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누군가 우리 영지를 노리고 있다 (1)
이날의 전투는 라퓨타 영지에 소속된 모든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계에서 막 강림한 그들의 군주가 3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크 20여 마리를 격퇴한 것으로도 모자라 대승을 일구어냈다는 사실에 고무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용감무쌍하게도 혈혈단신 오크 무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무쌍을 찍었다는, 다소 과장된 소문까지 더해지자 강철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주 ․ 군주 ․ 왕 ․ 황제 등등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이가 목숨을 걸고 솔선수범을 보였다는 것은 평범한 이들에겐 굉장한 파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는 판게아 대륙뿐 아니라 지구에서도 통용되는, 피지배 계층이라면 공통으로 공감할 만한 일이었다.
예컨대 군부대를 시찰하던 국회의원이 때마침 쳐들어온 북괴(무장공비)들의 무력 도발에 대응해 K2 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인 것으로도 모자라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게다가 전투가 끝난 후 소탈하게 짚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병사들과 같이 맥주를 들이켜는 모습이란 소탈하고 친근한 군주의 이미지를 더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효과들은 전혀 의도한 게 아니었다.
강철인이 한 것이라고는 단지 오크들이 보이기에 전투를 벌였고, 승리 후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들이켰을 뿐이다. 그 어떤 계산도 깔리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 뭐야?’
개선장군, 아니, 개선 군주가 되어 라퓨타 영지로 복귀한 강철인은 영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에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그의 머릿속엔 이게 이렇게 칭송할 일인가, 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어쩌면 당연한 의문이기도 했다.
이전 삶에서 경영하던 발할라 영지에선 인간이 극히 드문 존재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뱀파이어, 죽음의 기사, 마인 등 인간이 아닌 족속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강철인은 인간 백성들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리 호들갑들을 떠는 것이며, 왜 노래까지 지어다가 불러 젖히는지 의아할 노릇이었다.
[ 솔선수범으로 인해 영지민들의 호감도 +20 ]
[ 소탈한 군주 이미지를 획득하여 카리스마 –3 ]
[ 소탈한 군주 이미지를 획득하여 친근함 +30 ]
[ 영지민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획득, 군주 포인트 +20 ]
장비를 해제한 후 군주의 홀로 들어선 강철인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으음… 카리스마가 줄어드는 건 별로인데.’
카리스마는 군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능력치였다.
카리스마는 군주로서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데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무인 상점을 통해 강력한 유닛을 구매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바로 카리스마였다.
카리스마가 낮으면 강력한 유닛을 구매한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없었다.
만약 카리스마가 E등급 정도 되는 군주가 무인 상점에서 오우거를 구매한다면 오우거는 군주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확률이 높았다.
또한 카리스마가 낮으면 항명이나 하극상이 발생할 수 있었다.
‘앞으론 조금 조심해야겠어.’
강철인은 카리스마가 하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부하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버리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결과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영지민들의 호감도는 곧 충성심도 동반 상승하는 효과를 낳기 마련이고, 친근함 또한 내정에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대군주 등극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군주 포인트가 20이나 올랐다는 건 확실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군주 포인트야말로 대군주가 되는 핵심이었다.
군주 포인트는 영지민들의 존경을 받아도 오르고, 몬스터를 사냥해도 오르고, 타 군주와의 영지전에서 승리해도 오른다. 무언가 성과를 이룩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군주는 1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회합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른바 ‘군주 회합’이라 불리는 모임이 그것이었다.
이 군주 회합에서 가장 많은 포인트를 기록한 10인의 군주가 대군주로 선출된다. 카리스마가 소폭 깎였지만, 군주 포인트가 20 올랐으면 절대로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가만, 첫 대군주 선출 커트라인이 몇 점이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첫 대군주 선출은 현시점으로부터 약 1년 뒤인 2021년 12월 25일에 열릴 것이고, 과거의 강철인은 첫 군주 회합에서 13위에 머무르며 근소한 차이로 대군주가 되지 못했다.
당시 던전 탐사에 심취해 오직 개인의 스펙을 올리는 데만 집중하던 시기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나름 13위를 기록했으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것은 사실이긴 했다.
‘뭐, 급할 건 없지.’
대군주 자리는 그만큼 위태위태한 자리였기에 초반부터 너무 목을 매달 필요까진 없었다.
