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4
흑랑 부대주 초지곽은 정신없이 야산을 넘어서 평지에 도착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물한 명의 흑랑대원들이 지척에 있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인원의 흑천련도들이 하산 중이었다.
“휴우우…….”
초지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젠 살았구나!’라는 생각에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정파의 추격은 없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판단한 그는 넘어온 야산의 옆으로, 사천 분타를 향해 직진으로 달렸다.
뒤따르는 이들은 헐떡였지만,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술실력이 탁월한 건지 그는 잔부상 하나 입지 않았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번 싸움에 임하며 늘 뒤에서 소리만 질러 댔다.
형인 초지명과 함께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바로 뒤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형은 강했기에 선두에 있어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막아서는 이들을 모조리 부수고 전진하는 형 뒤에서 자신은 부상당한 적들을 베어 버리며 공적을 쌓는 데 치중하면 됐으니까.
쉭쉭.
경공술을 펼쳐 빠르게 이동하는 초지곽의 귓가로 바람소리가 상큼하게 스쳤다.
“나는 도망가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위험한 상황을 형님과 천랑대주에게 알리려는 거야.”
그는 궁색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재 자신의 처지를 자위했다.
그렇게 초원에서 이각 정도 달렸을 때, 앞의 낮은 구릉 위로 흙먼지가 일며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지곽은 자신도 모르게 ‘헉!’하는 신음을 흘리며 멈췄다. 또 다른 정파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반색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형이 이끄는 흑랑대였다. 이젠 정말로 산 것이다.
“형님!”
초지곽은 한달음에 초지명에게 달려갔다.
초지명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구 척(九尺) 길이의 청룡극(靑龍戟)을 든 채 눈을 껌뻑거렸다.
“지곽아, 네가 여기 어찌 있는 게냐?”
초지명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생을 보면서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초지곽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빠르게 답했다.
“지금 정파 놈들이 떼거리로 나타나 저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음……. 천랑대주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구나. 과연 천마검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은 인물이야.”
그는 상황이 급박하다는 생각에 발을 떼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싸움이 한창이라는데 초지곽은 왜 여기에 있고, 또한 뒤에서 줄줄이 따라오는 흑랑대 수하들과 흑천련 무사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모두 합치면 사십 명이 넘어 보였다.
“서, 설마…….”
초지명은 신음을 삼키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건 영락없는 탈주병들이 아닌가?
그의 노기가 치솟는데 초지곽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말했다.
“형님, 어서 그들을 도우러 가야 합니다. 두 산의 통로로 들어가 뒤를 치면 정파인들은 혼란에…….”
초지명이 동생의 말허리를 끊었다.
“네가, 어찌 네가……. 나를 이리 실망시킨단 말이냐?”
“예?”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나에게 너를 잘 보살피라 일렀거늘,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오냐오냐하며 키운 것이 결국 너를 겁쟁이로 만들었어. 하아아…….”
“형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단지 이 위급한 상황을 형님께 알려 드리고자…….”
“닥쳐라! 어찌 그 일을 수하를 시키지 않고, 네가 직접 한다는 말이냐? 내가 없는 흑랑대는 네가 책임져야 하거늘 어찌 네가 몸을 빼낼 수 있단 말이냐? 평무사도 아닌 부대주인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의 음성은 걷잡을 수 없는 노염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속속 초지곽 주변으로 도착한 흑랑대원들과 흑천련의 무사들도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초지곽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형이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 없었다.
“혀, 형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저 이 소식을 제가 한시라도 빨리 알리려다가…… 용서해 주십시오.”
초지명은 그런 동생을 보면서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더더욱 기가 찬 것은 동생의 옷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만큼이나, 더 큰 배신감이 그의 가슴을 찢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개인적인 것이다. 어찌 부하를 사지에 두고 몸을 빼낼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죽어 저승에 가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지곽아, 지곽아.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구나. 미안하다.”
“예?”
초지명이 땅에 딛고 있던 청룡극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에 초지곽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혀, 형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사십여 명도 기함하며 부복했다.
그러나 초지명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유언은 듣지 않겠다.”
“……!”
초지곽의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순간, 초지명 뒤에 있던 흑랑대 일조장이 급히 끼어들었다.
“대주님, 용서해 주시지요.”
이조장도 거들었다.
