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의 위에는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위에는 신이 존재한다.
신은 모든 생물의 근원이자 창조자였고, 현재는 세상을 지켜보는 관리자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관리한 지도 어느덧 1000년. 신은 이를 기념하여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한다.
“돌아오는 10년마다 전 세계를 범위로 오직 한 명만을 뽑은 후, 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겠다. 그리고 그 내면이 무엇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이라도 무조건 들어주겠다.”
인간은 그렇게 10년마다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신의 자비’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신의 자비를 받은 자’를 소원자라고 일컫는다.
* * *
2029년 12월 31일, 오후 2시 서울
성자의 거리
“아니- 난 이번에도 연말을 죄다 바치는 줄 알았다니까?”
[근데 결국은 취소 됐으니까 좋은 거잖아.]
“응‥ 얼마만이니 진짜…·.”
‘아- 너무 좋아! 어떡해!’ 지안은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방금까지만 해도 중요한 미팅 일정이 잡혀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거래처가 갑작스레 개인사정으로 취소요청을 보내오는 바람에, 미팅은 보란 듯이 취소가 되었다.
덕분에 거사를 치러야 했던 오늘이 지안에겐 ‘강제휴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처럼 얻은 휴가에 지안은 재빨리 그녀의 친구, 민아와 약속을 잡았다. 원래 같았다면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겠지만, 이번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만큼은 특별하게 보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지안이 속으로 한참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이어서 민아의 말이 들려왔다.
[우리 못 본지도 꽤 돼서 언제 한 번 약속 잡으려고 했는데, 잘 됐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만났을 때가 9월이었네.’
사실 지안은 한동안 회사일로 많이 바빴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인지 절친 민아와 만나는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나 거의 다 왔는데. 넌 어디쯤이야?”
[앞 사거리 쪽이야. 금방 갈게 기다려!]
약속 장소는 지안이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였다. 덕분에 그녀는 민아와 전화통화를 하며 부지런히 걸어간 결과 어느새 약속장소에 거의 다다를 수 있었다. 어디냐고 묻자 앞 사거리 쪽이라며 금방 간다는 민아의 말에 지안은 조금 의아해했다.
‘이번에도 거기 아마 꽉 찰 텐데….’
왜 거기로 온다 한 걸까. 지안이 그렇게 생각을 한 순간, 갑자기 앞에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터질 듯 붐비어 오는 인파에 지안은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아….”
지안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의 눈앞엔 매해 연말마다 연출됐던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지안은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끌어당기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신사’들 있어. 사거리 말고 왼쪽 지름길로 틀어서 와.”
민아가 향할 사거리는 이미 ‘신사’들로 득실득실할 것이 분명했다.
[미친…‥! 삥 돌아오게 생겼네. 나 늦을 것 같으니까 너 먼저 들어가 있어!]
“응. 곧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끊어.”
“어!! 그래!!!!!”
멀지 않은 거리로부터 시끄러운 소음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와, 더 이상은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지안은 한숨을 푹 쉬며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을 이내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정말이지 숨길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약속장소 근처에 붐비는 이들이 ‘신사’였다니!
훈훈한 분위기에서 그녀가 민아와 수다를 떨기엔 이미 그른 듯싶었다.
신사, 이름 하여 ‘신의 사생팬’의 줄임말.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을 추종하는 극성 신도들의 모임이란 소리다.
1010년부터, 신을 너무나도 존경스러워 하면서도 그의 눈에 들어 ‘소원자’로 더더욱 특별해지고 싶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옛날부터 풍습에 따라 속에 있는 감정들을 억누르며 예를 지켜왔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러지 않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 ‘신사’를 만들어냈다.
물론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신사’의 뜻은 ‘신의 사생팬’이었지만 당사자들은 그걸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는 중이다.
때마침 젊은 남자 한 명이 사람들 가운데로 버젓이 걸어 나왔다. 굳이 비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도록 휙휙 쉽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아마 저 남자가 ‘신사’의 리더인 것 같다고, 지안은 거의 확신하듯 짐작했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연상시키는 듯한 신기한 광경에,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보고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지안 또한 어이가 없어서 숨을 가늘게 흘렸다.
‘하아- 이거 참….’
갈수록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신사’들이었다. 물론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재주 말이다.
