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넷째 주 화요일 점심시간. 모니터의 디지털시계가 11시 59분에서 12시로 바뀌자마자 팀원들은 일제히 일어섰다.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뭐야?”
“어, 저 방금 봤는데. 청국장, 동그랑땡, 콩나물무침 또 뭐더라… 아무튼 그게 전부일걸요?”
팀 막내의 말에 팀원들은 구내식당 메뉴선정 방식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며 몇몇 팀원들과 근처 라멘집으로 향했다.
“요즘 것들은 음식 귀한 줄, 돈 귀한 줄 모른다니까.”
이 말을 일삼는 부장님마저도 오늘 메뉴는 아니다 싶었는지 조용히 차를 타고 회사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포착되어 단체 채팅방에 증거물인 사진이 돌아다녔다.
팀원들은 각자 먹고 싶은 식당으로 향하며 열심히 부장님의 최근 어록을 폭로해대었다.
“우리 때는 말이야,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일하고 자고 다시 일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야근 몇 시간 했다고 그렇게 싫어하니. 쯧쯧.”
“뭐 아파? 죽어도 회사에서 죽어야지. 그깟 감기로 얼마나 아프다고 회사를 쉬어?”
“정 대리. 이 줄은 왼쪽 정렬이고 이 줄은 양쪽 정렬이잖아. 기본 모르나, 기본?”
채팅방이 야유와 동조로 가득 차며 빠르게 활성화되었다.
한을 채팅방에서나마 가열차게 풀어낸 사람들은 식사 맛있게 하라는 훈훈한 멘트와 함께 마무리 지었다.
각자 메뉴를 시킨 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대화의 주제는 8월 첫째 주에 있을 여름휴가였다.
곧 다가올 2주간의 여름휴가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희망이었다.
2분기에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로 인해 하루, 하루를 바쁘게 지냈던 재희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어디를 갈지, 어떻게 보내야할지 각자의 여행지에 대해 부푼 기대를 안고 정보를 교환했다.
재희는 팀원들의 말을 들으며 내가 휴가지를 왜 아직도 안정하고 있었을까. 자책하며 밥을 먹고 난 후 비행기 티켓이나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희씨, 이번 휴가는 어디로 가요?”
“어, 아직…”
동료의 말에 재희는 무심결에 대답을 하다 문득 작년 10월에 결제한 런던행 티켓이 떠올랐다.
런던, 런던에 가는 것이다.
런던. 인기 있는 관광지이지만 재희는 유독 런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학교 때 떠났던 유럽배낭여행에서조차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 런던을 휴가지로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해리포터 스튜디오 때문이다.
금요일 하루 연차를 써서 2박 3일로 잠깐 갔던 오사카의 유니버셜스튜디오 안 해리포터 존에서 재희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들어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빠져나오지 못하는 재희를 친구들은 먹을 것을 사주겠다, 지팡이를 사주겠다, 여기 밖에 귀여운 인형이 있다 등등 온갖 회유를 써 간신히 끌어내었다.
그날 밤 호텔로 복귀하여 충동적으로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나 말리지마, 해리포터스튜디오 2주내내 갈 거야.”
“재희 왜 저래? 해수야 좀 말려봐.”
“야, 냅둬. 쟤 지금 약간 맛 간 듯.”
“저러다 말겠지. 술이나 먹자.”
비행기 티켓으로 시작해 술 파티로 끝난 오사카에서 마지막 밤. 재희는 술과 함께 티켓을 끊은 기억을 간단히 삭제시켜버렸다.
갑자기 많이 나온 11월 카드 값에 내역서를 내려 보다 아, 비행기 티켓 끊었었지. 하며 잠시 상기시키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갑작스런 프로젝트로 인해 하루하루 바빴고, 바빴고, 바빴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거나, 기억을 되새김질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난 것이 바로 지금.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여름휴가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은 때였다.
8월 초 직장인이 대부분 휴가를 떠나는 이 때, 비행기 티켓 말고는 아무것도 예매한 게 없는 재희의 머릿속에는 망했다. 라는 글자가 크게 떠다녔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재희는 일단 ‘런던여행’을 검색했다.
해리포터 스튜디오 말고는 런던에 뭐가 있는지, 뭐가 유명한지 몰라 여행후기를 봐도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구글맵을 키고 사람들이 많이 갔던 장소, 가고 싶은 장소에 별표를 치기 시작했다.
‘대충 가고 싶은 곳 정해지면 숙소예약부터 하자.’
궁전투어를 하겠다며 떠났던 저번 여름휴가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호텔 인테리어만 보고 골랐다가 나중에 일정을 짜고 보니 중심지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곳에 예약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었다.
그 때 아침, 저녁마다 지하철을 왕복하며 고생한 기억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절대, 다음부터 그렇지 않겠다며 다짐한 재희는 급한 마음을 눌러가며 다시 여행 후기를 뒤적거렸다.
부지런히 한 달이 가고 드디어 휴가를 떠나는 토요일 오후. 공항은 한산했다.
여유롭게 티켓팅을 하고, 수화물을 부친 후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출국이 많아서인지 의도치 않게 탑승시간 전까지 2시간가량이나 남아 천천히 면세점 구경을 시작했다.
인터넷면세점이 생긴 이후로 면세점 쇼핑에 눈을 뜬 재희는 두 달 전부터 기다려 이것저것 사기 바빴다. 도착한 직후 저녁 호텔방에서 맥주를 먹으며 큰 비닐봉지 가득 산 면세품을 뜯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투명한 면세점 봉투에 한가득 면세품을 수령한 재희는 뿌듯한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로 게이트 앞에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비행장에 서있는 비행기들을 구경했다.
