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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주인님
작가 : 정블루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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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필요한 것은 나야
작성일 : 17-12-15     조회 : 497     추천 : 0     분량 : 5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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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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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밤은 길기만 했다.

 

 침대 맡에 앉아 두 다리를 오므려 상체를 숙이고 끝없는 생각의 틀에 갇혀야만 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애써 침착했던 감정이 점차 소름의 창끝이 되어 나를 겨누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고민의 통로에서는 끝내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뇌리에 남아 나를 서걱, 찌를 뿐.

 

 ‘잘 자, 엘리스.’

 

 “......”

 

 ‘잘 자, 엘리스.’

 

 “......”

 

 ‘잘 자, 엘리스.’

 

 “미치겠네......”

 

 입술을 잘근 깨물고 수없이 지독한 고통의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그가 진짜 실체의 나를 안다는 사실은 결국 변함이 없었다.

 

 나를 ‘엘리스’ 라고 알고 있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소렌토항에서 악랄한 마녀, 헤이즐이 붙여주었던 나의 이름을 말이다.

 

 아무리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으려고 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단연코 그와 같은 외모의 인간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한번 보아도 절대로 까먹지 않을 수 있을 자신감이 그의 외모를 보자마자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떨떠름한 걸 떠나서 앞으로도 평생 죽기 전까지도 그와 같은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목구멍 가득히 차올랐다.

 

 돈 없는 고아였던 탓에 정규수업은 받을 수 없었지만, 내 머리는 어느 정도 총명함을 자부하고 있었다. 마녀의 마법은 수많은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난제의 수학공식과도 같았으니까.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만 했다. 해가 뜰 때까지, 다음날 링거액이 다 떨어져 퇴원하라고 눈치를 주는 간호사의 말이 없었더라면 길고 긴 고통의 시간에 잠겼을 것이다.

 

 비스듬히 허리를 숙인 내 입가로 쪼그라든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답답해.’

 

 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남자를 찾아가 어떻게 나를 알았냐고 윽박지르던지, 그도 아니면 수상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나라에 정착해야만할 것인지.

 

 그 어떤 것도 해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단지 고통스러울 뿐.

 

 *

 

 “또 증상이 도졌나요?”

 

 “네.”

 

 뻐근한 뒷목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퀭한 눈 밑으로 다크써클이 제 존재를 여실히 알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하도현이 앉아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참 곤란한 결과네요. 나의 실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라니.”

 

 그는 여전히 호의적인 미소를 입가에 품고 있었다. 흙발에 탄탄한 체구에서 아우르는 하얀 가운이 하도현을 너무도 세련되게 빛내주고 있었다.

 

 “......그러게요.”

 

 너무도 묘한 느낌,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다루는 푸른 느낌이 그의 분위기에서 강하게 풍겨져 나왔다.

 

 다른 사람을 볼 때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악마의 하수인인 마녀를 상징하는 보라색의 칙칙한 기운과는 정 반대의 요사스러운 생명력의 기운.

 

 오히려 그것이 나의 으스스함을 자극했던 것도 같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오라가 범상치 않다고 느껴야만 한다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분위기가.

 

 하도현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를 꿰뚫어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결국 그의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나였다.

 

 내 의도적인 회피를 간파한 그가 생긋 웃더니, 이내 문을 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늘의 예약자분들은 전부 마감되었나요?”

 

 대기실의 폭신한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간호사 몇 명이 그의 물음에 즉각 반응했다.

 

 “네. 오늘 진료는 전부 끝났어요.”

 

 하도현이 가죽시계를 힐끗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녀들에게 덤덤히 시선을 옮겼다.

 

 “20분이 남았는데, 이만 퇴근하세요.”

 

 “와, 역시 원장님 최고!”

 

 “감사합니다!”

 

 그녀들은 옷을 갈아입고 부랴부랴 짐을 싸 병원 문을 닫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하도현은 나에게 일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나가는 것을 꿋꿋이 눈으로 눌러 담던 그가, 이내 의자를 뒤로 빼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쭈욱 빼내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시선을 곧추세우자마자 그가 병원의 현관문을 닫더니, 갑자기 잠그는 것이 아닌가!

 

 “......뭐지?”

 

 하도현은 단숨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눈이 정통으로 얽혀버렸다. 황급히 자라목이 되어 쑤욱 뒤로 빼돌렸다.

 

 정돈되어지지 않은 시선을 겨우 갈무리하자마자 그가 내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두 팔을 여유롭게 내려뜨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연씨.”

 

 “네?”

 

 하도현은 한눈에 보기에도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띠며 은근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원장실로 오시죠.”

 

 “네?”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몰래 전해 듣기로는 간호사들 그 누구도 원장실 근처로 가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가 일부러 바쁜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잠깐이면 돼요. 말할 것이 있어요.”

 

 “알겠어요.”

 

 순순히 하도현의 응답에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그의 말을 들어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까.

 

 하도현의 클리닉은 꽤 넓었던 탓에 몇 개의 꼬인 복도를 지나고서야 원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해 문을 열어준 그의 손길을 따라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입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다물려졌다.

 

 “조금 특이하죠?”

 

 그의 원장실은 뭐랄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줬다.

 

 숲의 정기를 머금은 푸름이 한가득 내부를 새초롬하게 밝히고 있었다.

 

 각종 화목들과 더불어 꽃, 소형 단목들이 마치 병원 내부에 정갈하게 꾸며진 화원을 연상케 했다.

 

 더불어 벽면을 타고 오르는 적홍빛과 샛노란 넝쿨줄기들이 안을 너무도 화사한 빛깔로 입혀주고 있었다.

