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아니야.”
지안은 느릿느릿 페이지를 넘기다, 이내 책을 덮어버렸다.
하아-
입에선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두 시간 가량의 시간을 오로지 책 찾기에만 투자했는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볼까.’
지안은 고개를 돌려 빽빽하게 나열된 책장들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열 번이고 더 돌아다닌 곳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던가.
「시간을 부탁해」
「시간을 아끼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시간을 아끼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죄다 소설 아니면 자기계발서 뿐이었다. 분명 시간에 관한 것이기는 한데, 지안이 원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었다.
‘도대체 왜…!’
“내가 찾는 건 하나도 나오질 않는 거야….”
지안이 마지못해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까지 해보였다.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후우… 이렇게 있다간, 아무것도 못 찾을 거야.”
지안은 책꽂이에 뒤통수를 쿵- 박으며 몸을 편하게 기대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무턱대고 도서관에 와 단서를 찾으려 한 게 잘못인 것 같았다.
‘음. 일단은, 상황정리를 가볍게 정리해볼까….’
현 상태가 혼란스러울수록 이상하게도 곧잘 냉정함을 다시 되찾던 그녀였다. 지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숨을 내뱉고서 마음을 서서히 진정시켰다.
그러자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핑핑 돌던 머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판단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고, 지금은 20년 전의 모습이야.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가지 않았고… 나는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안은 정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
“……!”
왜 그걸 생각 못했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결과에는 원인이 따른다는 것.
지안은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원초적으로 드는 의문을 자연스레 무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냥 돌아왔을 리 없어. 분명, 이유가… 있어.”
납득할 만한, 납득시킬만한 이유.
“내가 한이 깊어서? 과거 시절이 너무 그리워서? 소중했던 시간이어서? …애초에 나 때문에 일어난 결과기는 한 거야?”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인가.
충분히 의심해볼만한 점이었다.
지안이 사는 세상은, 그저 단순하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고해서 갑자기 어떤 식으로 쉽게 바뀐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 그런 세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나 때문이 아니면, 대체 누가….”
심장박동소리가 점점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심신의 안정은 무슨- 다시 원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냥 무시하고 모른 척 살까.’
동시에, 그래도 될까-라는 질문이 화살로 돌아와 꽂혔다. 지안의 마음속이 차츰 불안감으로 휩싸여갔다.
다시 행복해도 되는 건지. 행복해 질 수 있는지.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네, 할머니. 저 지금 거의 입구에요!! 에이… 거짓말 치는 거 아닌데!!! 금방 도착-”
퍼억-
“악…!”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 의해, 지안은 제 자리에서 보기 좋게 넘어지고 말았다.
“어어? 괘, 괜찮아? 내 손 잡고 일어날 수 있겠어?!”
“…응.”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부딪힌 것 같았다.
“헤헤, 다행이다! 어디 아픈 데는 안 보여서.”
“…….”
“고집 부려서 오랜만에 도서관 온 건데, 그것치곤 시간이 부족해서… 급하게 뛰어가느라 앞을 제대로 못 봤어, 미안해.”
“급해 보이던데, 지금은 시간 괜찮고?”
“아….”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꽤나 뾰족한 질문이기에, 굳은 표정이 나올 만 하다고 지안 스스로도 인정했다.
“…하하. 그러게, 지금도 부족한데”
그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선 나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진짜 늦으면 안돼서, 이만… 가볼게. 아, 그리고 이거!”
“…?”
그가 제 발 앞에 있는 책을 주워들어 지안에게로 건넸다. 아마도 방금 전 크게 부딪힌 것 때문에 책장이 흔들려서 떨어진 걸로 보였다.
얼떨결에 책을 건네받게 된 지안은, 어리둥절해하며 표지를 흘긋 바라보았다.
「100명의 소원자 기록서」
뭐야. 이걸 왜 나한테-
“야, 잠깐만. 이거 내꺼 아니야.”
