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전날 기억을 더듬어 보는 로딘.
소란스러운 파티장을 나와 비틀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큰길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조용한 곳,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달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낯선 거리에서 오바이트를 했는데... 그 뒤론 아득하다.
“택시기사 집?”
하고 둘러보는데, 남자 방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방 안 여기저기 붙어있는 드로잉들, 책장에 꽂힌 패션관련 책들, 인체모형 그리고 재봉틀까지... 여긴 옷만드는... 여자의 방이다!
로딘, 우선 여길 나가야한다는 생각에 문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순간, 책상 위 드로잉 북이 시선을 끈다.
“그럴 때 아냐...”
하며 호기심을 누르는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당긴다. 살짝 갈등하는 듯하더니, 이내 홱 돌아서는 로딘, 드로잉 북을 들어 휙휙 넘겨보는데.
“뭐, 없자나 별거”
하다 어느 페이지에선가, “이건 뭐 좀...” 하며 까다로운 눈으로 보다가 휙 아무렇게나 던져놓는데, 드로잉 북이 툭액자 하나를 넘어뜨린다. 액자를 바로 세우니, 사진 속 모녀가 보인다. 방주인으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잠시 보는 로딘. 그리고는 드로잉 북 표지에 쓰인 이름을 내려다본다.
“강미유... 너냐? 날 이런 데 재운 게?”
하다가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자신이 잔 침대 옆에 붙은 미유의 메모가 보인다.
표정이 싹 바뀌며 “설마... 스토커??”
순간 소름이 싹 끼치는 로딘, 액자에서 물러나 서둘러 방을 빠져나온다. 계단을 쫓기듯 내려오는 로딘, 급한 마음에 전날 더듬어대던 천사들을 못보고 전력질주다. 달동네 아래, 복잡한 골목길 사이에서 길을 헤매는 로딘.
“무슨 미로도 아니고... 어디가 어딘 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며 지나온 길을 보며 “오 마이~ 꿈에 나올까 무섭네”
하는데, 어디선가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가 보는데, 드디어 저 멀리 대로변이 보인다.
로딘, 감격해 달려가며, 소리 높여 외친다. “택시!!!!!!!!”
로딘이 그의 무대로 복귀할 무렵, 미유는 동대문 원단시장에 왔다. 사실 몸은 동대문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집에 있을지도 모를 로딘 생각에 빠져 있다. 상인이 보여주는 원단을 만져보는 현경,
“깡. 이거 어때? 만져봐. 비비드한 게 더 나으려나?”
멍한 미유를 툭툭 쳐 깨우는 현경.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미유. 도저히 안 되겠다.
“나 집에 좀... 내일 봐.”
로딘이 미로라고 짜증냈던 길을 따라 집으로 막 달려 올라가는 미유. 숨을 헉헉 거리며 한참을 올라가다 계단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아득하다. 순간,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 벽화 그림을 더듬으며 층계를 오르던 로딘,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며 오르는 자신의 모습. 그러다 문득 자신을 내려다보며 했던 말.
“누구야? 너도 천사야?”
로딘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는데, 또 떠오르는 기억. 옷을 벗기던 미유를 꼭 끌어안았던 로딘. 미유, 순간 가슴이 미친 듯 뛴다. 자신이 사는 다세대 주택 앞 현관에서 망설이는 미유.
“아 어떡하지....없겠지? 아냐 어쩌면...”
하다 맘을 굳게 먹고 들어가는 미유. 조심스레 방문 앞에서 똑똑똑 “계세요?” 하는데 기척이 없다.
역시나 방은 비어있다. 순간 가슴 졸였던 자신이 우스워진다.
“그럼 그렇지. 어우 강미유 이 바보...”
그래도 잊지 못할 밤인 건 분명하다. 로딘의 흐느낌이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미유, 저도 모르게 로딘의 체온이 닿았던 목덜미를 쓸어본다.
그 시각, 로딘을 태운 택시가 그의 집 앞에 서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여자가 달려와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샤론이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보니, 어젯밤 일이 더 심각하게 와 닿는다. 로딘이 샤론의 팔을 풀자, 그녀가 빠르게 로딘의 초라한 행색을 위아래로 훑는다.
“무슨 일이야? 어? 강도라도 만난거야?”
“강도??”
로딘도 궁금하다. 대체 자신을 데려간 사람이 누군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본 방의 풍경은 강도라기 보단....설마 진짜 스토커?? 순간 조금 전 헤맸던 미로 같은 길이 떠오르며 몸서리를 치는 로딘. 이때 서 있던 택시가 빵빵 크랙션을 울린다.
“아참. 얘긴 천천히 하고... 저기 너 돈 가진 거 있냐?”
샤론, 그제야 택시가 왜 안 가고 서 있는지 감이 온다. 얼결에 지갑을 찾던 샤론 순간 또 울컥한다.
“무슨 일이야... 진짜 강도야??”
일상으로 돌아온 로딘은 파트너인 샤론의 이름을 쉴 새 없이 불러댄다. 로딘이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게 중요한 결정부터 모든 궂은일까지 도맡아 하는 그녀.
“샤론~~~~~”
“샤론 봤어?”
“어딨어 샤론~~~??”
복도를 달려 작업실로 샤론이 막 달려 들어가 보면, 로딘이 늘 그렇듯 바퀴달린 의자를 타고 이리 저리 자유유영 하듯 돌아다니고 있다. 작업실에서 로딘은 늘 그렇게 돌아다닌다. 그러다 뭔가 아이디어가 딱 꽂히면, 사람들을 불러놓고 회의를 한다.
작업실은 로딘에겐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공간이다. 샤론을 비롯해 재단사들, 스텝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구현해낸다. 음악을 틀어놓고 흐느적대기도 하고, 프로틴 바 따위로 식사를 대신하며 온종일 이 공간에 매달려 있는 로딘.
