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이 되었다.
순차적으로 쉬는 이틀이었는데, 다행인 건지 주말에 얻어 걸린 것이 운이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편안히 발을 뻗고 자지 못했다. 오히려 초췌하기까지 했다.
“요즘 내 주변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혼잣말이 점점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요즘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일하는 호텔의 신임 회장님은 나를 보고 마녀라니, 또 괴롭힌다고 하지를 않나. 내가 그나마 사람으로서 신뢰할 수 있었던 한 남자는 나보고 정체를 밝히라고까지 한다.
“둘이 작전이라도 짠 건가?”
의아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발을 뻗고 누웠다. 그러나 머리는 해답을 찾아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더욱 복잡해질 뿐.
“에라, 모르겠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열었다. 시간은 낮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릇처럼 일어나 아무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다가 흠칫했다.
“......반찬이 없잖아.”
하루에 한 끼 꼴로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반찬이 동이 나 있었다. 하지가 자신의 부모님이 정성껏 만들었다며 갖다 주었던 멸치볶음과 소시지 야채볶음, 김치와 조림 김까지 싹 다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과 함께 동화되기 위해 한국음식을 먹었던 것이, 어느새 나의 주식이 되었다는 것은 웃지 못할 사실이었다.
“심지어 물도 없네.”
이제 막 바닥을 보이던 생수병을 들어 입안에 탈탈 넣었다.
결국 묘안을 짜내야만 했다. 해답은 가까운 데에 있었다.
마침 얼마 전에 문에 부착되어 있던 마트 세일 전단지가 생각난 것이다. 한참이나 쿠폰 책자 사이를 기웃거리다 결국 그것을 찾아내고는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오. 삼겹살 세일.”
고기와 함께 여러 가지 과일과 채소를 묶음세일 하는 것이 보였다. 과일과 채소류 등은 가만 두면 썩겠지만 고기는 냉동실에 얼려두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고기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으차.”
별 특징 없는 나팔 청바지와 다 늘어진 티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한숨이 그득 입 안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내가 봐도 정말 패션센스 꽝이다.”
강하지가 만약 이 모습을 봤다면 자지러졌을 것이다. 아니면 울그락불그락 내 손을 잡아 뜯을 듯이 이끌며 옷을 한 다발은 사러 나갔거나.
하지가 놀러올 때의 나는 본능적으로 옷가지들을 장롱 속 깊은 곳에 쑤셔 박는다. 그녀가 괜히 나 때문에 마음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허리를 반듯하게 곧추세우자 뚜둑,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가볼까?”
먹는 즐거움을 잠시 망각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식욕이 없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나는 끊임없이 환청과 환각에 시달려 자연스럽게 먹을 것을 줄이게 되었다. 결국 건강한 살집을 자랑하던 체질이 빼빼마른 빼빼로처럼 변해갔다.
곳곳에 못나게 살이 빠져 비루먹은 꼴을 확인한 나는 불끈 주먹을 쥐어 전의를 다졌다.
오늘 밤은 칼로리 신경 쓰지 않고 고기를 양껏 구워먹을 생각이었다. 왜? 의사가 권유했으니까.
마음껏 먹어주겠어!
*
마트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내 분수와는 맞지 않게 조금 비싼 방세와 통장 속의 잔고를 대조하여 본 결과, 아쉽게도 고기는 싼 값에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수입고기로 사기로 하였다.
이탈리아 돼지고기가 그나마 싸다는 사실을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본 후였다. 생각해보니, 이탈리아는 내 모국이잖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좋겠다.”
주말이었던 탓에 차를 이끌고 나와 가족단위로 장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1층으로 발걸음을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노란 카트를 집었다. 식품매장 입구에서 보안을 서던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살 거 참 많다.”
