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오후 3시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어느 건물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수려한 외모가 눈에 띄었던 것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그를 향해 흘긋흘긋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저벅저벅 자신이 갈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최고의 병원, 최고 의사가 힘겹게 내뱉은 한 마디. 그를 포기하겠다는 말.
‘더 이상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남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에게는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이고 스스로 반복해왔던 질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심장병에 시달려왔던 그였다.
다행히도 남자의 집안은 그에게 수술비를 대줄 능력이 있었기에, 돈 걱정은 필요 없었다.
다만 계속되는 수술이 문제였다.
심장은 생각보다 쉽게 고쳐지질 않았고 그의 완치를 기다려왔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만 갔던 것이다.
그는 과거회상에 잠겨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마 6번째 수술 후였을 것이다.
“벌써 6번째야!!!! 언제까지고 이렇게 기다릴 순 없어!! 후계자가 된다 한들, 몸이 이래서야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나 있겠냐고!”
집안에 능력이 있는 만큼 그 능력을 이을 사람도 필요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이 운 좋게 아들로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며 온종일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던 부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가 병을 앓고 있단 걸 알게 되자 그들은 오직 분노에만 휩싸여갔고, 마침내 오랜 시간을 못 이겨 언성을 높이는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그의 부모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버님…· 일단 진정하시고 좀 더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겠-”
“아니.”
“…….”
“내가 장담하지.”
그때, 자식인 그가 부모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모두 듣고 있다는 것을.
“이 녀석은 틀렸어.”
남자는 아직까지도 생생히 귀에 들리는 듯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이자 평생 없애지 못할 흉터였다.
그렇게 그의 아버지는 그를 포기했다.
매정하다면 매정한 게 맞았고 못됐다면 못된 부모였다. 그 후로 희망을 갖고 2번이나 수술을 더 받은 그였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그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이었고, 생사를 오가는 나날과도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몸은 저주 걸린 악마의 몸인 듯 느껴졌고 하루에 4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을 때면 그는 지옥의 물을 떠다 마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잠깐의 행복은 존재했었다.
‘오늘은 새로 나온 게임기 들고 왔어!’
항상 그를 위해줬던 사람이 있었다.
‘이건 건강이 좋아지란 의미를 가진 꽃인데…· 꽃말 듣자마자 너한테 바로 가지고 온 거야.’
자기 자신보단 그를 더 아꼈던 사람이었다.
‘이 사진보면 눈감고 있는 애 있잖아. 사실 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애야.’
‘…·‥.’
‘너도 나중에 좋아하는 애 생기면 나한테 바로 말해줘야 해, 알았지?’
‘…왜?’
해맑은 웃음으로 잠시나마 그의 아픔을 덜어줬던.
‘그야 넌 내 동생이니까!’
이제는 추억으로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쌍둥이 형, 선우훈.
그가 갑자기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도 형을 생각하며 20년이나 버텨왔었는데, 이제 그는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막상 그동안은 죽음이 두려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악착같이 견뎠었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보니 벌써 2번째네.”
그는 애써 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손에서 힘없이 놓쳐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포기당하는 거….”
울컥한 심정을 느끼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여느 때와 같이 멀찌감치 서서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수행 비서를 찾을 수 있었다.
비서는 차를 대기시켜 놓고 그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그를 기다려주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곁을 수행비서가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말 고마운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 저기 서있는 비서아저씨 한 명 뿐일 것이라고, 남자는 조용히 생각했다.
차에 타겠냐는 비서의 손짓에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 뜻으로 수행비서의 반대편 쪽 거리로 몸 방향을 틀어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내보였다. 그러자 비서는 알겠다는 듯 차를 몰아 그에게 눈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쳐갔다.
“미안해요… 아저씨‥.”
그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이미 중대한 결정은 내린 후였다.
“형이 있는 곳으로… 그 곳으로 갈게요.”
남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그에게는 두려울 것이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 * *
밤 10시, 거리 주변 호프집
지안이 민아를 만난 지도 어느덧 7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그 둘에게서는 헤어질 기미가 티끌만큼도 없어보였다.
이들은 카페에서 몇 시간동이나 지칠 때까지 실컷 수다를 떨다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아- 2030년을 위해 건배!!!”
“30살 되는 게 뭐가 그리 좋아….”
2030년. 민아와 지안이 20대의 끝자락에서 벗어나 나이 앞자리를 새로이 하며 딱 30살이 되는 해.
두 시간 후면 이들은 곧 서른 살이 될 예정이었다.
“아니이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이-”
몇 잔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민아는 얼마가지 않아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민아는 주량이 정말 약했다.
