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정리 좀 하지.”
푸른 태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베스티라 자신을 소개한 수상은 여성은 뭐가 그리 좋은 지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푸른 태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실의 날개’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지. 우선 첫 번째 질문이다.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아낸 것이며, 또한…”
“왜 제가 이 ‘눈’을 가지고 있냐는 것이 질문이겠지요?”
말이 잘린 푸른 태양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기에 일단 참아내었다. 숙소로 들어올 때 워낙 다급해서 방 안을 밝힐 시간도 없었기에 지금 그들은 서로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낭만적일 수도 있으나 두 남녀의 대화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베스티의 붉은 두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야수의 그것처럼 붉게 빛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저는… 그래요. 당신 일족의 분파(分派) 중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일족이라고 여기시면 될 것입니다. 당신들… 아니, 이제 당신 밖에 남지 않았군요. 어쨌든 당신처럼 눈을 숨기지도 못합니다. 또한 당신처럼 마나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뿐입니다. 마나 제어는 본인의 기량이 다입니다. 뭐, 당신은 딱히 눈을 사용하지 않아도 제어도 완벽하게 할 수 있지만요. 정말… 신마저도 두려워해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한 ‘푸른 태양’다워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의 ‘존재’ 때문에 당신의 조상들이 몰살당한 것 아닙니까? 저희 일족은 덤이고요. 어떻게 보면 참 빚이 많으신 분이세요, 당신은. 후후후. 어쨌든 저도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푸른 태양, 당신께서 악귀를 상대할 때 잠깐 눈을 내비치신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꼭 한 마디가 더 많은 것 같군. …베스티라고 했나? 그렇게 간이 큰가? 감히… 감히 내게!”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들이 있는 방 안 전체가 밝아졌다. 그러나 방 안 전체를 뒤덮었던 불길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기화된 에탄올에 불을 붙인 것과 같았다. 불길이 일었지만 푸른 태양과 베스티 모두 그을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가구들 전체도 마찬가지였다. 베스티는 눈웃음을 지으며 푸른 태양을 바라보았고 푸른 태양은 이를 바드득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역시 위협뿐이군요. 그것은 그렇고 정말 엄청난 힘입니다. 눈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의 제어라니… 눈을 사용하면 정말 얼마나 대단할까요. 예언서에 나오지 않습니까? ‘디 우르크’는 불 그 자체라고.”
“닥쳐라. 너 따위 열등한 존재가 알 바 아니다. 두 번째 질문이다. 진실의 날개 안에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후후후. 알려주면 몰살시키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신, 본인도 잘 알고 계실텐데요.”
그녀가 조롱하듯이 말했고 푸른 태양은 이를 바드득 갈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을 수긍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실의 날개. 세계 5대 권력 기구의 주적이라 볼 수 있는 집단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창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추정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누구에게 창설되었는지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존재가 밝혀진 것도 고작 백여 년 전일 정도로 세계 권력 기구는 그들의 존재조차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을 알리겠다는 명목 하에 테러를 자행해왔고 심지어 소국이기는 하지만 몇 개의 국가를 멸망시킨 적도 있었다. 참고로 난데없이 일으킨 민중들의 반란으로 멸망한 소국들이 전에 훨씬 많았음에도 세계 권력 기구는 누가 주동한 것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다가 체포한 반란분자들 중 우연히 진실의 날개 소속이 있어서 겨우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상 신관 직속 부하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이 조직에 속한 이들을 척살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찾을 수 있었는데 10년 전 진실의 날개의 현 수장이 누구인지 알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그러나 알아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이 언제 어떻게 이동하는 지와 본부는커녕 지부가 어디인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쯤 되니 지부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본부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북쪽에 있는 것으로만 추정되고 있었다.
그런 조직의 부 사령관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니 저승사자, 아니 푸른 태양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푸른 태양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 여자를 죽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실의 날개를 공격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거지는 대륙 북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DS길드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DS길드에 그가 들어갔을 때 길드장이 숨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DS길드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설사 푸른 태양이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아차리더라도 감히 그들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진실의 날개의 총사령관, 네이스트 J 클로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실의 날개의 총사령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경악에 빠진 이유. 바로 DS길드장이자 세계 최강의 사나이라고 여겨지는 천제(天帝), 라로브 A 레이븐과 함께 전투 레벨 E급을 부여받은 강력한 마법사가 진실의 날개의 수장이라 그랬고 그게 바로 빙제(氷帝), 네이스트 J 클로버였다.
혼자서 그가 있는 곳에 찾아갔다가는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푸른 태양이 베스티의 말에 암묵적으로 수긍을 한 것이었다. 베스티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당신을 겁박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허접들에게 당신의 정체를 알려줘 봤자 거사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당신의 정체는 저와 빙제 만이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겠지. 하지만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신관 직속 부하고 지금 당장은 이 세계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또한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행동으로 이미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망과 공포의 대상이다. 진실의 날개가 아무리 애써봤자 내가 움직이지 않고 부인하면 그들은 나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다.”