한참을 걸어가던 남자는 자리라도 잡은 것인지 태연하게 멈춰 서보였다. 그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확성기에다 입을 갖다 댄 채로 한 쪽 팔을 휘휘 내저으며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나가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
리더의 뒤에 있던 ‘신사’무리가 그의 외침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외치기 무섭게 곧바로 다들 그를 따라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으어어- 신이시여! 은총, 은총을 내려주세요!
이런지도 벌써 몇 십 년째. 소원자는 10년마다 발표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항상 똑같은 구호들만 연달아 외쳐댔다.
이쯤 되면 지겨울 법한데도 이들은 늘 같은 말, 같은 행동만을 고집했다. 한 번은 궁금함을 못 참은 어느 유명 기자가 그들을 위한 특집까지 내고 취재를 했었다.
‘왜 신께 그 두 마디만 반복을 하는 거죠-?’
핵심이라면 핵심인 질문에, 답변이랍시고 돌아오는 대답은 참으로 형편없었다.
“이래야 신께서 지금까지의 저희 정성을 알아봐주시죠. 저희도 역으로 저희들의 존재를 신께 각인 시키는 거예요.”
각인.
신의 자비를 받기로 한 자의 정보는 9년이 10년으로 바뀌기 직전에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물 밀 듯 들어오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것을 ‘각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각인에 대해 정확히 말하자면, 자정이 되는 순간 소원자의 정보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버린다는 표현이 맞았다.
마치 없던 기억을 누가 억지로 밀어 넣어 기억하길 강요하는 것처럼 전 세계 사람들은 알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굳이 누군가가 따로 나서서 저번이나 이번 소원자에 대해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러한 것을 ‘신이 모두에게 내려주신 자비’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애로운 능력을 역으로 자신들이 신에게 사용하는 중이라니. 애초에 신의 관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능력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같은 인간으로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창피하게 만드는 일과도 같았다.
신과 인간의 영역은 선처럼 확실하게 그어져 있다.
그것은 숨 쉬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
‘신사’의 엉터리 같은 답변에 기자는 잠시 침묵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베테랑으로 유명하던 기자조차도 잠시 할 말을 잃어 하마터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는 특집을 망칠 뻔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날부로 이들은 ‘신의 사생팬’의 줄임말인 또 다른 ‘신사’가 되어 몇 년째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낮은 확률인데도 소원자 당첨발표에 이토록 애를 쓴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그제야 자신의 희망이 헛되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안은 계속해서 괴성을 질러대는 ‘신사’들을 보며 잠시의 과거 회상을 끝내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지금에 집중했다.
‘여기서 더하면 좀 민폐인데.’
‘신사’들은 한참이나 먼 하늘을 향해 그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치켜들고선 제 사정만 이것저것 애처롭게 토해내기 바빴다. 그들에겐 나름 중요한 의식일지는 몰라도, 지안에겐 ‘신사’의 의식치레가 길을 막고 있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잠시 뒤, ‘신사’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무릎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각자의 짐을 챙기며 저들끼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지안이 100% 예상하건대 아마 이들은 방금 했던 의식을 또 다시 반복하기 위해 다른 거리로 향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하지만 지안은 이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1분이라도 더 빨리 어서 민아와 만나는 게 중요했다.
지안은 이 틈을 타 빠르게 ‘신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길이 막힌 지도 벌써 이십분은 더 된듯했다. 그렇다면 민아가 약속장소로 잡은 카페에 이미 도착해 있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이다.
지안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민아에게 뭐라도 사줄까- 생각하며 도착한 건물 안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때마침 건물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와있는 중이었다.
“문이 닫힙니다.”
“어어- 잠시만요!!!”
닫히기 직전인 두 번째 엘레베이터 안으로 지안이 급하게 몸을 구겨 넣었다. 그녀가 탑승함과 동시에 첫 번째 엘리베이터 안에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듯 나오고 있었다.
그사이로 창백한 하얀 피부를 가진, 조금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내리고 나서 조금 걷다가, 멈춰 서서는 옆쪽의 엘리베이터 입구를 향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뒤를 돈 그 순간, 지안이 타고 있는 두 번째 엘리베이터의 문이 쿵-하고 닫혀버렸다.
“…….”
남자는 닫혀버린 엘레베이터를 조금은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다시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