지안은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심지어 이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소주도 아니고 맥주였다.
‘맥주 2잔이 민아의 한계였던가.’ 지안은 조금 허무함을 느꼈다.
건배하자 해놓고 왜 얘는 맥주에 치킨을 넣고 있는 것일까. 정신이 어디로 반쯤 나가버린 민아를 보며 지안은 혼자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간간히 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남자 두 명중 한 명이, 이 틈을 기다렸다는 듯 지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
지안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한테 다가오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없으시면 번호 좀 주세-”
“있어요.”
“…네?”
역으로 지안은 그에게 눈웃음을 살포시 지어보였다.
“있다고요.”
“……”
“남자친구.”
꺼지라는 뜻으로 웃은 건데, 이상하다? 지안은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한 가지 방심한 것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그녀의 얼굴이 조금 많이, 꽤나 적잖게 예쁜 축에 속했던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성격 탓에 지안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여자가 봐도 반할 것 같은 그 웃음에 대시를 하던 남자는 그 순간 자신의 본분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그녀 앞에 서 있는 중이었다.
“오… 거절해쒀 지아뉘-”
나갔던 정신의 반을 어디서 다시 챙겨오기라도 한 것인지, 민아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수없이 봐왔던 상황인데도 그녀는 질린다는 기색 하나 없이 흥미진진한 연극을 구경하는 것처럼 신나보였다.
거절당한 남자는 민아의 말을 듣고서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창피한 듯 곧바로 짐을 챙겨 일행과 함께 가게 밖으로 급하게 나가버렸다.
“후우….”
드디어 갔네. 지안은 남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취해있는 민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제 집에 가자.”
이 이상 더 있다가는 민아의 술주정을 지안이 다 받아줘야 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주량이 강해도 너무 강한지라, 술에 취하려면 아마 민아의 10배는 마셔야 취할 것이다.
“시른데에…‥.”
가기 싫다며 졸라대는 민아의 모습에 지안은 호프집을 가자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너 다음날 죽었어 진짜- 그녀는 속에서 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 *
밤 11시 50분, 주택가
결국 1시간이 더 지나서야 민아를 호프집에서 끌고 나올 수 있었다. 그마저도 힘이 들어 버거웠던 지안에겐 오늘 하루가 퍽 힘들었던 하루로 기억될 듯 했다.
민아의 여동생을 불러 가까스로 민아를 데려가게 했고, 이제 자신만 집에 잘 들어가면 일과가 순조로이 다 끝날 터였다.
“됐어‥‥ 거의 다 왔어‥.”
점점 걸으면 걸을수록 그녀가 사는 집의 지붕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몇 십 걸음이나 남았는데도 지안은 집에 다 온 것처럼 벌써부터 몸에서 힘을 빼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집을 코앞에 두고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은 탓에 느릿느릿 집 대문 앞으로 한참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지안은 무의식중에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지금 시각은 11시 58분.
그러고 보니 곧 소원자 발표와 함께 머릿속에 각인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잊으려 애쓰고 있던 소원자 발표가 결국 생각나버려서, 지안은 가뜩이나 안 좋은 기분에 최악의 기분을 더해야 했다.
‘난 이 순간이 제일 싫더라‥·.’
소원자 발표는 그녀에게 있어서 끔찍한 기억만 떠올리게 하는 저주일 뿐이었다. 각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의 자비 자체만으로도 지안은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지내 왔던 그녀였지만, 사실 그동안 지안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지안에게 있어서 지난 20년간의 삶 중에 그녀가 괜찮았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서 지나가길… 제발, 아무 일도 없이…….’
늘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다. 자신과는 관련되지 않기를. 모두가 다치지 않기를. 그녀는 오직 그것만 생각했다.
“흐윽…‥.”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지안은 자기도 모르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애써 꾹 눌러왔던 눈물샘이 터져버린 듯 어느 순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나오는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턱 끝까지 흘려 내렸다.
20년 전 ‘그날’도, 10년 전 ‘그날’도.
그녀는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소원자로 인해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누굴 원망하지도, 죄를 묻지도 못한 채로 떠나보내야 했었던 날.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한 날.
그 날이 그녀에게 또다시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지안은 그저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 시간은 정확히 11시 59분 58초.
59초‥ 12시 00분 00초.
지안의 턱에 맺힌 눈물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동시에 소원자가 발표되었다.
“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10년 전 ‘그날’처럼 머릿속이 띵하게 울려왔다.
각인.
각인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밀 듯 무언가가 머릿속에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볼에서는 차갑게 식어버린 눈물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