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스크린 관.
모노드라마를 찍는 연극 무대와 같은 소극장 느낌이 강하게 풍겨오는 곳.
이곳에 실선을 나타내는 조명들이 하도현과 나 사이를 감싸고 있었다.
“하연씨, 준비됐죠?”
그가 맞은편에 여유롭게 앉아 나를 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묘하게 신경을 잡아끄는 하도현의 말에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됐어요.”
“좋아요.”
내가 이곳에 오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도현에게 받는 최면, 혹은 수면의 치료.
그는 이 분야에 관한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일인자로 불린다.
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마약이나 혹은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건 아닌가, 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정도였다.
벌써부터 식은땀 한줄기가 등 뒤로 흐르는 느낌이 든다. 이것이 분명 일반적인 최면치료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에 관련한 독특한 소문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도현의 신비스러운 눈동자 때문이었다.
보통 최면의 1단계 과정은 최면 전문가인 상대방과 체험자사이의 신뢰를 필두로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최면을 ‘의식을 잃는’ 상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면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최면을 거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면 치료는 엄연히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육체와 의식을 온전히 전문가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심지어 요즘에는 최면다이어트 요법이라는 것도 있다. 자신이 감량하고 싶은 몸무게를 최면을 통해 잠재의식에 각인시키고 난 후에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면으로 마취를 하여 암환자들이 전략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게끔 하는 요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말이 맞지만, 하도현이 하는 최면치료는 첫 단계부터 엄연히 궤를 달리한다. 신선하고 충격적이라는 말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의자는 불편하지 않죠?”
“네. 편해요.”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제작된 의자는 당장이라도 이틀 밤낮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편안했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여태껏 그에 말에 따라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몸에 잠재된 모든 긴장을 빼려 노력했다.
“좋아요.”
“......후우.”
“이제 나를 봐요. 아주 천천히.
홀리는 듯한 나긋한 목소리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갔다. 심장이 팽창된 느낌을 넘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어떠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거기에 그가 있었다. 하도현이 가진 매혹의 적안까지도.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해요. 트라우마를 자꾸 의식하지 마요.”
“알겠어요.”
짐짓 두 눈가를 굳히며 의지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웃음이 살짝 불안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물론, 나는 저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이며 전문가가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지 안다.
“진짜 괜찮아요.”
이것을 받으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신비한 그의 최면 체험을 받아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을 한번이라도 떠올려보기 위해서였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하연씨, 집중해요.”
그의 두 눈이 점차 위험하게 축소되어가기 시작했다. 곧, 남들은 반기지 못해 안달까지 난 하도현의 최면을 나는 반갑지 않게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건 이미 하도현의 마성의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신비스러운 적안의 늪에 빠지면 그가 놔줄 때까지도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
“하아.”
고르지 않은 숨이 점차 입가로 지독하게 흘러나왔다. 타이머를 재는 갖가지 폭약 소리들이 내 고막 속에 불쾌하게 차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우주의 제일 깊숙한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잠시. 나는 지독히도 빼어난 하도현의 외모 안에 자리 잡은 매혹적인 눈빛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두 손을 넓게 펼쳐낸 그와 눈을 정통으로 마주칠 때였다.
“liorr.”
세상에서 제일 안정적인 중저음의 톤이 어떤 주문 같은 것을 읊는 것을 끝으로 나는 점차 나의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했다.
“허억.”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익숙한 문제는 벌써부터 터져 나왔다.
나는 하도현이 정해준 단 하나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단숨에 시작도 해보기전에 발이 꼬여버렸다.
의식과 무의식의 시작점에서부터 보란 듯이 막혀 곧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진공 상태에서의 나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ㅡ나를 살려내.
ㅡ반드시 너를 죽여 버릴 거야!
ㅡ엘리스. 당장 저 백골의 뼈를 수거해오지 못해?!
ㅡ너는 아무것도 못해. 너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이 악마의 종!
끔찍한 목소리의 파편들이 나의 머릿속을 파괴시켰다. 타이머를 재던 폭약들이 거대하게 터져나간 것도 그때였다.