“속하, 대주님께서 부대주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시라 간청합니다.”
둘의 말이 끝나자 함께 온 이백의 흑랑대원들이 말했다.
“대주님! 용서를 해 주십시오.”
초지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
일조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대주님께서 저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대주님을 위해서라면 저희들은 섶을 지고 불 속에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이조장이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대주님! 대주님께서 동생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생을 보내고 평생 슬퍼하실 대주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삼조장이 입을 열었다.
“부대주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시오! 그래도 하나 남은 혈육이 아닙니까?”
초지곽 뒤에서 부복하고 있던 도망병들도 외쳤다.
“기회를 주십시오!”
흑랑대주 초지명이 들고 있는 청룡극이 뜨거운 태양빛을 반사시키며 흔들거렸다.
그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나는…… 흑랑대의 대주니라……. 평무사가 아닌…… 흑랑대의 대주란 말이다.”
초지명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나 순간 그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리고 지위가 올라가면 그 책임이 더욱 막중한 법. 부대주 초지곽을 제외한 이들에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목숨을 바쳐 싸워라. 단 한 번의 기회임을 잊지 말고.”
사십여 명의 흑도인이 머리를 땅에 찧으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이제 홀로 남게 된 초지곽은 양손을 싹싹 빌었다.
“형님!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정말 잘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저를 잘 돌보라고 유언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뿐인 동생의 실책을 제발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부디 한 번만!”
일조장이 안타까운 어조로 대주에게 말했다.
“제가 대주님을 뫼신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어찌 지금 대주님의 괴로움을 모르겠습니까? 하나 부대주의 잘못은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저희들의 과오이기도 합니다. 대주님. 부대주가 정말로 반성하는 것 같으니 기회를 주시지요. 저희는…… 정말로 대주님의 슬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초지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지곽아, 지곽아.”
한없이 안타까운 음성. 끝없이 슬픈 목소리.
초지곽은 그 소리에 마침내 한 가닥 희망을 찾았다.
그는 오체투지로 머리를 땅바닥에 박으며 크게 울면서 말했다.
“형님! 용서해 주십시오. 흑흑흑.”
그의 울음소리가 애달팠다.
마침내 초지명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한 번뿐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초지곽과 흑랑대원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예! 형님. 다시는 결코 형님을 실망시키지…….”
휘익!
바람소리가 일며 청룡극이 떨어졌다.
그리고 초지곽의 팔 하나가 그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끄아아아악!”
초지곽의 비명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 위로 초지명의 준엄한 음성이 떨어졌다.
“너는 죽어야 마땅하나, 팔 하나로 끝낸다. 네 목숨을 구한 것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대원들의 힘이니 늘 감사하라.”
“끄으윽……. 형님…….”
“사천 분타로 돌아가라. 너 같은 겁쟁이는 다시 전장에 설 수 없을 것이니, 다른 명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라.”
초지명은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생 곁으로 다가가 빠르게 지혈을 하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고는 일어나 수하들에게 비장하게 외쳤다.
“내 동생 몫까지 다해 싸울 것이다. 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사지에 있는 수하들을 구할 것이다.”
그의 고함에 수하들이 숨을 죽였다.
“시간이 없다. 지체한 만큼 더 많은 동료들이 죽었을 터!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이백이십의 흑랑대, 이십의 흑천련이 동시에 답했다.
“존명!”
곤륜에 무적검 한추광이 있듯, 천랑대에 천마검 백운회가 존재하듯, 흑랑대에는 초지명이 있어야 진짜 힘을 드러낸다.
그들이 거침없이 앞으로 달렸다.
***
혈절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가뜩이나 불리해진 전황인데 흑천련 수하들이 도망까지 치니 사기는 완전히 꺾였다.
파도가 밀려오며 모래성을 허물듯이 그렇게 흑천련 수하들은 곤륜파와 아미파에게 무너져 내렸다.
‘몸을 빼내야 한다.’
생각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무적검 한추광을 도저히 떼어 놓을 수 없었다. 한 수, 한 초식이 너무 살벌해 일말의 방심이라도 했다가는 그것으로 황천행일 공산이 컸다.
‘어떻게든 놈을 떼어 놓고 그 틈에…….’
“하아압!”
한추광이 기합을 지르며 검으로 단전을 찔러 왔다.