들어가자마자 와인 진열대에 놓인 수많은 와인들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가격은 싸지만 고기값마저 아껴야하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일단 제일 먼저 갈 곳은 고기가 잔뜩 진열된 장소였지만, 나의 시선은 단숨에 시식코너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맛 좋은 우리 쇠고기! 한우 먹어보고 가세요!”
시식코너 아줌마가 보기에도 맛깔나 보이는 고기를 구워내고 있었다. 텅텅 비어있는 초라한 카트를 이끌고 단숨에 고기아줌마에게로 달려갔다.
마침 고기는 노릇노릇 잘 익어가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를 빼내 남들보다 빠르게 고기 한 점을 푹 찍어 눌렀다.
“아뜨, 아 뜨거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맛있었다. 왜 그동안에 먹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는지, 그야말로 뼈저릴 정도의 후회막심이었다.
사람들은 단숨에 대거 고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맛 좋은 한우를 먹겠다는 일념이 돋보이는 신속함이었다.
당장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처음 먹을 때에는 아무런 제지조차 받지 않고 먹었겠지만 두 번째라면 얘기가 다르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고기를 집어먹었던 빠르기에 덧붙여 고기아줌마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만 하는 셈이다.
마침 다가온 요거트 시식코너 아줌마가 다가와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재빨리 마지막 한 점을 낚아채는 데에 성공했다.
“크......”
살살 녹았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팩에 고이 쌓여져있던 고기를 꺼낸 그녀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맛 좋은 한우! 1등급 한우 맛보고 가세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점은 더 먹고 가야 한다는 비장한 오기가 생겼다. 아줌마는 고기를 뒤집을 때마다 나를 자꾸만 의식하며 힐끔거렸다.
마치 ‘이제 그만 가줄래?’ 라는 경고서린 표정 같았다. 물론 물러날 의사는 추호도 없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고기는 안사고 시식으로 배만 채우고 가는 거지 같아보였겠지만 어쩌랴, 돈이 없는 직장인은 오늘도 웁니다.
방세는 비쌌고 휴대폰 비용은 매달 나가며 전기세에 난방비까지,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나마 저축을 하기는 하지만 정기적인 적금이었기 때문에 늘 부족한 생활비에 시달려야만 했다.
향긋하고 구수한 냄새에 정신을 빼앗길 무렵, 고기가 다 구워졌다.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한 전사의 마음으로 전투적으로 품 안에 숨겨둔 이쑤시개를 칼처럼 꺼내 고기에 박아 넣으며 무한한 승리의 기분을 느꼈다. 이내 고기는 장렬하게 나의 목구멍 안으로 전사했다.
고기 굽던 그녀가 다른 코너 아줌마와 다시 잡담을 하다 말고, 욕심이 지나쳐 고기 한 점 더 집으려던 나를 배은망덕한 표정으로 쏘아본다.
뜨끔했다.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허공에 대고 ‘한 점만요.’ 라는 모습을 보이던 그때.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는군.”
수없이 몰려든 인파 속에서 또렷하게 정신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들릴 무렵,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소리가 난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가 있었다.
다, 다니엘?
“......헉.”
입이 뜨악해졌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추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를 감싼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 그와 나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세찬 소용돌이가 나를 감쌌다. 그것은 곧 뭐라 형용하기 힘든 오염의 찌꺼기가 되어 머릿속을 전염시켰다.
“다, 당신이 여기 왜.”
다니엘은 그의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불결하다는 듯 피하며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한심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렇게 먹으니 맛있어?”
“......”
“거지도 아니고.”
그는 이내 삐딱하게 시선을 돌려세우며 비웃었다.
뭐시라고라?
거지라고 했냐, 지금?
순간 병원에서 그와의 일이 떠올라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단숨에 활활 타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나를 보며 비웃다 말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인파 사이를 우아하게 뚫기는 개뿔, 자꾸만 한우로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허둥지둥 겨우 헤집고는 인상을 팍팍 쓰며 1등급 한우를 겨우 집어 나를 보고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고기를 든 팩이 그의 긴 손을 타고 올라가 종래에는 나를 보며 건방지게 까딱거리고 있었다.
