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보좌관 루시아
강철인이 명령을 내렸지만, 루시아는 기계적 결함을 일으킨 것처럼 멈칫거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명령어들을 다 알고 계시는 걸까?’
루시아는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조언이 없이도 [내 정보]와 [영지 현황]을 열람하는 강철인의 모습은 루시아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설마 내가 필요치 않으신 건 아니겠지?’
루시아는 가슴을 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존재 이유는 군주를 보좌해 이곳 라퓨타 영지를 꾸려 나가는 것인데, 강철인이 그녀를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루시아로선 가슴을 졸이며 시무룩해 하는 게 당연했다.
“저어… 주군.”
정체성에 위기가 닥치자 루시아는 용기를 내 강철인에게 말을 걸었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터질 듯 풍만한 몸매와는 다르게 차갑고 엄격한 인상의 루시아가 소심하게 물어오자 강철인은 얘가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여 흔쾌히 질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이다.”
“주군께선 제 도움이 없이도 명령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놀라신다거나 당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지고하신 존재라고는 하나 낯선 곳에서 너무나도 침착하십니다.”
루시아의 말에 강철인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 주군께선… 전능자가 아니시올는지요?”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추측이었다.
‘이런.’
강철인은 루시아의 황당한 추측에 내심 황당해했다.
전능자라니?
그가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아니, 나는 전능자가 아니다.”
강철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무 능숙하게 굴었군. 의아할 법도 해.’
강철인은 루시아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깨닫고는 잠시 난감해했지만,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이곳은 내게 낯선 곳이지만, 낯설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좀처럼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씀은…….”
강철인이 뒤에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에 루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태어나신 곳과 이곳이 비슷하단 말씀이시옵니까?”
“……!”
순간, 강철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안 그래도 딱히 설명하기가 귀찮았는데 루시아가 먼저 오해해 준 덕택에 꽤 그럴싸하게 둘러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강철인이 냉큼 대답했다.
“하오면 주군께선 주군의 고향에서도 영지를 경영하시며 군주의 직책에 계셨나이까?”
“네 추측이 옳다.”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가 영지를 경영하며 대군주의 지위에까지 오른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아아, 소녀, 이제 이해가 되옵니다.”
루시아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혹시 주군께서는 어떤 군주이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은 흔쾌히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답변이었으므로 강철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대군주였음을 밝혔다.
“나는 대군주, 군주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였다.”
“……!”
그 말에 루시아가 흠칫 놀랐다.
“대, 대군주!”
루시아가 부르르 떨었다. 강철인의 말에 전율을 느낀 듯했다.
“이, 이곳 판게아 대륙에도 대군주라는 존재가 있사옵니다! 커다란 영지를 다스리며 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그런 존재 말이옵니다! 세상에! 대군주와 같은 존재셨다니… 소녀, 주군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루시아의 반응은 강철인이 살짝 당황할 정도로 극적이었다.
하지만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군주들에게 군주들의 세계가 있듯 보좌관들에게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강한 군주를 보필할수록 보좌관들 사이에서 대접 받는 것이다.
“하오면 보좌관도 두고 계셨나이까?”
루시아가 물었다.
“알프레드라고 하는 뱀파이어 집사가 있었다.”
“그 알프레드라는 보좌관의 업무 능력은 어떠하였사옵니까? 유능하였사옵니까? 주군께선 알프레드 보좌관에 만족하셨나이까?”
약간은 흥분한 채로 질문을 쏟아내는 루시아의 눈가에 맺힌 감정은 질투, 질투였다.
‘경쟁심.’
강철인은 루시아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흠흠.”
강철인은 마치 강아지처럼 원하는 대답, 그러니까 알프레드가 무능했다는 대답을 원하는 루시아를 바라보며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알프레드는…….”
강철인의 말에 집중하는 루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유능했다.”
“……!”
그에 루시아는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강철인의 입장에선 충신 알프레드를 헐뜯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그렇게나 유능했사옵니까?”
“그가 있었기에 내가 대군주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그렇사옵니까?”
루시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대군주까지 하셨던 분인데다 유능한 보좌관까지… 서, 설마 날 쓸모없다며 내치시면 어떻게 하지? 버려지는 걸까?’
존재 이유를 위협 받고 질투심마저 폭발해 버린 루시아는 거의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내기 직전이었다.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건가? 동기부여가 좀 필요하겠어.’
루시아의 속마음을 단숨에 꿰뚫어 본 강철인은 빙그레 웃으며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로 했다.
아무리 지랄 맞은 성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무려 대군주의 위치에 있던 이가 강철인이었다. 부하를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루시아.”
루시아를 강철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주군…….”
대답하는 루시아의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널 버리지 않는다.”
“……!”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속마음을 들켜 버렸으니 그럴 만했다.
“내 고향에서 군주와 보좌관의 관계란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관계다.”
“마, 맞사옵니다! 이곳의 군주와 보좌관 또한 같나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빠르겠구나. 들어라. 너는 나의 보좌관이고,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적인 존재다. 그런 너를 내가 왜 버리겠느냐.”
“지, 진정이시옵니까?”
“그렇다. 비록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모르는 것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또 알프레드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보단 그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만이다. 시무룩한 얼굴은 거두고 오늘부터 나와 함께 이 영지를 경영하는 데 힘쓰도록 하자.”
“아……!”
루시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주군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 내가 더 유능하단 걸 증명해 보이겠어!’
강철인에 의한 동기부여를 받은 루시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이 알프레드보다 더 유능한 보좌관임을 증명하겠노라 다짐했다.
‘단순하긴.’
강철인은 그런 루시아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었지만, 이를 들키진 않았다. 군주란 무릇 가벼워 보여서는 안 되는 법. 품위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주군.”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은 루시아가 굳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라.”
“이 루시아, 열과 성을 다해 주군을 보필해 반드시 유능한 보좌관임을 증명토록 하겠나이다!”
“좋다.”
그에 강철인 역시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튜토리얼 퀘스트부터 수행할 예정이다. 너는 명령대로 내가 병사들을 사열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예!”
루시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병사들에게 주군을 뵐 준비를 하라고 이르겠사옵니다!”
루시아가 사열을 준비하러 간 사이, 강철인은 튜토리얼 퀘스트 목록을 열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튜토리얼 1] 10레벨 달성
내용 : 10레벨에 도달하라
보상 : 경험치 +500 / 20골드 / 워프 게이트 이용권 (무제한)
참고 : 해당 퀘스트 미완료 시 지구로 귀환 불가
참고 : 타 군주 정복 시 +5레벨 증가
참고 : 튜토리얼 2 퀘스트와 연동
워프 게이트란 지구와 판게아 대륙을 잇는 통로이기에 차원 여행자라면 필수적인 물건이었다.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튜토리얼 1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했다.
–[튜토리얼 2] 몬스터 토벌
내용 : 영지 내 중립 몬스터들을 토벌하라
보상 : 경험치 +250 / 20골드
진행 상황 : 0 / 500
‘과거와 같다.’
퀘스트 내용이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강철인은 최대한 빠르게 튜토리얼 퀘스트를 클리어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저레벨 단계이기에 조금 버겁긴 하겠지만, 작정하고 덤빈다면 3, 4일이면 충분하단 판단이 들었다.
강철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시아가 나타나 사열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어서 가시지요, 주군. 병사들이 주군이 오시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런가?”
“예, 주군.”
“바로 가겠다.”
강철인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