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원수와의 재회
알렉스, 알렉스 로스차일드. 강철인의 심장을 꿰뚫고 목을 잘라 버린 바로 그 대군주였다.
‘다시 봐도 여전히 재수 없는 면상이로군.’
원수와 마주한 강철인은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알렉스 로스차일드의 얼굴을 그렇게 평가했다.
알렉스 로스차일드.
풀네임은 알렉산더 마이어 폰 로스차일드(Alexander Mayer Von Rothschild).
그 유명한 금융 명가(名家)인 로스차일드 가(家)의 후예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가문의 일원이자 할리우드의 셀레브리티(Celebrity)로서 미국 사교계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는 상위 0.01%의 상류층이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의 서민 출신인 강철인과 숱한 충돌을 일으키며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수차례 패망 직전까지 몰렸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생각 같아선 여기서 죽여주고 싶지만… 아칸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지.’
강철인은 당장에라도 알렉스 로스차일드의 목을 틀어쥐고 비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정말이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참아내었다.
아칸이 모습은 감췄지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걸 강철인은 알았다.
게다가 보는 눈도 많았다.
그와 로스차일드를 제외한 29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 살인을 저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강철인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타입은 아니라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복수는 차갑게 식혀서 먹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같다[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고 했던가.’
강철인은 복수에 관한 명언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칼을 갈았다.
뜸이 들기도 전에 성급하게 굴어선 될 것도 안 되기 마련이다.
복수란 무릇 냉정한 상태로, 철두철미하게 계획한 후 실행해야 제맛이 아니겠는가. 철저히 짓밟고 괴롭혀 극한의 고통과 치욕을 맛보여 줘야 더 재미있을 테고.
“저… 혹시 영어가…….”
그런 강철인의 생각을 까맣게 모르는 로스차일드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구역질이 나는군.’
강철인은 로스차일드의 가식 넘치는 얼굴을 보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겉으론 매너의 표본, 젠틀맨처럼 행동하며 대의명분과 공익을 위해 애쓰는 척 자신을 꾸미지만, 속으론 한없이 음흉하고 사악한 인물이 바로 저 로스차일드였다.
이렇듯 단순하게 말을 거는 것 같아도 그 배경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기 마련이었다.
강철인이 생각하는 로스차일드는 그와 같은, 어쩌면 더 사악할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강철인은 로스차일드가 은밀하게 벌인 악행 몇 가지 정도를 파악한 적도 있었다.
이른바 동족 혐오다.
강철인은 로스차일드를 동류로 여겼기에, 실체를 파악했기에 로스차일드를 증오했다.
차라리 대놓고 ‘나 나쁜 놈이요’라며 자신이 악인임을 인정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강철인은 이 금융 명가의 후손을 역겨워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가 안 되십니까? Chinese? Japanese?”
로스차일드가 재차 물어왔다.
“대한민국이다.”
강철인이 대답했다.
“아……!”
로스차일드가 무언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알아들을 수 있어서였다.
판게아 대륙에 언어의 장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언어로 말하든 그 뜻이 100% 전달되는 것이다.
“들립니다. 당신의 말도, 저기 저 사람의 말도.”
로스차일드가 아랍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이를 가리켰다. 그 아랍인은 연신 알라를 외치며 제 신앙심을 불태우는 데 한창이었다.
“지금 상황은 정말이지 놀랍군요! 꿈이 아니라는 가정이 붙겠지만!”
로스차일드는 감탄했다.
“꿈이면 곤란하지.”
“예?”
“아니, 아무것도.”
강철인은 무심결에 대답한 것에 대충 말을 돌렸다.
‘그래, 꿈이면 곤란하지. 암, 그렇고말고. 네놈을 부숴 버려야 하니까.’
강철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스차일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상태창, 어떻게 띄우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지. 2, 3초 정도 응시하니 저절로 열리더군.”
“아, 그렇군요!”
“알아들었으면 그만 꺼지지그래?”
“……?”
“얼굴 마주하기가 역겨워서.”
