를…….”

 독고설은 말꼬리를 흐렸다.

 이 인간이 자신의 가슴을 조물락거렸단 말을 어찌 처녀의 입으로 할 수 있겠는가?

 그건 평생 묻어야 할 비밀이었다. 오직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천류영은 곤혹스러웠다.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아소채의 채주 광혈창이 녹림십팔채의 총표파자 자리를 노린다고 떠들고 다녀도 되겠지요? 어차피 뜬소문으로 흐지부지 묻힐 테니까요.”

 천류영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녀가 귀에다 대고 말할 때마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미 여인인 것을 알았기에 왠지 기분이 묘했다.

 “끄응…….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치사하게 협박하는 겁니까?”

 “거래해요.”

 “……?”

 “제가 삼백 냥 전부와 녹림십팔채 관련 얘기를 다 묻겠어요. 그러니까…… 도와줘요.”

 “…….”

 “아미파의 보현 장문인은 약자와 가난한 자를 많이 도우신 덕망이 높은 분이세요. 그런 분을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어요.”

 “아니……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자꾸 이러는 겁니까? 저는 책사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천류영의 말에 독고설은 잠깐 고민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숙고의 시간은 짧았다. 어쭙잖은 책사보다 이 사람이 훨씬 낫다는 판단은 변함없었다.

 “아무것도 못해도 좋아요. 내가 어제 당신을 판단한 육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냥 오늘 하루 함께 움직이며 의견만 말해 줘요. 그거면 되요.”

 한편 세 수장은 독고설과 천류영이 잇달아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며 초조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 아미파가 공격받고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도와주러 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발을 떼지 못했다.

 천류영.

 이 사람을 데려가야 할 것 같았기에.

 또 무슨 속임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냥 억지로 끌고 갈까?

 그러나 명문 정파를 자처하는 독고세가와 곤륜파 게다가 무림맹이 함께 작당해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는 더더욱 못할 짓이다.

 결국 그를 포기하고 그냥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천류영이 한숨을 쉬며 독고설을 보았다.

 그 얼굴에 세 수장은 천류영이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알았다.

 천류영이 독고설을 보며 말했다.

 “그러죠. 나는 그저 따라다니며 의견만 말할 겁니다. 대신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어제 들은 모든 얘기를 가슴에 묻겠다는.”

 “본가의 명예와 내 별호인 검봉의 이름을 걸죠.”

 천류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찌나 놀랐던지 눈가가 작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무림오화의 청화! 독고설! 그게 당신이란 말입니까?”

 천하의 모든 사내들이 꿈에서도 만나기를 원한다는 무림오화 중 한 명이라니!

 독고설이 아미를 찌푸렸다.

 사내들은 왜 한결같이 검봉이란 별호보다 청화라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가?

 나는 검봉 독고설이란 말이다!

 천류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남장을……. 그냥 본래의 모습은…… 정말 그렇게 예쁩니까?”

 독고설은 순간 이 사내에 대한 확신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유능해 보였던 그가 다시 평범한 사내로 회귀하고 있었다.

 천류영은 그녀의 돌변한 표정을 보고는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 지금 아미파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이딴 말이나 하다니. 쩝, 실수다.’

 그는 머쓱해져서 급히 독고무영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사천 분타로 가시지요.”

 독고무영이 당황하며 물었다.

 “아미파가 아니란 말인가?”

 “예, 사천 분타로 가야 합니다. 모두가 말이죠.”

 한추광이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천 분타에는 아까 육백여 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날 밤 싸웠다면 매우 피곤한 상태일 터이니 지금 우리 모두가 간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한추광은 어서 빨리 천마검과 붙고 싶었다.

 그러나 독고무영은 정색하며 말했다.

 “사천 분타가 중요하긴 하나 아미파와 보현신니는 더 중요하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류영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독고무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흠…… 그렇군. 자네 말이 옳네. 이미 아미파를 돕는 게 늦어 헛걸음을 할 공산이 높다면, 사천 분타라도 빼앗아 와야지.”

 너무나 쉽게 천류영의 속삭임에 돌변하는 독고무영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쨌든 헛걸음하는 것보다야 나은 게 사실이니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세.”

 독고무영의 말에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곧바로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물론 그사이에 독고무영은 당문세가에 현 상황을 알리는 전서구를 띄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독고무영은 천류영을 손수 자신의 뒤에 앉히고 말을 몰았다.

 “자네 말을 타 본 적이 있는가?”

 “예, 익숙하지는 않지만 표국에서 일하며 틈틈이 배웠지요.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별거 아니네. 그저 내 허리를 잡고 앉은 자세가 꽤 안정되어 보여서. 그런데…… 아까 열 번째 이유 있지 않나?”

 독고무영의 질문에 천류영이 멋쩍은 미소로 대꾸했다.

 “간자 같이 생겼다는 것 말입니까?”

 “허허허, 그건 솔직히 너무 뜬금없지 않았나?”

 “어차피 열 가지 이유 중 여러 개가 간자의 심리를 자극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열 번째는 무공의 초식으로 따지면 실초가 아닌 허초 같은 거였지요. 상대의 헛발질을 유도하려는…….”

 천류영이 정색하고 말하자 독고무영도 심각하게 말을 받았다.