셀 수도 없는 영령들이 당장이라도 나의 살점을 뜯어먹을 듯이 내 옆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가위에 눌린 듯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더욱 나를 집어삼키려는 원한에 가득 찬 절규들과 손짓에 공포에 떨 때였다.
“허억.”
“......씨.”
벼랑 끝 코너에 몰린 나를 깨우는 절대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그것이 어렴풋이 하도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다급하게 두 눈만을 끔뻑이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비명을 세차게 내질렀다.
“......연씨.”
“허억.”
격정적으로 떨리던 몸이 잘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기도 전에.
“하연씨!”
“허억, 허억!”
결국 나는 눈물범벅으로 그의 품에 안긴 채 깨어나야만 했다.
영원히 마녀라는 저주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고 말 것이라는 공포의 메아리와 함께.
*
최면 체험은 보기 좋게 실패해버렸다.
하도현은 단 한 번도 체험자와의 최면 시도를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보란 듯이 그의 무결점에 흠을 내버린 첫 번째 사례자로 이름을 올린 것이겠고.
“미안해요.”
자책감에 사과부터 튀어나왔다.
“나는 괜찮은데, 하연씨가 심적으로 힘들까봐 걱정이에요. 좀 괜찮아요?”
“괜찮아요. 좀 춥네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히터가 이렇게 빵빵하게 켜져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오한이 날 정도로 두통이 나를 덮쳐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가세요?”
내 황급한 물음에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뒷머릴 슬쩍 긁고는 재빨리 나가며 대답했다.
“잠깐만요.”
그가 나가자마자 고통의 한숨이 입가에서 닳아 없어졌다.
“또 실패했어.”
벌써 268번째 최면 실패다.
하도현의 클리닉에서 2년 동안이나 숱하게 겪어왔던 실패의 경험이지만 아직도 후유증은 익숙해지기 힘들다.
이성을 상쇄할 정도의 정신적인 고통은 이미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60년 동안이나 헤이즐에게 갈굼을 당했던 경험은 억지로 나의 정신력을 확장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
공짜로 그의 최면 체험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하도현에게 고마운 일이지만 힘이 빠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현씨.”
문이 벌컥 열렸다.
“이거 마셔요.”
탁- 소리가 나며 내 앞으로 노란 머그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향긋한 유자차가 담겨 있었다.
또한 나에게 차를 주기 위해 급하게 온 모양인지 그의 손으로 유자차의 파편들이 튀어있는 것까지 보였다.
“괜히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고마운 마음은 둘째 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도현이 두 손을 절레 흔들며 짧게 웃었다.
“감사하면 다음에도 와요.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니까.”
걱정이 앞섰다.
“될까요?”
조급함마저도.
나의 뿌리를 찾는 것은 어쩌면 내게는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놓을 수 없는 것이랄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의욕이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게 부러 티는 안냈지만,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전문가에게서도 실패하니 이제 더는 방법이 없는 것인가 싶었다.
“반드시 되게 만들게요.”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결연감 섞인 미소를 내보였다.
“그러니까 유자차 마셔요. 내가 직접 탄 거예요.”
“고마워요.”
호록- 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일깨웠다. 유자와 꿀을 너무 많이 넣은 모양인지 단맛과 신맛은 물론이고 탁한 느낌까지 입안을 맴돌 정도였다.
속으로 웃음이 일었다. 최면전문가도 유자차는 못 타는구나. 물론, 그의 정성에 감사하다.
“......”
그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한다는 듯이 묵직한 침묵을 내보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실패한 원인을 또 되짚어 보는 중인가 싶었다.
“아.”
그 순간 하도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적색이 은은하게 도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보기 위해 묘한 힘을 방출시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단숨에 고개를 홱 돌려야만 했다. 그와 잠자코 시선을 부딪칠 생각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도 어색한 감은 없었다. 그는 최면전문가치고는 모델 뺨을 후려칠 정도로 아찔한 외모의 소유자였기에 어색함보다는 오히려 긴장감이 내 머릿속을 적셨다.
눈가를 돌려 슬쩍 완벽한 비율의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직도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의지 가득한 모습에 허둥지둥 입이 쏘아져나갔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가끔 하도현은 뭐랄까.