“…”
베스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역전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서 제대로 협상을 하지 못하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는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보통 내기가 아니군. 어린데다가 평소 행실만 보고 그냥 멍청한 멧돼지라고 생각했는데… 위기의 순간에 상황을 이렇게 반전시키다니. 방심했다. 좀 더 이 자에 대해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줄 것을 다 내주더라도 반드시 아군으로 삼아야 해.’
그녀는 마음속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푸른 태양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가 떠들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자… 그럼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죠. 저희와 함께 세계를 뒤엎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푸른 태양, 당신은 세계를 분명히 원망시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터…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확실히 있지만 왜 내가 너희하고 손을 잡아야 하지?”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이 힘은 있지만 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의 뒤에는 DS길드가 있지만 말 그대로 당신의 뒤를 지켜줄 뿐 당신이 직접 그들을 이끌지는 못하죠.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저희는 DS길드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직접 저희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당신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신 혼자 아무리 날 뛰어 봤자 세계는 조금 성가셔할 뿐이라는 것을. 물론 그 때 ‘그 사건’은 확실히 큰 상처를 남겼지만 같은 일을 두 번 할 수는 없겠죠.”
베스티가 ‘그 사건’을 언급하자 푸른 태양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확실히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더욱 쉽게 이해시킬 수는 있었다. 푸른 태양 혼자서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멸망이지 지배가 아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는 것은 지배겠지. 나하고는 관련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쪽이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하지만 저희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주적은 헌터 킬러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세계 권력 기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을 함께 하고 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되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얻는 게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푸른 태양은 흥미가 생긴 듯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녀는 목이 살짝 말라서 가져온 수통 안에 들어있는 물 약간을 마셨다. 어차피 그녀도 푸른 태양이 자신을 대접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미리 물을 채워둔 것이었다.
“당신이 얻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저희 진실의 날개가 있는 거점과 그곳으로 향하는 길. 아마 알게 되신다면 깜짝 놀랄 것이며 또한 저희 조직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큰 것 아닌가?”
“그 정도로 저희는 당신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투 레벨 S급의 마법사 2명을 잃은 것은 사실 별 것도 아니죠. 이건 세계 권력 기구가 멸망하기 전에는 우리가 먼저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후에는 배신하겠다는 것이겠군. 뭐, 먼 훗날의 일이니까 상관없지만. 그래 내가 얻는 것은 또 뭐지?”
푸른 태양이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이 모습을 본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점점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 눈에 딱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말했다.
“정보입니다.”
“정보?”
그녀의 말을 들은 푸른 태양은 몸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충분히 실망할 만 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곳인 신의 탑은 원래 전 세계의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통해 언론의 역할과 그 언론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의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정보는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아니게 들려왔다.
“물론 현재 당신에게는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희는 저희만 가지고 있는 정보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당신이 신의 탑의 초신성이라고 한들 모든 정보가 당신에게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요, 예를 들면 당신 일족의 ‘5대 마법’이라거나.”
“!!!”
그녀의 말을 들은 푸른 태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푸른 태양은 당혹감을 숨기지도 않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알고 있는 건가?”
“정확히는 단서가 되는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없죠. 당신이 우리의 계획에 합류한다면 그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단, 찾으러 가는 것은 첫 번째 계획을 마친 뒤에 가시지요. 첫 번째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희 쪽에서도 준비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녀의 말을 들은 푸른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악마의 5대 마법. 그것들 중 하나만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 강대한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이 더 이상 신기루가 아니게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좋다, 받아들이지. 다만 내게 거짓말을 치지 마라.”
“물론입니다. 그럼 계획과 당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드린 뒤 그것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눌까요? ‘사일런스 제국’의 멸망을 위한 대화를.”
“사일런스 제국? 왜 하필이면 이곳이지?”
“왜냐하면 우선 당신이 이곳에서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제 웬만한 소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일반 대중들에게 큰 충격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대국이라 여겨지는 사일런스 제국을 멸망시킨다면 신의 탑은 덮을 수도 없을 것이고 대중들은 저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신관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니까요.”
그녀의 말을 들은 푸른 태양은 고심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본격적으로 들어보지.”
“물론입니다. 후후후. 아마 당신의 힘이라면 틀림없이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푸른 태양이시여.”
그리고 그들은 약 10분 동안 더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의 말을 다 들은 푸른 태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우. 정말 터무니없는 말의 연속이군.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뭐, 사실 그 녀석을 죽이는 순간 이미 계획을 거의 실행시킨 거나 다름이 없지만. 뭐, 좋다. 그건 그렇고… 정말 그게 사실이냐? 정말 성가신 곳에 있군. 이쪽 계획보다 그쪽 계획을 먼저 짜야할 판이야.”
“그건 알아서 하시길. 당신은 저희의 일만 하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단 저희의 계획이 먼저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손을 내밀었다. 푸른 태양 역시 피식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사상 최악의 동맹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잠자코 소식이나 기다리고 있어라. 나도 빨리 그것을 얻어야겠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당신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후후후. 그럼 저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