혈절은 급히 몸을 옆으로 휘돌며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혈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추광이 쾌속하게 검을 회수하고는 땅을 툭 치며 허공으로 몸을 띄운 것이다.
‘기회다!’
혈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절정고수끼리 치열한 접근전을 할 때 몸을 띄우는 것은 엄청난 실수다.
혈절은 그저 떼어 놓을 기회만 살폈는데, 이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혈절은 한추광의 하체를 향해 칼을 던지다시피 팔을 뻗었다.
쇄애애액!
그의 칼이 거친 파공성을 일으키며 한추광의 다리를 찔러 갔다.
그런데 공중의 한추광이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반 장이나 옆으로 스스륵 이동했다.
그 모습에 혈절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을 하고 말았다.
허공에서 이동을 하다니!
무적검 한추광이 절정의 경지를 넘어 초절정에 다다른 엄청난 고수였단 말인가?
혈절은 놀라는 와중에서도 급히 몸을 틀었다.
한추광의 검이 자신을 향해 섬전처럼 파고든 것이다.
파파파파아앗.
검에서 흘러나온 검기가 아슬아슬하게 혈절을 놓치며 땅에 박혔다. 그러나 검기가 아닌 검 본체는 몸을 피하는 혈절의 방향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서걱!
“크윽!”
차가운 검날의 화끈한 통증이 혈절의 옆구리에서 일었다.
혈절은 이를 악물며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는 혈절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무적검 한추광!
놈이 아직까지 허공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공중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 와 검을 내리그었다.
콰직!
한추광의 칼이 혈절의 머리를 강타했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혈절은 입을 쩍 벌렸다.
털썩!
혈절의 오금이 접혔다.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생기를 잃은 눈빛.
그제야 한추광이 땅에 착지하고는 차갑게 말했다.
“이게 바로 곤륜의 운룡대팔식이란 신법이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구름 속에서 용이 노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여덟 개의 신법으로 천하제일의 경신법으로 꼽힌다.
사백 년 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곤륜 최고의 절학을 완성시킨 한추광이 대외적으로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혈절은 이미 죽어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기울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아아아아!”
“혈절이 무적검에게 죽었다!”
“한 대협이 혈절을 죽였다. 와아아아!”
곤륜과 아미파가 함성을 질렀다.
이제 채 서른도 남지 않은 흑천련의 정예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쏟아지는 칼날에 고혼이 되어 갔다.
이제 남은 건 흑귀도 장로가 이끄는 천랑대와 흑랑대뿐이었다.
천랑대는 절반 넘게 쓰러져 팔십여 명이 남았고, 흑랑대는 불과 서른 명.
그들은 혈절이 죽었다는 고함을 듣고 흠칫 놀랐으나 이내 묵묵히 칼을 휘둘렀다.
천상 무인인 그들은 그저 흑귀도의 명을 기다리며 싸울 뿐이었다.
현무단 사조, 오조와 함께 두 산의 입구에 당도한 천류영은 저 멀리서 진동하는 고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함과 비명 그리고 병장기들이 만드는 소음이 어지러운 탓이었다.
독고설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대협께서 마교의 혈절 장로를 제거했군요.”
조전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는 정파 무림을 이끌어 갈 동량입니다. 또한, 곤륜파가 사백 년 만에 배출한 최고수이기도 하고요. 당연한 것이라 봐야지요. 괜히 패왕의 별 후보로 꼽히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패왕의 별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들 중에서 ‘혹시 내가 패왕의 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때 해 보지 않은 자가 있다면 거짓일 것이다.
패왕의 별!
그건 모든 무림인들에게 꿈이다.
실제 자신이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를 확률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연하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이뤄질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환상 같은 것.
그때 천류영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일었다. 그 소리에 육십여 예비부대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 동료들은 싸우고 있었다.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천류영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늦은 아침을 먹던 중에 오게 된 것이라…… 제대로 먹지 못했거든요.”
독고설이 옆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내어 주며 말했다.
“육포예요.”
“아! 고맙습니다.”
천류영이 반갑게 받아 들고는 주머니 속의 육포를 꺼내 입에 물었다.
독고설은 육포를 씹는 천류영을 보다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눈빛이 맑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육포를 우물거리는 모습이 왠지 아이 같아서 귀엽게도 느껴졌다.