“예뻐서요.”
종잡을 수가 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능구렁이 같이 넘어가는 말투에도 그가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쉽사리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아까 듣기로.”
“응?”
먼저 말을 꺼냈다. 하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분명 liorr, 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기억력이 좋네요.”
피식 웃는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몇몇 최면 치료사를 찾아갔었지만 그들은 대체적으로 영어 구호를 사용할 뿐이었다. 물론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어폐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쓰는 언어는 마녀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것.
왜 의심 하냐고? 나는 인간과 다른 동식물들의 기까지 감지할 수 있는 마녀였으니까.
당연하게도 나는 그에게 내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나를 미친 여자로 볼 게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또한 내 감정의 비밀을 그와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왜 내 무의식의 문을 뚫고 못 들어가는 지.
아마도 내 심연 속의 본능이 이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그의 체험에 영락없이 빠졌다가는 나의 모든 정체가 까발려질 것만 같았다.
하도현의 정체에 대한 의심의 고개가 빠끔 차오르는 것은 일종의 나의 흥미를 잡아끄는 부분이었다.
그는 도대체 뭘까?
인간일까? 아니면 나처럼 마녀? 혹은 악마?
나는 이에 대한 의심의 실타래를 아직 단 한 꺼풀도 벗기지 못했다. 벌써 하도현과 만난 지도 2년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실마리 하나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내게 어떤 흥미의 관점을 넘어서 오기로까지 치솟을 정도로 발전해 나갔다.
그는 거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매번 똑같은 인사, 변함없는 눈빛으로 보내는 나긋한 시선, 일정한 보폭으로 걷는 걸음걸이와 동선. 심지어는 내가 체험에 실패하고 오한이 들 때 매 순간 똑같이 형편없는 실력으로 타오는 유자차, 혹은 모과차들까지도.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느끼는 의혹이 짙어지는 부분은 또 하나가 더 있다.
어느 날, 예약을 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환청이 더 심하게 들렸던 날인데, 견디고 견디다 힘들어 그의 클리닉을 방문했는데,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창문이 열린 클리닉으로 내가 이름도 모르는 각종 오색찬란한 새들과 고양이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그의 클리닉에서 키우는 소형 관목과 식물의 줄기들이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이 하도현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와 눈을 마주친, 전에는 볼 수 없던 하도현의 소스라치는 표정이란!
분명 하도현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앉아 한 손가락으로 턱을 여유롭게 쓸며 웃고 있다.
“궁금해요?”
“네.”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눈빛이 나를 시선에 가둔다.
“나만의 마법의 주문이에요.”
빌어먹을.
그 마법의 주문이라는 게 매번 바뀌는 게 문제라고!
하도현은 벽면에 접착되어 있는 스크린을 무심코 보다말고 살 떨릴 정도로 느릿하게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피식 웃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괬다.
그것을 끝으로 나는 유자차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머그컵을 밑으로 하고 일어섰다. 의자 끄는 소리가 드르륵- 소음을 내자마자 그가 눈을 들어올렸다.
“가려고요?”
“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요. 하연씨라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하도현이 물끄러미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짙어지기도 전에 저 짜증날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에 황급히 눈길을 피해 문을 열었다.
숨을 참으며 문을 닫을 때였다.
“하연씨.”
별안간 등 뒤로 속삭이는 듯한 톤에 나의 고개가 잘못 조립된 봉제인형처럼 돌아갔다. 하도현이 어깨만을 살짝 비튼 채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같이 밥 먹을래요?”
“......네?”
2년 동안 그와 알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식사 신청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황을 숨기며 웃음을 자아냈다.
“데이트 신청인가요?”
그는 아직도 앉아있었다. 여유로운 자세, 여유로운 웃음으로.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 좋고요.”
“......좋아요.”
“곧 연락할게요.”
전에는 볼 수 없던 환한 미소가 이 남자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곧, 그가 한 손까지 다정하게 흔들었다.
“조심히 가요.”
난데없는 식사 제안에 무언가 탐탁지 않은 느낌을 갖기도 전에 서둘러 문을 닫았다.
하도현은 끝까지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