뜬금없는 강철인의 폭언에 순간 로스차일드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지며 눈가에 살기가 번뜩였다. 강철인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얼굴은 이내 곧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이 떠올랐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로스차일드의 얼굴은 온화했고, 또 평화로웠다. 오만방자한 명가의 후손이 아닌, 진정한 젠틀맨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지나친 건 그 알량한 처세술이겠지. 사람이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으면 낯빛도 적당히 굳힐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알렉스 로스차일드?”
“……!”
낯선 동양인 남성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자 로스차일드는 흠칫 놀랐다.
“저를 아십니까?”
“문명권 사람이라면 네 얼굴 한 번쯤 못 봤을까. 연예부 기자들이 네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기 바쁜데.”
확실히 그랬다.
알렉스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성을 가진 이치고는 언론에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곤 했다.
어느 재벌가 상속녀와의 교제, 프로 레슬러 출신 영화배우와의 친분, 수천만 달러 모금을 목표로 하는 자선 파티… 24세의 로스차일드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핫(Hot)한 남자였다.
“아, 그건 그렇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얼굴이…….”
“본의 아니기는. 영화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한 초석이겠지. 20세기 폭스, 곧 인수할 예정 아니던가?”
“……!”
로스차일드는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철인이 말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필름 코퍼레이션[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인수 건은 아직 언론이나 금융 업계에 공개되지 않은 대외비였다. 그런 비밀을 이 동양인 청년이 알고 있으니 로스차일드로선 놀랄 노자일 수밖에.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지.”
강철인은 로스차일드가 무어라 항변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업적인 비밀이든, 혹은 개인적인 인간성이든. 난 언젠가 다 까발려진다고 믿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로스차일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꽉 다물고는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나를 아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20세기 폭스의 인수 건은… 아니, 그보다… 말에 뼈가 있다. 마치 나를 잘 아는 것 같은… 누굴까? 당신은 누구지?’
로스차일드는 그 좋은 두뇌,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정도로 좋은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시켜 자신과 이 낯선 동양인의 접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도대체……!’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강철인은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인물. 로스차일드로선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같잖게 머리를 굴리긴.’
이를 바라보는 강철인의 속내는 그야말로 악마의 웃음이라고 할 만했다.
“열심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난 이만 저 아칸이란 존재의 말대로 내 영지를 골라야겠으니.”
강철인은 로스차일드의 속이 시커멓게 타게끔 히죽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 당신은 누굽니까!”
로스차일드가 불러 세웠으나 강철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휘적휘적 걸었다.
‘그 잘난 머리, 신나게 굴려보라고. 내 그림자나 밟을 수 있을까.’
로스차일드를 등진 강철인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은 이것이면 충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스차일드를 상대로 물리적인 공격을 시도해 봤자 단순 묻지 마 범죄만 될 뿐이었다. 복수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기다려라. 차근차근 밟아줄 테니.’
강철인은 훗날을 기약했다.
로스차일드를 뒤로한 강철인은 900여 개의 영지 모형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수고를 감당했다.
현명하고 영리한 행동이었다.
이곳 군주의 홀에서 선택한 영지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며 성장해 나갈 근거지였다. 한 번 선택하면 두 번 다시는 무를 수 없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여러 영지가 후보에 올랐다.
–[스팅레이]
타입 : 공중 도시
성향 : 정복 도시
위치 : 대륙 동남부 히페리온 지방
설명 : 하늘을 나는 가오리, 스팅레이의 등 뒤에 세워진 영지
기능 : 전략 병기, 베놈 게일(Venom Gale)
가격 : 8,700골드
스팅레이 영지는 긴 꼬리에서 베놈 게일이라는 혈액독(血液毒)을 살포하는 게 가능해 무척이나 강력해 보였다.
지구에서나 판게아에서나 생화학 공격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강철인은 섣불리 영지를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우라노스도, 스팅레이도 안 돼.’
고래의 등, 그리고 가오리의 등. 둘 다 살아 있는 생명체 위에 세워진 영지라는 게 걸렸다.
생명체 위에 지어진 영지는 곤란했다.
아무리 신비한 생명체라지만, 결국엔 살아 있는 생명체다. 병이 들 수도, 전투 도중 죽을 수도 있었다.