그때 조전후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으음…… 마교도인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예비부대 육십 명과 천류영이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입술을 깨물며 점점이 나타나다가 하나의 선이 되는 그들을 보았다.
천류영이 씹던 육포를 꿀꺽 삼키고는 급히 물었다.
“인원이 어느 정도 되어 보입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조전후가 말했다.
확실히 그는 이곳에서 가장 고수이며, 연장자였다.
“거리가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백은 확실하게 넘어 보이는군.”
자신들보다 세 배나 되는 인원에 긴장감이 흘렀다. 천류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백이나? 많아야 백여 명 정도가 올 줄 알았는데…….”
“저 펄럭이는 깃발은 아직 글자를 볼 수는 없지만, 빛깔로 보아선 흑랑대인 것 같네.”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만, 그래도…… 천마검이 안 왔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천류영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저 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미 천마검이 천랑대를 이끌고 오고 있음을.
천류영의 안심했다는 말에 조전후가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아마 저 부대엔 흑랑대주가 있을 것이네.”
“그렇겠지요.”
“흑랑대주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군.”
“예, 딱히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조전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워낙 천랑대가 유명하니 흑랑대가 묻힌 것이지. 천마검처럼 젊고 잘생기지도 않았고, 불패의 장수도 아니니까. 그러나 흑랑대주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전장을 누빈 인물이네. 결코 살아날 수 없는 위험한 곳에서도 늘 살아 돌아왔고. 흑랑대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용장이네.”
“…….”
“삼 년 전, 그는 일천의 북해빙궁(北海氷宮)에 포위된 일백 수하들을 구하기 위해 불과 삼십 기의 수하들만 데리고 북해빙궁에 들어간 적이 있었어.”
처음으로 천류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예비부대 모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전후는 자신의 거대한 오 척 대검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컸어. 결국 북해빙궁의 추격을 피하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흑랑대는 스물도 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대체 어떤 장수가 그런 사지로 수하를 구하기 위해 들어가겠냐는 말이지. 겨우 삼십 명만 데리고 말이야. 당시 북해빙궁의 피해는 사백 명이 넘었어.”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안색이 핼쑥해졌다.
북해빙궁은 정파 무림인도 꺼리는 새외 세력이다. 빙공(氷功)에 능한 고수가 많아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집단.
조전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북해빙궁을 천마검 백운회가 접수했다고만 알고 있지. 그러나 그전에 이미 북해빙궁은 흑랑대주 초지명에게 당한 일로 전의를 상실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
“내가 굳이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칫 시간만 끌면 된다고, 뒤에서 곧 많은 아군이 도우러 올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지. 그냥 한순간에 골로 갈 수도 있으니 마음가짐을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침묵하던 천류영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방금 그 얘기. 출처가 어딥니까? 소문이 으레 부풀리듯 그런 과장된 풍문이 아닐까요?”
모두가 천류영의 말에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만 리 떨어진 북해에서 일어난 일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독고설이 고개를 저으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 부조장님이…… 원래 북해빙궁 출신이거든요. 폐쇄적인 북해빙궁의 분위기와, 추운 게 싫다고 젊었을 때 나왔는데…… 그래도 죽마고우들하고는 가끔 연락했었데요. 어쨌거나 지금 이 얘긴 저도 처음 듣네요.”
조전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싫다고 떠난 곳이지만, 어쨌든 고향이니까. 고향 사람들이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빛냈다.
“내 많은 벗들이 당시 흑랑대주에게 죽었지. 난 천마검은 잘 몰라. 여전히 애송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흑랑대주 초지명은…… 두려운 상대지.”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
스르르릉.
굵고 거대한 칼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드디어 목숨을 걸고 싸울 상대를 만나게 되는군. 저런 대단한 자와 싸우다 죽으면 무인으로서 여한이 없을 거란 생각을 늘 해 왔거든.”
야차검 조전후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주변이 싸늘해졌다. 사조와 오조의 모든 사람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심호흡을 해 댔다.
동료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휴식을 취한 값을 해야 할 때였다.
흑랑대가 이곳까지 당도하려면 어림잡아 일각 반 정도가 남아 보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달려오는 모습은 가까워질수록 묘한 공포와 전의를 들끓게 했다.
천류영이 흑랑대를 뚫어지게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빠져도 되지 않을까요?”
“…….”
“저는 싸움을 못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