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절대자의 최후, 그러나…….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무슨 이유에서일까?
강철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너무 무력에만 집중했다. 경제력을 등한시했던 게 치명적이었다. 책사의 부재 또한… 나는 대군주. 홀로 전략·전술에 외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전황이 지지부진한 사이 첩보·외교를 너무 등한시하기까지. 외교가 안 되면 정보력이라도 뛰어났어야 해. 그랬다면 이렇게 뒤통수를 맞진 않았을 테지.’
멸망을 코앞에 둔 강철인의 머릿속은 지독히도 침착하기만 할 뿐,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만약 지금 강철인의 상태를 그의 적들이 알았다면 자포자기하거나 아쉬움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강철인은 담담했다.
“주군! 적들에 대응하려면 어서 명령을 내리셔야…….”
그런 강철인이 답답했는지 알프레드가 불안한 듯 그를 재촉했다. 근거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프레드.”
“예, 마스터.”
“경거망동하지 말고 전전긍긍하지 마라. 품위를 지켜라. 졌어도 진 게 아니다.”
“예……?”
뱀파이어 집사 알프레드는 태연하기만 한 강철인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이내 곧 명령에 따라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NPC 유닛인 그로서는 강철인의 속내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섯 대장군을 즉시 불러들이고, 그들이 귀환하는 즉시 전 병력은 발할라 대영지를 나서 적들을 맞이하도록 한다.”
“마, 마스터……! 그, 그건 안 될 말씀이십니다! 차라리 공성전을 유도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회전(大會戰)은 우리 발할라 대영지가 너무도 불리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수적 열세인 상황. 단 1%에 불과할지라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공성전을 유도하는 게 나았다.
“아니. 어차피 시간만 질질 끌게 될 뿐, 결과는 같다. 구차하게 버티는 것보단 당당히 대회전을 치른다.”
“마스터……!”
“걱정하지 마라.”
“……!”
“오늘은 지겠지만, 다음엔 아닐 테니.”
도통 뜻 모를 말이었다.
오늘의 패배가 멸망과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음에도 강철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루시, 벨라!”
강철인이 이름을 부르자 옥좌 뒤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 있던 두 명의 다크 엘프 호위무사인 루시와 벨라트릭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예, 마스터.”
“부르셨사옵니까.”
알프레드와 같은 NPC 유닛인 루시와 벨라는 각각 마법과 검술에 특화된 호위무사로, 어지간한 군소 군주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내 검과 갑옷을.”
강철인의 명령에 루시와 벨라가 에픽 아이템인 명검 ‘프라가라흐’를, 역시 에픽 아이템인 ‘발리(Vali)의 타오르는 복수심 경갑 세트’를 가져와 대령했다. 강철인을 무적의 대군주, 군주 사냥꾼으로 만들어준 아이템들이었다.
‘알렉스 로스차일드, 그리고 이공명.’
루시와 벨라의 도움으로 무장을 하는 동안 강철인은 그의 숙적들을 떠올리며 전의를 가다듬었다.
판게아 통일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그를 이렇듯 뒤통수 한 방으로 보내버린 이들…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몇 번이나 무참히 짓밟고 찍어 눌렀음에도 바퀴벌레처럼 재기하는 꼬락서니라니. 차라리 대군주가 아니라 대(大) 좀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진작에 제거하거나 복속시켜야 했을 놈들임에도 내버려 두었던 게 못내 아쉬웠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대회전을 통해 대군주 강철인과 대영지 발할라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
쿵―! 쿵―!
거대한 거북이, 불과 용암을 내뿜는 키아모두스 대영지가 대군주 강철인의 근거지를 향해 나아갔다.
뒤를 따르는 2천의 군대와 발두르, 굴베이그 연합군까지 합친다면 거의 만 오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주군.”
키아모두스 이동 요새의 첨탑, 책사인 이공명이 그의 주군인 알렉스 로스차일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로 강철인과 직접 대결을 펼치실 생각이십니까?”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백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상태였다. 대군주답게 그의 아이템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에픽 아이템이었다.
“명색이 라이벌 된 입장에서 손 놓고 있을 수야 없겠지.”
“하지만 강철인은 강합니다. 일대일, 아니, 일 대 다수의 대결이라 할지라도 그를 이기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철인은 사실상 판게아의 최강자. 자칫 주군의 생명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럿이 공격하겠다는 거 아니겠나. 다른 대군주들의 합공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병력의 숫자도 압도적이니까.”
“하지만…….”
“빚.”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그 한마디를 내뱉자 이공명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럴 만했다.