왜?
집중 견제를 당하니까!
특히, 군주들의 역량이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1, 2년 차엔 더 심했다. 조금 두각을 드러낸다 싶으면 여기저기서 물어뜯으려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1차 군주 회합 당시 대군주에 선출되었던 바르크 알 유수프와 스카디 안드바리를 포함한 5명의 대군주가 제2차 군주 회합에선 코빼기도 비치지 못했다는(당연히 죽거나 지구로 도망쳤다) 걸 강철인은 잊지 않고 있었다.
“주군.”
강철인이 군주 포인트와 대군주 선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러슬러라는 자와 그의 딸 라나가 주군께 공물을 보내왔나이다.”
“러슬러? 라나?”
강철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지민들인가?”
“주군께서 오크들로부터 구해내신 부녀이옵니다. 구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성의를 보이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옵니다.”
“그래?”
“여기…….”
루시아가 강철인을 향해 깨끗한 보자기가 덮인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바구니를 내미는 루시아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해 보였다.
‘공물이라니.’
강철인은 생에 첫 공물을 바라보며 약간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과거엔 공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하기야… 영지에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누가 공물을 올리겠는가.
“빵과 햄이군.”
바구니를 열어본 강철인이 중얼거렸다.
안에는 갓 구운 듯 보이는 호밀 빵 네 덩이와 큼지막한 햄 한 덩이, 꿀 조금, 그리고 순수하게 맥아로만 만든 맥주가 들어 있었다.
투박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정(情)이 듬뿍 담겨 있는 공물이었다.
“이, 이이……!”
강철인이 나름 흡족해하려던 찰나, 루시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쟤는 또 왜 저래?’
강철인은 의아했다.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루시아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일 있나?”
“가, 감히…….”
루시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
“감히?”
강철인이 반문했다.
“주군!”
루시아가 소리쳤다.
“말해라.”
“다, 당장 이 부녀를 잡아다가 치도곤을 치셔야 할 것이옵니다!”
“…뭐?”
“이 불경한 부녀가 지금 하늘같은 주군을 희롱하고 있지 않나이까! 설마 했는데 그따위 변변찮은 것 따위를 공물로! 곤장을 100대쯤 후려갈겨도 시원찮을 것들이옵니다! 주군,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지금 당장 부녀의 집으로 달려가 목을…….”
강철인은 그제야 루시아가 날뛰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루시아.”
“예, 주군. 당장 저 연놈들을…….”
“나는 만족한다.”
“예?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루시아가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녀가 바친 공물이 볼품없다고 화를 내는 게 맞나?”
“그러하옵니다. 어찌 주군께 고작 평민들이나 먹는 빵과 햄 따위를! 게다가 호밀 빵이라니! 하고 많은 빵 중에 호밀 빵이란 말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빵 따위를! 호밀 빵은 정말 맛이 없는 빵이옵니다! 달지도 않고!”
루시아는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어딘가 모르게 개인적인 기호가 섞인 것도 같았지만, 강철인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루시아를 타일렀다.
“루시아.”
“예, 주군.”
“다시 말하지만, 나는 만족한다.”
“하오나…….”
“물론 공물로 들어온 진상품이 최고급 와인이나 황금, 보석이었다면 더 좋았겠지. 나라고 재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돈을 매우 좋아하지.”
그것이 강철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강성한 군대를 육성하려거든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판게아 대륙의 패권을 움켜쥐려면 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또한 지구에서의 품위 유지를 생각한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말이다.”
강철인이 말했다.
“저들에게도 저들 입장이란 게 있다. 밀밭을 경작하는 농민이 얼마나 풍족하다고 금은보화를 바치겠느냐? 딴에는 이것들을 바치겠답시며 한 끼를 굶었을지도 모르지.”
“……!”
“없는 자가 허리띠를 졸라매 공물을 바쳤다면 공물 자체의 가치보단 그 안에 담긴 성의를 보는 게 옳다. 제법 기특하지 않으냐?”
“아……!”
루시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뭐, 공물이 들어온다면 금은보화가 잔뜩 들어왔으면 좋겠다만… 이런 공물도 나쁘지는 않아.”
“성군이시옵니다! 주군께서는 어찌 이리도 백성들을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글쎄.”