해가 지고 어둠속에서 시작한 비행은 조용하게 막을 내렸다. 기내식을 포기하고 잠을 택한 재희는 경유지를 거쳐 탑승한 두 번째 비행기 안에서야 첫끼를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런던. 입국심사 줄에 서 피곤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앉고 싶은 마음에 괜히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며 부산을 떨었다.
이제야 차례가 들어오고, 입국심사관 앞에 서서 여권을 넘겨주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기분 어때?”
“*피곤해, 너는?”
“*나도.”
상투적인 질문에 상투적으로 답변하는 대신 직접적인 말로 대답했다.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곤함에 제정신이 아닌 게 한 몫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답변치고 조금 참신한 대답에 입국심사관은 동조를 표했고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입국심사관은 여권을 넘겨주며 미소 지었다.
“*런던에서 즐거운 여행되길 바랄게.”
“*너도 좋은 하루 보내.”
호텔방에 도착한 재희는 캐리어를 아무렇게나 세워둔 채로 침대로 직행했다. 푹신한 침대가 장시간 비행에 지친 몸을 달래주었다.
“아, 좋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휴가의 시작을 만끽하다 여유가 생기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호텔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먼저, 오른쪽으로 문이 보이고 문 양옆으로 옷장과 욕실이 위치했다.
옷장 옆에는 전신거울과 캐리어 쇼파가 있었고 미닫이문 형식으로 되어있는 욕실은 닫혀있는데다 침대와 같은 선상에 있어 일어나지 않고는 내부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침대 맞은편에는 켤 일이 없을 벽걸이형 텔레비전이 위치해 있었다. 옆으로는 책상이 놓여져 있고 위에는 메모지, 펜, 전화기, 호텔안내서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침대 양 옆에는 전등과 스위치, 콘센트가 있고 소지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 보이는 사이드 테이블.
창문은 커튼에 가려져 있고 앞에는 쇼파가 있었다.
음, 마음에 들어.
잠자리에 예민하여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선택한 가치가 있었다.
재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옆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30분.
긴 여행으로 피곤할 것을 예상해 첫 날에는 스케줄을 비워놨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보니 나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샘솟았다.
“일단 씻어 볼까.”
힘차게 침대에서 일어난 후 문 근처에 아무렇게나 세워놓은 28인치 캐리어를 질질 끌고 와 쇼파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펼쳤다.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넣어놨던 짐이 비행기 수화물 안에서, 호텔로 오면서 이리저리 흔들려 원래의 상태를 잃었다.
“음, 여기쯤 놔뒀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캐리어 안을 뒤적거리던 재희는 이내 찾았다. 라는 말과 함께 샤워용품을 넣어둔 가방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은 넓고 깔끔했다. 중앙에 세면대를 중심으로 왼쪽이 화장실, 오른쪽이 샤워실로 구분되어 있었다.
노래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고 가볍게 화장도 마친 뒤 대충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호텔을 나섰다.
나오기 전 호텔 키, 지갑, 이어폰, 핸드폰, 카메라를 챙겼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면 서로 챙겨줬겠지만 혼자 여행할 때는 확인을 안 하면 꼭 하나씩은 잊고 나와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디서 저녁을 먹어야하나. 검색을 하던 중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다 같이 모여 있는 친구들 얼굴이 보였다.
“야, 한재희. 혼자 런던 가니까 좋냐?”
“니 얼굴 말고 런던 풍경 좀 보자. 카메라 좀 돌려봐.”
재희는 야, 죽을래? 라고 하면서도 순순히 카메라를 돌려 풍경을 보여주었다.
“오, 좋은데?”
“나도 런던갈 걸 그랬나봐. 이제라도 방콕행 취소하고 갈까? 어떻게 생각해.”
“와, 배신자 봐봐라. 야, 가. 가라고.”
비행부터 런던도착까지 조용히 지나갔던 것과 달리 영상 안 친구들은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활기찼다.
친구들과 같이 왔다면 더 재밌는 여행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각자 가고 싶은 곳이 다르고, 여름휴가는 일 년에 한번 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각자 이번 여름 휴가지는 재희는 런던, 우연은 뉴욕, 해수, 이채, 예솔은 방콕이었다.
출국일자도 제각각으로 재희만 어제 출국한 채였다.
“거기 지금 몇 시지? 저녁시간 아니야? 뭐 먹을거야?”
“글쎄, 아직 안정했는데. 찾던…”
“영국음식이 그렇게 맛없다던데.”
“피쉬앤칩스 있잖아. 피쉬앤칩스.”
“아니, 찾던 중 이라니까.”
“런던에 쉑쉑버거 있지 않아? 그거 먹어.”
“야, 런던까지 가서 무슨 쉑쉑버거야. 서울에도 있는데.”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영상통화를 걸어놓고도 자기들끼리 투덕거리느라 정작 통화는 뒷전인 모습이 자신의 친구들다웠다.
무슨 말을 한 건지 하나도 남지 않은 대화 속에서 다들 여행지에 도착해서 다시 연락하자며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시끌벅적하던 소리와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혼자만 남았다.
낯선 풍경,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이방인인 자신.
도착한 후 정신이 없던 탓에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갑자기 밀려들어왔다.
기분을 떨쳐내려 이어폰을 끼고,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