“지난 시즌 옷들 해체해보자!”
로딘의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스텝들. 눈앞에서 옷 조각들이 분해되고 다시 이리저리 조합된다. 말없이 시침핀을 물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로딘.
뭔가 잘 안 풀릴 때 하는 로딘의 습관이다. 잠자코 보는 샤론, 요즘 들어 이렇게 멍해지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어떻게든 쇼에 맞춰 해내기는 하지만, 영 생기가 없는 그가 걱정이다.
파슨스에서 친구로 만난 로딘은 샤론에게 신이었다. 온갖 상을 휩쓸며 내놓는 옷들 마다 주목받던 그가 같은 한국인으로 자랑스러웠다. 곁에 있으면 자신마저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랄까 자기 브랜드로 성공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대신, 로딘의 곁을 택했다.사람들은 말한다. 로딘은 샤론 없인 아무것도 못한다고.
작업실에서 애타게 자신을 찾는 로딘을 보면서, 그 곁에서 그의 상상이 실현되는 걸 보면서 아이디어가 막힌 그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그렇게 10년을 함께 했다. 샤론은 자신이 로딘과 정신적 동반자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디쯤 있는 걸까? 분명 그의 곁이긴 한데. 요즘 들어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로딘을 볼 때마다 어딘가 불안하다.
“단 것 좀 사오라고 할까?”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디???”
샤론의 말을 무시하고 휙 작업실을 나가버리는 로딘. 샤론 괜한 불안감에 손톱을 뜯으며 그를 보는데.
같은 시간, 로딘과의 꿈같은 하룻밤을 뒤로하고 냉혹한 현실로 돌아온 미유. 알바에, 패션공모전 준비까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릴 적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이 살았던 미유. 작은 양품점을 하셨던 엄마 덕분에 미유는 옷과 친해졌다. 울다가도 옷이랑 가위를 주면 뚝 그칠 정도였다나. 가끔은 멀쩡한 옷을 해체해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펼치기도 했던 미유.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열아홉에 엄마가 쓰러졌다. 병명조차 알 수 없는 희귀병. 병원비, 간병비를 벌기 위해 집과 가게를 팔아야 했고, 꿈은 접어야 했다.
2년을 꼬박 엄마에게만 매달렸다. 옷보다 더 꿈보다 더 엄마가 중요하니까.. 나라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으로 옮긴 후 엄마는 미유를 붙잡고 얘기했다.
더 이상 포기하지 말라고. 딸 앞길 막는 짓 더는 못한다고.
젊은 시절, 엄마도 패션디자이너를 꿈 꾼 적이 있었다. 가난한 형편에 디자이너란 그야말로 꿈이었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양품점을 하게 된 것은 그나마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작은 한풀이었다. 오랜만에 목돈이 생겼을 때, 자식이 준 용돈으로 멋 부리고 싶을 때, 동네 아줌마들은 죄다 엄마의 양품점에 모였다.
엄마는 아줌마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코디해주고, 스타일을 만들어주는, 동네 자타공인 스타일리스트였다. 돈도 돈이지만, 엄마에겐 사람들의 숨은 멋을 찾아주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미유, 옷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지 너무 잘 안다.
이제 미유는 누군가를 함박 웃게 만들 그런 옷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다. 엄마는 미유의 손을 잡고, 자기 대신 그 꿈을 꼭 이뤄달라고 부탁한다.
지금, 미유의 손에 자신의 꿈이, 또 엄마의 꿈이 달려있다. 패션 전문학교에 다닌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알바하랴 공부하랴 몸은 바쁘지만, 꿈을 향한 마음만은 가볍다. 거기다 자신의 일상에 어느 날 훅 날아든 ‘로딘’이란 이름의 바람은 미유를 순간순간 넋 놓게 하는데...미유는 그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다음엔 자신의 초라한 방이 아닌. 런웨이 위에서 꼭 만날 수 있길. 그러기 위해선 더욱 열심히 달려야 한다. 드로잉하는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미유.
미유의 꿈같은 존재, 로딘은 늦은 시간, 잠 못 든 채 방을 서성이는 중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뭐 하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주방으로 내려가 샴페인을 따는데, 서두른 탓인지 옷에 튄다.
“젠장~”
옷에 뭔가 묻는 걸 정말 싫어하는 로딘. 샴페인 한 모금이 간절하지만, 옷부터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차분히 샴페인을 잔에 따르는데, 갑자기 어떤 실루엣이 뇌리에 그려진다. 근래 이런 느낌을 가져본 건 처음이다. 서둘러 드로잉 북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가는데, 급한 마음에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다.
“앗.. 제길..”
층계를 차는 바람에 발가락 끝이 아파오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간만에 찾아온 영감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뿐. 드로잉북을 찾아들고 스케치를 하는 로딘. 근래 보기 힘들었던 초 집중 상태. 뭔가 대단한 게 나올듯한 분위기다.
연하게 그려진 여체, 그 위로 부드럽고 우아한 실루엣의 원피스가 입혀진다. 잠시 눈으로 스케치를 뚫어지게 보다, 이번엔 그 위에 색연필로 컬러를 입히는 로딘.
드디어 완성된 드로잉. 까다로운 로딘도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지,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는데, 그 순간.
“뭐지?”
어딘가 이상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테이프를 돌려감 듯 파바박~ 기억을 되짚는데..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그 이상한 여자의 방에서 봤던... 드로잉 북...의 어느 한 페이지..지금 자신의 드로잉과 거의 흡사하다...!!!!!!
“이런 제길...”
하며 드로잉을 박박 찢어버리는 로딘.. 스스로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악~~~~내지르는데...
“뭐야... 너.. 너 누구야... 대체 너 누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