지안이 책에 있던 시선을 거두고 이내 앞을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나 그는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뭐, 뭐야… 5초, 아니 3초밖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지안은 갈 곳 잃은 눈을 여기저기로 굴려대며 한참동안을 방황했다.
“하… 20년 전으로 돌아가질 않나, 이제는 순간이동 인간이 나타나질 않나.”
“지안아, 왜 혼자 중얼거리고 서 있어?”
“아악…! 훈이 너, 언제 왔어?”
작정하고 호러를 담당한 이번 주자는, 선우훈이었다.
“…방금. 책도 다 읽었고, 계속 안오길래 걱정돼서…….”
“어, 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나 오래 있었어?”
“응…… 한 시간. 지금 12시야.”
“에이, 삼십 분도 안 걸렸는데. 그나저나 12시…?”
도착한 시간이 8시인데, 12시라고?
허어-
“하나도 한 게 없는데….”
.
.
.
.
.
결국 이 책을 빌려오고야 말았다.
‘지안아, 그거 빌릴 거야?’
‘응?’
‘…너가 지금 들고 있는 책 말이야.’
‘…….’
지안은 손에는 어느새 옅은 베이지색의 책이 들려있었다.
100명의 소원자 기록서.
뭔가 느껴지면서도 아무것도 아닌듯한 기분. 왠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홧김에 대출해버리고 말았다.
지안은 선우훈과 헤어져 이미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학교를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안의 엄마는 그녀를 크게 혼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선생님한테 전화 왔더라. 학교를 빠지긴 왜 빠져…’
‘엄마….’
‘…딱 보니까 대충 알겠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지! 왜 무단으로 빠지고 그래.’
‘……?’
그녀의 창백한 낯빛 덕분에, 오히려 잔소리 섞인 걱정을 받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저걸 어떡하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저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고민이었다.
“그냥, 읽어볼까.”
지안은 의자에 걸쳐 앉아 가볍게 책의 첫 장을 넘겼다. 책의 머리말은 단순하고도 간단한 어구였다.
“10년에 한 번 일어나는 기적의 주인공. 이는 소원자라고 불릴 지어니, 신의 자비 속에서 영원한 축복이 계속되리라.”
“…….”
지안의 눈빛은 싸늘하다 못 해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걸 누가 몰라-
“내가 이것 때문에 무슨 일들을 겪어왔는데…!”
괜히 읽은 것 같았다. 기껏해야 한두 줄 밖에 안 되는 문장인데도, 벌써부터 목 언저리가 답답하게 조여지는 느낌이었다.
“소원자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전 세계 사람들 다 모아놓고 희망고문 같이 그런 짓거리를 해대는데…!”
지안이 속에 있던 말들을 속사포로 뱉어냈다.
“그리고,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떤 미친 인간이 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원해봐, 초능력 같은 걸 원하면 세상은 어떻게 되냐고!! 아주 나처럼 과거로 돌아오고도 남겠네….”
어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입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렸다.
신의 영역.
분명 그거라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설마, 소원으로…?”
서늘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지안은 필기구가 놓인 곳을 향해 재빨리 손을 뻗어 공책과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무언가에 홀린 듯 순식간에 글을 써내려갔다.
2029년 12월 31일, 과거로 돌아간 날.
시간은 약 11시 후반쯤.
소원자 발표.
각인정보 29살 남자. 그 이상은 기억안남.
이제야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았다.
“그러면…… 결국….”
빌고 빌었던 바람과 달리, 지안은 또다시 소원자와 엮여버리고 만 것이었다.
* * *
“할머니, 나 학교 다닐래요.”
노인은 쓰디쓴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의식을 할 때는 말이다, 오직 한 마음에만 정신을 집중하여-’
‘저 어디 좀 다녀올게요.’
‘그,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어디를 간다고…….’
‘헤헤, 도서관이요. 궁금한 게 생겨서! 잠깐만, 아주 잠깐만요, 네?’