라그나로크가 발발된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늘 강철인의 마수에 걸려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친형제처럼 아끼던 부하 둘을 잃었고, 근거지인 키아모두스 대영지까지 무려 네 번이나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다.
만약 키아모두스 대영지가 이동 요새가 아니었다면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진작에 강철인의 손에 박살이 났을 것이었다.
“그들의 원수도 갚아야 하고, 지난날의 치욕도 갚아주어야 해. 오늘이 아니면 영영 갚지 못할 빚. 다른 날이라면 모르되, 오늘만큼은 아니야.”
그의 의지는 너무나도 견고해서 이공명이 몇 번을 설득한다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이공명은 더는 주군을 만류하지 않았다.
“우리 키아모두스의 힘만으로 그를 꺾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식이라서 좀 아쉽군.”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아쉬움을 표했다.
“낡은 표현이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자 아니겠습니까? 강철인은 너무 강했습니다. 부러질지언정 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니… 둥글지 못했던 게 패착이겠지요.”
“하긴… 그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오늘 같은 날도 오지 않았을 테지.”
“예. 제가 강철인이 아닌 주군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저 멀리 발할라 대영지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설마……!”
이를 본 이공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주군! 저기를 보십시오! 대회전, 대회전입니다! 공성전을 포기하고 정면 대결을 선택하다니……!”
강철인의 선택은 누가 봐도 멍청한 선택이지만, 확실히 놀라움을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설마……!”
알렉스 로스차일드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명, 혹시 함정이 아니겠나? 아무리 강철인이 막 나가는 인간이라지만 대회전이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다.
그간 강철인에게 당할 만큼 당한 그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대회전을 선택한 강철인의 결정에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이공명의 생각은 달랐다.
“자존심입니다.”
“자존심 말인가?”
“확실합니다.”
이공명이 단언했다.
“방금 들어온 통신에 의하면, 헤카테의 근거지는 이미 굴베이그 연합에 의해 초토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슈타르 혈맹의 한 축인 알레이스터는 저기에 있습니다.”
이공명의 손가락이 거대한 언데드 몬스터, 본 드래곤(Bone Dragon)에 올라탄 채 이동하고 있는 대군주 알레이스터를 가리켰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화끈하게 대회전을 벌이자는 의도입니다. 강철인의 성격상 승산이 없는 싸움을 공성전으로 질질 끌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요.”
“아……!”
“버티기보단 한 방에 끝내겠단 의도… 강철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 아닙니까? 목숨을 구걸하지도, 몸을 의탁하지도 않겠다는 뜻입니다. 역시 강철인다운 선택입니다.”
과연 이공명이었다.
앉은 채로 강철인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모시는 대군주를 안심시킬 정도… 강철인이 괜히 이공명을 놓친 것을 아쉬워한 게 아니었다.
“주군, 총공격 명령을 내리십시오. 강철인이 대회전을 선택한 이상 발할라 세력을 흡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예 철저히 깨부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그런가?”
“예, 주군.”
“그러지.”
이공명의 조언에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쉽게 끝날 것이라 여겨졌던 대회전은 무려 3일 밤낮 동안 계속되었다. 그만큼 발할라의 군사력은 강했고, 강철인 역시 무시무시한 기량을 발휘하며 연합군 측 대군주들의 합공을 버텨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3일이 한계였다.
중과부적.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
결국, 발할라가 자랑하던 다섯 명의 대장군이 하나둘 쓰러지고, 강철인은 영지 안 옥좌까지 내몰리는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양측이 처음부터 예상했듯이 강철인이 패배한 것이다.
“여, 왔나?”
홀로 남은 강철인은 예의 그 옥좌에 앉아 연합군 측 대군주들을 맞이했다.
“…….”
“…….”
연합군 측 대군주들은 순간 황당함에 젖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패자인 강철인이 승자, 승자인 연합군 측 대군주들이 패자인 줄 알 정도로 강철인의 태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옥좌에 떡하니 걸터앉은 강철인의 얼굴은 패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채 연합군 측 대군주들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마치 아랫사람들을 깔보는 듯했다.
“패배가 믿기지 않나?”
결국 강철인의 라이벌 격인 대군주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 몇 번이고 짓밟던 내가 이번에는 널 짓밟아서?”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약간 감정이 격앙된 듯했다.
하기야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늘 얻어맞기만 하던 그가 원수인 강철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풉.”
강철인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라서 실망했나? 하긴… 네놈들처럼 울고불고 질질 짰어야 만족했겠지, 이 쫄보 자식들아.”
순간,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강철인을 향해 달려들 뻔했다.