또한 때가 되면 먹이를 공급해야 하고, 배설물 문제까지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고양이나 개를 키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영지를 짊어진 거대한 동물이라면 사육 난이도가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강철인은 생명체에 의존하는 영지들은 아예 선택지에서 지워 버렸다.
이러한 이유로 시무르그(Simurgh) 영지, 지즈(Ziz) 영지 등등 생명체 위에 세워진 영지들이 강철인의 눈 밖에 났다.
300명이나 되는 군주들 사이를 누비며 900개나 되는 영지를 훑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강철인은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영지를 물색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영지를 선택한 군주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영지를 구매해 판게아 대륙으로 이동한 것이다.
알렉스 로스차일드 역시 제 영지인 이동 요새 키아모두스 영지를 골랐는지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남는 편이 낫겠군.’
강철인은 아예 느긋하게 영지를 구매하기로 했다.
어차피 미래에 대한 변수를 최대한 줄이려거든 타 군주의 영지엔 애초에 손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미 발할라 영지가 아닌 공중 도시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미래는 바뀔 것이기에 강철인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간격을 메우려거든 발에 땀이 나도록 판게아 대륙을 뛰어다녀야 할 테니까.
강철인이 여유를 부리는 동안 몇몇 아는 얼굴들이 그의 곁을 스쳤다.
굴베이그 연합의 리더인 대군주 알브레히트 빌헬름(Albrecht Wilhelm)부터 더러운 배신자 알레이스터(그를 본 강철인은 은근슬쩍 어깨를 부딪쳐 그를 넘어뜨리곤 모른 척했다), 그리고 전쟁보다는 유적 탐사에 열중하던 대군주 도리안 익스플로러(Dorian Explorer)까지.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타 군주들의 영지 선택을 지켜보며 늦장을 피우고 나니 군주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판게아 대륙으로 이동하고 홀에는 적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성과 강철인만이 남았다.
‘헤카테.’
강철인은 그 여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동유럽 출신.
본명보다는 헤카테라는 이명을 더 즐겨 쓰던 여자. 끝까지 강철인을 배신하지 않은 대군주였다.
헤카테는 훗날 자신의 영지가 될 테메레르(Temeraire) 영지와 네 마리 천마(天馬)가 이끄는 헬리오스 영지(이 경우 영지라기보단 거대한 전차의 개념) 가운데 고민하고 있었다.
‘헤카테에겐 테메레르가 제격이지.’
강철인은 테메레르 영지를 지휘하던 헤카테를 떠올리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테메레르]
타입 : 공중 도시
성향 : 정복 도시
위치 : 대륙 서부 쿤타치 지방
설명 : 마법 공학[Spell―tech]으로 만들어진 범선 형태의 영지
기능 : 전략 병기, 파이어(Fire)
가격 : 9,500골드
비싸긴 하나 테메레르 영지는 74개의 화포가 기본적으로 탑재된 범선 형태의 영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이 거대한 범선을 타고 나타난 헤카테가 파이어를 사용했을 때 그 얼마나 많은 적이 쓰러졌던가! 강철인마저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헤카테와 테메레르의 조합은 엄청난 것이었다.
‘끼어들어야겠군.’
강철인은 훗날의 든든한 아군이 될 여자가 헬리오스 영지 같은 쓰레기를 선택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헬리오스를 구매하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을 터였다.
“당신한텐 범선이 어울리는 것 같은데.”
강철인이 말했다.
“그렇지?”
괴팍한 데다가 쿨함, 그 자체인 성격을 가진 헤카테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쾌활하게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
헤카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저하지 않고 테메레르 영지를 구매하고는 강철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만 고르면 되겠군.’
이제 강철인의 차례였다.
타 군주들이 선택한 299개의 영지와 과거 강철인이 선택했던 발할라 영지를 제외하자 약 600여 개의 영지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천천히 골라보자.’
강철인은 느긋하게 영지 하나하나를 살폈다.
지루한 작업의 반복이지만, 강철인은 조급해한다거나 투덜거리지 않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타 군주들이 무릎을 탁! 칠 만한 엄청난 영지를 구매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