하도 고집을 부려 잠깐 외출을 허락해주었더니 도서관에 간다하질 않나. 돌아오자마자 다니기 싫다던 학교를, 무슨 바람이 불어 다니겠다고 하질 않나.
“전에는 관심 없다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그러는 게야?”
노인이 무심한 눈빛으로 이에 답했다.
“관심이… 생겨서요.”
‘설마, 여기에 적성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 도서관에?’
노인은 감격한 듯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이 할미를 이해하고 따라와 줄 모양이구나…!”
“아.”
“……?”
“음, 그것도 생각해볼게요.”
뭐시라-
눈가에 일렁이던 물기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생글생글 웃는 손자의 얼굴이 아주 얄밉게만 느껴졌다.
“후우… 어디로 갈지 생각은 해봤고?”
“했으니까 간다고 말하죠, 헤헤. 바로 절차 밟게 해주세요.”
“…그래, 그러려무나.”
정말이지, 예상할 수 없는 아이야-
더 이상 가둬두고 세뇌를 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이쯤에서 그만 풀어주는 게 옳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 * *
“홈스쿨링하다 온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와아아-
그에게로 뜨거운 환호와 큼지막한 박수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전학생을 잘 받지 않기로 유명한 학교인 데다, 특별한 능력 또는 집안을 요구하는 곳이기에 뉴페이스는 그야말로 모두의 화젯거리였다.
“잘생겼다…!”
게다가 반반한 외모까지.
“눈 예쁜 거 봐, 웃을 때 장난 아니야!!”
“어떡해! 훈이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이런 이상,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성현을 보자마자 반 여자애들은 저도 모르게 감상평을 한 마디씩 내뱉을 정도였다.
“야, 쟤 축구 잘하게 생겼어.”
“힘 셀 거 같은데, 이따 같이 놀자고 할까?”
물론 남자애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예외는 어디에나 있는 법.
“…….”
지안만 유일하게 아무 움직임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쟤가 왜 저기에-
“그래서 우리 성현이는 어디에 앉고 싶니?”
“저는…”
반 애들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교내 규칙과도 같은 짝 선택은 오로지 전학생의 몫이었다.
지안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짝꿍인 선우훈의 옷깃을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곤 눈을 세게 감고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지안아…? 어디아파? 안색이 너무 창백한-”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아까부터 계속 시선이 따라붙어 앞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시선의 주인은 이성현이 틀림없었다.
이성현은 교실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안만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살면서 생글생글한 웃음이 그렇게 싫어 보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저는… 저기 중간에 앉은 서지안 친구랑 짝 할래요!”
아 뭐야- 반
아이들이 밀려오는 아쉬움에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맞다, 이름표…’
지안은 교복 위에 달려있던 명찰을 떼버리고선 작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왜 이 학교는 교복을 입고 다니라는 거야-
“헤에, 머리 망가졌다.”
“……!”
어느새 이성현은 지안의 책상 앞쪽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지안의 머리를 다시 가지런하게 정돈해주며 옆 책상에 살며시 가방을 놓았다.
“책은, 잘 봤고?”
이성현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지안의 눈동자가 점차 흐려졌다.
이걸 뭐라 답해야 돼-
“…그거, 내 책 아닌데 왜 멋대로 주고 갔잖아.”
“…….”
이성현은 그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환한 웃음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지안아, 아는 애야?!?”
선우훈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며 이성현을 잔뜩 쏘아보고 있었다.
“나. 이제 앉아도 될까.”
“…다른 데 알아봐. 여긴 내 자리야.”
“전학생이 짝꿍정하는 거, 규칙 같은 거라면서?”
“…….”
선우훈 답지 않은 뾰족한 말투였으나,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완패였다. 전학생의 특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성현이라고 했지?”
“…그래.”
“왜 지안이야?”
“음…… 그냥?”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선우훈과 이성현 사이에 오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지안은 그런 둘을 무시한 채,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바뀌었어.”
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생겨버렸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던 ‘이성현’이란 변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