인간이 어쩜 이리도 사람 속을 잘 긁어놓는다는 말인가.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가 된 주제에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오히려 승자들을 조롱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완전히 미쳤군.”
잠자코 있던 네크로맨서 대군주 알레이스터가 입을 열었다. 해골 갑옷의 헤드기어를 올린 그는 야비하고 간사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네놈이 이런 꼴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어쩌나? 네놈은 졌어. 혼자 잘났다고 까불대가 뒈지는…….”
알레이스터가 강철인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에 대한 강철인의 반응은…….
“아가리 닥쳐.”
“……!”
싸늘한, 같은 대군주인 알레이스터의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섬뜩한 한마디였다.
“그 해골바가지 깨버리기 전에 닥치고 있어. 너 같은 배신자 새끼랑은 말 섞을 가치가 없다.”
“……!”
알레이스터를 향해 경고한 강철인은 네크로맨서 대군주를 더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알렉스 로스차일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이, 로스차일드.”
강철인이 턱 끝으로 알렉스 로스차일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겉으론 착한 척, 대의명분을 위하는 척 연기하느라 아주 수고가 많아.”
“무슨 말이지?”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방문했다.
“무슨 말? 뭐, 시치미를 떼겠다면 친절하게 알려주도록 하지. 판게아를 홀로 집어삼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주제에 아닌 척하려니 속이 펄펄 끓어오르잖아? 안 그래?”
“그럴 리가. 난 네놈과 다르다.”
“다르긴.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기 마련이지. 넌 나랑 똑같은 놈이야. 나처럼 대놓고 나쁜 놈이 아니라 착한 척 위선을 떨고 있을 뿐, 결과적으로 그동안 챙겨 먹을 건 다 챙겨 먹어놓고 이제 와서 아닌 척하시겠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강철인, 네놈이 딱 그 짝이로군.”
“과연 그럴까? 내가 죽으면 저 배신자 새끼부터 족칠 생각처럼 보이는데?”
그 말에 배신자 알레이스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끼, 쫄긴.”
강철인이 그런 알레이스터를 슬쩍 비웃고는 말을 이었다.
“뭐, 어떻게 지지고 볶든 그거야 내가 뒈지고 나서 벌어질 일이니 알아서들 하라고. 자, 이제 끝내라.”
그렇게 말한 강철인은 아예 프라가라흐를 내려놓고 양팔을 활짝 벌렸다.
“무슨 수작이냐, 강철인?”
로스차일드가 잔뜩 경계하며 말했다.
“수작은 무슨. 끝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나?”
“그냥 죽겠다는 건가?”
“그럼? 누구처럼 근거지 좀 털렸다고 질질 짜면서 내빼기도 싫고, 바퀴벌레처럼 재기하는 것도 내 적성엔 영…….”
그간 알렉스 로스차일드의 처절했던 생존을 비꼬는 말. 당사자의 입장에선 눈에 핏줄을 세울 만했다.
푸욱―!
분노한 로스차일드의 검이 한 줄기 섬광을 그리더니 강철인의 심장을 순식간에 꿰뚫었다.
“내 승리다……! 강철인!”
“그래, 즐겨. 마음껏 즐기라고.”
강철인이 웃었다.
“내게서 승리를 맛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닥쳐라!”
로스차일드의 검이 다시금 섬광을 흩뿌렸다.
서걱―!!
툭, 데구르르르…….
강철인의 머리가 거짓말처럼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죽었다.
그 강철인이 죽은 것이다.
“내 승리다… 내 승리다, 강철인!”
알렉스 로스차일드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자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그토록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적을 쓰러뜨린 남자의 얼굴이란 가히 악귀에 버금갈 정도였다.
하지만 무섭던 얼굴은 이내 곧 희열과 성취감으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로스차일드가 알레이스터를 포함한 다른 대군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이자의 머리를 높이…….”
잘린 머리를 높이 매달아 승리를 자축하고 강철인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자고 말하려던 로스차일드는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우르릉!
대공동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았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저 멀리서부터 점점 커져만 가는 굉음은 굉장히 불길하고 수상쩍었다. 마치… 곧 대폭발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설마……!”
로스차일드가 소리쳤다.
“자폭인가!”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강철인, 이 비열하고 사악한 새끼!”
다들 상황을 파악하고 한마디씩을 하려던 찰나, 엄청난 대폭발과 함께 시뻘건 화염이 그들을 덮쳤다. 누구의 말마따나 마지막까지 비열하고 사악한 수법이었다.
***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식들.”
다음 순간, 강철인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