 “자네의 생명을 담보로 말이군.”

 “무적검 한추광의 실력은 워낙 유명하니까 믿었지요. 그래도 사실 엄청 떨렸지만……. 어쨌든 저는 그를 간자 같이 생겼다는 농으로 폭발시키려는 시도였는데…….”

 천류영이 쓴웃음을 깨물었다.

 간자는 그의 열 번째 이유를 채 듣지도 않고 비수를 날렸던 것이다.

 즉, 열 번째의 진짜 이유는 천류영이 말한 농담이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간자가 마지막 이유까지 들은 다음, 모두가 천류영의 농담에 황당해하는 순간에 그 찰나의 틈을 노리고 기습을 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간자에게 다가갔고, 천마검 백운회를 끌어들여 심리적 압박감을 부추긴 것이다.

 독고무영은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달리다 낮은 구릉을 하나 넘었을 때,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모두를 멈추게 했다.

 한추광이 물었다.

 “한시가 급한데 왜 갑자기 멈추시는 겁니까?”

 “이 친구의 조언이 있었네.”

 독고무영이 천류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한추광이나 능운비 등은 아까 천류영이 뭔가를 속삭인 후에 독고가주가 아미파를 구하려는 결심을 바꾼 것을 상기했다.

 천류영이 자신을 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상황을 유추해 보면 천마검은 자신의 수하들을 성도와 그 주변에 넓게 퍼트려 두었을 겁니다. 그리고 전날 밤 모두 한곳에 모인 것이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류영의 말을 주시했다.

 “그렇다면 아까 우리가 간자와 있던 모습을 구경꾼들 중에 숨어서 본 또 다른 간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천마검 백운회는 상황을 끊임없이 점검한다고 알려진 신중한 인물이니까.

 그가 젊은 나이에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는 것은 단순히 무공이 고강하거나 지략이 탁월해서만은 아니었다.

 자만하지 않고 늘 상황을 확인하는 꼼꼼함도 갖췄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추광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사천 분타로 간다고 말한 건…….”

 천류영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예,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아미파를 구하러 갑니다.”

 천마검을 벼르던 한추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수긍했다.

 개인적인 원한은 나중이고, 우선 아미파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또한, 사천 분타를 이만한 인원으로 치기엔 확실히 무리였다.

 천류영은 먼저 말에서 내리고는 여전히 말에 타고 있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내리게 했다.

 “제가 천마검이라면 사천 분타로 가는 길 도중에 한 번 이상 연락책을 숨겨 두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을 계속 속이기 위해 사천 분타로 말을 타고 갈 사람을 선별해야 합니다.”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척후병이 없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시간?”

 “예, 우리가 모두 아미파로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천마검은 지원군을 이끌고 움직일 겁니다. 그럼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지요.”

 “흠……. 우리가 앞뒤로 협공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군.”

 “맞습니다. 그러니 사천 분타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를 주어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속여야 합니다.”

 급히 이동하면 당연히 말을 탄 선두가 훌쩍 앞서 가게 된다.

 그리고 연락책은 그 서른 인마를 보고 전서구를 띄울 것이고.

 물론 경공술을 펼치며 뒤따를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계속 흘러도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천류영은 그 시간이 나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과 사가 갈리는 역할을 말이다.

 “천마검이 사천 분타가 아니라 아미파를 공격하는 무리들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능운비의 질문에 천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겁니다. 그는 대부분 그래 왔듯 이번에도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일 겁니다. 당연히 이번 계획의 가장 핵심인 사천 분타에서 각개격파를 위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아미파는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겼을 것이고. 그게 이치에 맞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류영의 말을 인정했다.

 독고무영이 우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서른 명만 사천분타로 보낸다는 얘기인데, 그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나? 도중에 매복이 있다면…….”

 천류영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사천 분타는 지형적으로 매우 유리합니다. 굳이 좋은 곳을 놔두고 인원을 나눌 이유가 없지요.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매복한 인원만 우리에게 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힘들게 빼앗았을 사천 분타에 남겨진 무사 수가 너무 적어지게 되지요. 저 같으면 절대 그런 엉뚱한 모험은 안 합니다.”

 독고무영은 자신의 우려를 깨끗이 부인하는 천류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처지가 약간 남세스럽긴 했지만, 그래서 천류영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젊은 사내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천류영이 급하게 말했다.

 “자, 말을 타고 사천 분타로 가야 할 사람들을 빨리 정해 주십시오. 그 사람들은 죽어라 사천 분타까지 갔다가 꽁지 빠지게 돌아오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니 강할 필요는 없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약간의 고수는 배치하십시오.”

 독고무영이 말했다.

 “세 곳에서 나누려면 시간이 걸리니 본 가에서 서른 명을 바로 차출하겠네.”

 독고무영이 황급히 총관 황하성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며 천류영이 외쳤다.

 “저기…… 제가 탈 말 한 필은 빼 주십시오. 저는 경공을 모르거니와, 뛰어가기엔 체력이…….”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리는 천류영을 보며 양옆의 한추광과 능운비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서 둘은 다시 한 번 천류영의 진가를 느꼈다.

 대단한 청년이었다.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천이 이 자리에 와 있더라도 과연 이 사람만큼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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