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3988년 3월 7일 오전 10시 30분 경.
짜악!
그 날 내 경호대상인 이른바 가출 공주와 나의 첫 만남이 있었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그곳에서. 나는 연녹색의 긴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내려오고 비슷한 색깔의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공주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는 눈물 젖은 눈빛으로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뭐가 그리 잘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국민들을 무참하게 죽인 당신… 그런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정말로 그때 나는 경호고 뭐고 이 빌어먹을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로 우리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신세기 3988년 4월 3일 오후 10시 경
“흐윽! 왜냐하면… 당신이 불쌍하니까! 으아아아아앙!!!”
그녀가… 울었다. 그녀에게 뺨을 맞았던 그 다리 위에서. 가출 공주가 울었다. 지금 상황은 물론 그녀가 울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위해 울 만한 상황은 결코 아니란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위해 우는 거지?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아직 내가 그녀의 경호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존재 자체가 전 세계에 위협이다. 이성이 내게 말한다. 지금 당장 그녀를 죽이라고. 그러나 본능이, 아니 ‘마음’이 내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했다. 들고 있던 검을 다시 높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가.”
라는 얼빠진 말이나 남기고. 눈물을 삼키며 그 자리를 떠났다.
신세기 3988년 5월 1일 오전 11시 경.
그녀가 내가 묵고 있던 숙소에 찾아왔다. 그 만한 사건이 있었으니 나도 부상을 입지 않으래야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실 이제 전투를 해도 지장은 없지만 조금 생각할 것이 있어서 쉬고 싶었다. 근데 황제 생각은 다른가 보다. 빌어먹을 황제 새끼. 그 망할 황제는 내가 부상으로 쉬고 있는데도 경호 임무를 계속 내릴 모양이다.
가출 공주를 내 숙소로 보내버렸다. 뭐, 보낸 것은 좋다. 근데 언제 올 것인지는 알려줘야 할 것이 아닌가. 미칠 노릇이다. 하필이면 나는 그때 웃옷을 벗고 목검을 휘두르며 떨어진 체력을 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반나체를 보여줬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몸 전체에 있는 수많은 흉터들…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아니 조금은 좋아졌지만 그래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이인데 이제 더 나빠지겠지.
내가 봐도 흉측한 흉터들이니까.
“다, 당신…”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가출 공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왠지 마음이 아리다. 달아나지 않을까? 하긴 내 악명이 어느 정도인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인 가출 공주조차 눈으로 직접 경험했으니 도망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러나 가출 공주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울었다. 그때 그 다리 위에서 펑펑 울었던 것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운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고개를 저으며 운다. 달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우리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한참을 울던 공주가 겨우겨우 울면서 말한다.
“어, 어, 얼마나… 흐윽! 아팠을까… 흐윽!”
이해할 수 없다… 이 여자… 또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더라…
신세기 3988년 7월 1일.
그녀가 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죽여야 한다. 무조건 죽여야 한다. 하지만 죽일 수 없었다. 애초에 정체를 밝히지 않고는 그녀를, 경호대상인, 아니 이제 비겁하게 마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사랑하는 그녀를 지킬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반응을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덜덜 떨린다. 이해할 수 있다.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을 실감하니 힘이 빠진다. 이성이 말한다. 죽이라고. 얼른 그녀를 죽이라고.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른다고.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자리를 뜨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만.
신세기 3989년 1월 1일.
오늘… 나는 죽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병력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 모든 병력들이 모두 전투 레벨 A급 이상. 기가 찬다. 하긴 당연하다. 나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니까.
‘악마의 상징’인 십자가에 마나를 흡수하는 흡철로 단단하게 묶인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죽는 것 자체는 상관없다. 언젠가 이렇게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단 하나.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가출 공주를, 그녀를,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는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다.
“죽을 만큼 사랑해, 세이라.”
그리고 그 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