강철인은 그런 루시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륙 일통(一統)!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 목표와 전쟁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거든 숱한 생명이 인골탑(人骨塔)을 쌓고 또 쌓아야 하리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어느 영지민이 전쟁을 좋아할까. 전쟁만큼 끔찍한 게 얼마나 된다고. 결국 강철인은 전쟁광일 뿐이지, 성군은 결코 될 수가 없는 이였다.
“주군?”
“……?”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강철인은 루시아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입을 열었다.
“벌을 줘야겠다.”
“…예?”
부녀를 기특하다 말해 놓고는 뜬금없이 벌을 줘야겠다는 강철인의 말에 루시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기특하긴 하다만 군주에게 이런 하찮은 공물을 올렸으니 약간의 체벌을 하긴 해야겠지. 그 러슬러라는 농부를 밀밭의 작업반장으로 임명해 중책을 맡겨라.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보다 무거운 벌은 없을 테니.”
“……!”
루시아는 강철인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강철인의 명령은 말이 벌이었지, 상을 내리는 것과 같았다.
이런 명령의 배경에는 부녀에게 벌을 내리자고 한 루시아의 청을 받아들여 보좌관의 체면을 살려주면서도 부녀의 성의를 인정해 상을 내린다는 두 가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강철인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아… 주군께선 정말이지 보통 비범한 분이 아니시구나!’
루시아는 다시 한 번 강철인이 비범하고도 유능한 군주라 여기며 감탄했다. 보좌관 루시아의 강철인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이 한층 더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강철인은 루시아가 왜 이리도 호들갑을 떨고 심심하면 몸을 부르르 떠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이후로도 강철인은 몬스터 토벌을 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처음 3, 4일 정도를 생각했던 몬스터 토벌은 상상 이상으로 길어져 무려 열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강철인이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철인과 그가 이끄는 근위대는 출동할 때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성공적으로 몬스터들을 토벌했다. 희생자는 없었다. 연전연승, 불패의 군대가 바로 강철인의 근위대였다.
하지만 그런 강철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토벌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약탈자 두더지’란 몬스터 때문이었다.
약탈자 두더지란 중형 견(犬)과 비슷한 체구를 가진 두더지로, 두더지인 주제에 종종 인간을 습격해 발목이나 뒤꿈치를 한 움큼 물어뜯어 멀쩡한 사람을 절름발이로 만들고는 했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약탈자 두더지들이 동쪽 평원에 득실거린다는 점이었다.
–[튜토리얼 2] 몬스터 토벌
내용 : 영지 내 중립 몬스터들을 토벌하라
보상 : 경험치 +250 / 20골드
진행 상황 : 421 / 500
‘이 망할 놈의 두더지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튜토리얼을 완수했을 텐데.’
강철인은 퀘스트 창을 확인하며 이를 갈았다.
어느새 그의 레벨은 8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몬스터 79마리만 퇴치하면 자연적으로 9레벨을 달성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연계 퀘스트인 튜토리얼 1 퀘스트가 클리어되며 10레벨을 달성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약탈자 두더지라는 복병 아닌 복병 덕택에 강철인은 매일매일 근위대를 이끌고 삭초제근(削草除根)한다는 심정으로 땅굴을 파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별 시답지 않은 몬스터 따위가 강철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후…….”
근위대와 동쪽 평원을 누비며 약탈자 두더지들을 사냥하던 강철인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열흘. 늦어도 이틀 안엔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많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지만, 지구로의 귀환은 불가피했다.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박두식 패거리에게 곽정을 수소문하는 작업의 경과 또한 보고 받아야 했다. 게다가…….
‘어머니.’
하나뿐인 홀어머니를 찾아뵈어야 했다.
불효막심하게도 강철인은 회귀 후 단 한 번도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찾지 않은 게 아니라 10년 동안이나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기만 하던 그였기에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은 것이지만, 막상 떠오르니 못내 죄스럽기만 했다.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강철인은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실 것을 다짐했다.
그때였다.
“주, 주군!”
휴식 시간 동안 경계 근무를 맡았던 병사 하나가 하늘 높은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엔 푸른 광채를 내뿜는, 애초에 마력(魔力)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강철인과 근위대들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이를 본 강철인의 얼굴이 다소 딱딱하게 굳었다.
‘어쭈?’
그것은 정체는 타 군주가 날려 보낸 정찰용 유닛인 ‘정찰용 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