마치 ‘너도 사볼 능력이 있으면 사보지 그래?’ 라는 비열한 마음씨가 느껴지는 듯 했다.
“한우 사먹을 돈은 없나 보지?”
하아.
열 받네.
다니엘의 탐스럽게 일렁이는 목젖을 당장이라도 끓는 가마솥에 펄펄 끓여 넣어 시약의 재료로 삼고 싶다는 충동이 강렬하게 들었다.
뭐라 쏘아붙이려던 그때였다.
한쪽 입가를 비틀며 얄밉게 웃던 그의 손 위의 고기 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팩이 단단하게 여며지지 않았는지 고기가 그의 팔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바닥으로 추락한 거였다.
곧, 그의 비틀어진 한쪽 입가가 이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손님, 그거 떨어졌으니 사셔야 해요!”
고기아줌마의 통쾌한 일격까지도.
비웃음 폭탄이 나의 입가에서 보란 듯이 터졌다.
“푸핫.”
깔깔 웃고 있자니, 그가 억울한지 아줌마에게로 다가와 항변했다.
“고기가 자기 스스로 떨어진 겁니다.”
“그래도 사셔야 해요. 거꾸로 그렇게 치켜들면 어떻게 해요. 손님 부주의로 그렇게 된 것이니까 구매하셔야 해요.”
그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며 대꾸하고는 다시 고기 굽는 데에 열중했다.
다니엘의 한쪽 눈썹이 그녀가 말한 조금 전의 대답처럼 치켜들려졌다.
슬쩍 뒤돌아 고기를 아련하게 쳐다보던 그의 등 뒤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제어하며 넌지시 한마딜 보탰다.
“저기요.”
“뭐.”
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고기 어차피 또 살 거죠?”
“내 맘이야.”
살 거라는 것인지, 안 살 거라는 것인지 에둘러 중의적 표현으로 대답한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저 속 좁은 인간 같으니라고.
“이거 한번 먹어보고 사요.”
마침 다 구워진 고기를 냉큼 집었다. 그가 눈을 좁혀 떠 나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더러운 곳에서 굽는 그런 고기를, 읍.”
무어라 대꾸할 가치도 없어 그의 입에다 고기를 쑤셔 박았다. 다니엘은 억지로 입안에 고기 한 점을 욱여넣고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 이런 불결한.”
“......”
더럽다고 뱉으려 하던 그의 꿈틀거리는 입가가 잠깐 잦아들었다.
“......?”
곧, 그의 입이 온순하게 위와 아래로 다물려지기 시작했다. 고기 맛을 음미하고 있는 거였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꿈틀거렸다. 아마 삼켰나 보다.
결국 참다못한 나는 배꼽까지 잡을 정도로 웃어재꼈다.
“핡핡, 너무 웃겨.”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끝으로 그가 고기가 담긴 팩을 자신의 카트 안에 던져 넣으며 비꼬듯이 대답했다.
“더럽긴.”
그는 내 눈앞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조금 전의 도도하던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채로.
“남자친구야?”
시식코너 아줌마가 물었다. 나는 고기 한 점을 비굴하게 집으며, 대신에 뻔뻔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샀으니까 한 점 더 먹을게요.”
다니엘이 산 것을 내가 산 것 마냥 포장하면서.
“아유. 남자친구가 진짜 미남이네!”
그녀의 목청이 순간 떠나가라 장내를 울렸다. 순간 아차, 싶은 표정으로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다니엘이 팔짱을 낀 채로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나, 남자친구 아니에요!”
결국 들키지 않고 고기 한 점 더 먹으려던 나의 의도는 순식간에 그에게 공격의 빌미를 남겨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알겠는데, 저기 말이야.”
“......네?”
“그만 좀 먹지 그래?”
그녀가 음산한 표정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