 

 나는 선채로 이 뜬금없는 풍경에 곧 다물려진 입이 떡하니 벌어지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정말 특이하네요.”

 

 “들어가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빙긋 웃으며 내게로 들어가라 재촉했다. 등 떠밀리듯 들어오자마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에는 작은 인조연못까지 놓여있었다. 그 안을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의자 또한 직접 깎아서 가져왔어요.”

 

 “이게 도대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마치 약품과 소독한 냄새가 가득 흐르는 병원이 아니라 70년 전,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산타루치아 항구 주변에 있는 동화 같은 숲속을 떠올리게끔 만들고 있잖아?

 

 푸른 정기가 오장육부로 청초하게 스며드는 느낌에 벙 쪄 있을 때, 그가 나를 불렀다.

 

 “여기로 와요.”

 

 그가 권한 것은 의자였다. 그것도 나무도 된 흔들의자를!

 

 “여기 앉으면 돼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의자에 몸을 내렸다. 곧, 흔들의자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듯 옅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소한 광경에 얼이 빠져있을 때 하도현이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그제야 뭔가 서서히 끈을 조이던 느낌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결정적인 사실 또한.

 

 그랬다. 하도현을 만나자마자 조금 전까지도 나를 괴롭히던 환청과 환각 증세들이 거짓말처럼 싹 지워져있던 거였다. 누가 지우개로 박박 문지른 것처럼 너무도 깨끗하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물끄러미 하도현을 응시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잠깐이나마 골몰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러더니 무릇 내 쪽을 봤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하연씨.”

 

 “네.”

 

 그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멍한 정신을 덜컥 깨웠다.

 

 “하나만 물을게요.”

 

 “......”

 

 “혹시 옛날에 죄지은 거라도 있나요?”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의도인 거지?

 

 입가가 얼어붙었다. 하도현의 질문은 철저하게 의도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듯 했다. 어딘가 어긋나버리는 느낌과 함께 그의 시선을 홱 피했다.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담담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아마 내게 파고들기 위해 웃음 위에 본인의 진심을 담은 교묘한 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의 치유를 피해갈 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질문 그대로에요. 혹시 예전에 살인이라던가.”

 

 “......”

 

 “아니면 무덤 속의 있는 시체를 파내는 도굴꾼의 직업이라도 갖고 있었나요?”

 

 헐레벌떡 입을 뗐다.

 

 “설마, 그럴리가요.”

 

 “......”

 

 그는 아마도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발끈해서 물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 보여요?”

 

 불안한 얼굴로 그를 두리번거렸다. 하도현의 시선은 끝없이 먹이를 집어삼키기 위해 매복하는 짐승처럼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여전히 말이 없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나였다. 두루뭉술하게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설픈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밥, 같이 먹기로 하지 않았나요?”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내가 딱 그랬다.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이 입가를 타고 번질 때 그의 웃음이 순식간에 끊겼다.

 

 “......”

 

 동시에 단정한 머리칼 아래로 흐르는 신비한 적색 빛의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변했다.

 

 “하연씨.”

 

 하도현의 저런 눈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의 기세에 한 순간에 시선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벌겋게 펄떡이던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마저도.

 

 입이 지독하게 다물려질 때 그가 재차 섬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연씨.”

 

 하도현의 말에는 리듬감이 없었다. 단지 잘 다듬어진 칼날이 되어 나를 겨누고 있을 뿐.

 

 “......”

 

 “당신의 정체가 뭐지?”

 

 더는 그의 시선을 받아낼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나지 않았다. 결국 흔들의자 난간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일어나 그를 등진 채로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

 

 문을 부서지듯 열어 재끼고, 이미 풀려서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복도를 헤맸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복도가 이렇게 미로 같아?

 

 결국 진료실을 찾은 나는 그 안에 있는 가방을 재빨리 들쳐 메고 앞서 온 자리로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헙!”

 

 그가 바로 앞에 있었다. 적빛의 눈이 고요하게 나를 잠식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하도현이 내 앞에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동안 쭉 느껴왔어.”

 

 “뭐, 뭐가요?”

 

 당장 숨결이라도 느낄 거리가 우리 사이에 잠재되어 있었다. 너무 놀라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릴 때 그의 입이 나의 목덜미 언저리로 비스듬하게 붙었다.

 

 스산한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죽음의 기운. 그것이 당신에게서 강하게 느껴져.”

 

 “......”

 

 “나는 하연씨가 괴로울 것이라는 걸 알아.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더욱.

 

 “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는 것 또한 뇌의 과부하를 부추기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이 순간 느껴진 것은 그의 숨결이 너무도 달콤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겪는 끔찍한 환각과는 질을 달리할 정도로 너무도 달콤해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정도의 몽롱한 기분.

 

 턱!

 

 결국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이라는 위화감과 함께 하도현의 어깨를 밀치고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연씨를 치료해줄 방법을 알아. 더는 당신이 고통스럽지 않게 해줄 치료법을.”

 

 “문이 왜 안 열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해. 당신이 살아온 과거를 말이야.”

 

 아차, 잠겨있었지.

 

 재빨리 위로 까치발을 꼿꼿이 들어 잠겨낸 문을 풀었다. 그리고 벌떡 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고막을 강타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신에게 결국 또 필요한 것은 나일 테니까.”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치듯이 대답했다.

 

 “수고하세요!”

 

 도망치듯이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엎어질 듯이 계단을 구르듯이 뛰어내려왔다.

 

 하도현을 만나, 또 며칠은 평온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일시적인 희망을 품은 채로.

 

 또 알고 있었다.

 

 “허억, 허억.”

 

 결국 그를 다시 찾을 것이라는 것도.

작가의 말
 

 도현이가 의외의 박력남이라는 것을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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