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안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기록용으로 가져온 조그마한 노트를 폈다.
노트 첫 장에는 여행 전 계획했던 일정과 숙소 이름, 비행기 시간 등이 적혀있었다.
별거 없는 다음날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빈 페이지를 찾아 노트를 넘겼다.
<런던 둘째 날.
오늘도 날씨가 좋다. 떠나기 3일전 온갖 날씨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비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절했던 그 때가 무색하게도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다.
전 세계적으로 기상청은 믿을 만한 게 못되는지도 모른다.
오늘 일정은 계획했다시피 뱅크역에서 잘생긴 수트 런더너 구경하기가 끝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오전에 이미 막을 내렸다.
성공여부는 글쎄…>
거침없이 써내려가던 일기 노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사람이 지나가나 싶어서 조금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 뭐야.’
짜증나는 마음을 누르며 창밖을 보니 창 문 앞에 붙어있는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HELLO.]
그리고 쪽지를 들고 있는 수트를 입은 남자.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서있는 저 남자 때문에 일기를 적고 있던 노트와, 테이블 전체에 그림자가 져있는 상태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 연두색과 녹색사이의 눈동자, 단정한 네이비색 수트와 하얀색 셔츠.
눈이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행동 없이 서있는 모습에 재희는 얼떨결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사해 달라는 건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다가 조심히 내린 재희는 그래도 미동이 없자 조금 무서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가 창에서 메모를 떼더니 이내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소가 땅으로 내려오는 햇살과 어울어져서 꿈결에 보는 것처럼 현실성이 떨어졌다.
남자는 거침없이 카페 안으로 향했고, 자신도 모르는 새 재희의 시선이 남자의 행동을 쫓아갔다.
테이크아웃 컵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해리는 긴장을 감추고 태연스레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리, 해리 애들러입니다.”
호감보다는 경계에 가까운 표정에 해리는 먼저 통성명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한재희에요. 제이(Jay)라고 불러주세요.”
재희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빛으로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회사원? 유학생?”
“*그냥, 여행 왔어요.”
“*오, 그렇군요. 이 근처에 유명한 명소가 있나요? 몇 년간 다니면서 본거라곤 칙칙한 건물과 회사원뿐인 것 같은데.”
해리는 최대한 호의를 담아서 말하며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뭘 보러 여기까지 온 거지? 생각하는 것이 표정과 행동에서 느껴졌다.
하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삶의 터전이고 일상이라면 새롭게 느껴지긴 힘들 터였다.
재희 역시 광화문 근처는 회사가 있는 곳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감흥도 없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자 해리는 맞은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
“*친구가 여기에 오면 근사한 수트 입은 런더너들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요.”
“*음, 그래서 그 말은 사실이었나요?”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한 쪽 다리를 꼬고 테이크아웃 컵을 쥔채 있는 모습이 마치 어디 광고에서 본 모습과 흡사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뭉뚱그린 말은 네가 그렇다. 라는 의미였지만 재희는 굳이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소 성의 없는 재희의 대답에 침묵이 테이블 위를 휘감고, 해리의 시선이 테이블에 펼쳐져있는 노트로 향했다.
눈으로 물어오는 시선에 재희는 웃으며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건 제 여행일기에요.”
궁금증이 어린 얼굴에 노트를 해리의 손에 순순히 넘겨주었다.
개인적인 감정, 감상들을 가감 없이 적어 남에게 보여주기 꺼려졌으나 상대방은 영국인이고, 한글을 알 리가 없으니 마음이 놓였다.
해리는 알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문장을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읽고, 넘겨보더니 재희에게 돌려주었다.
“*글씨가, 아름답네요.”
평생 악필로 놀림 받는 인생을 살아온 재희는 뜻밖의 칭찬에 얼굴을 조금 붉혔다.
“*감사합니다.”
마주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태연히 받아들였다. 처음 받아보는 칭찬에 구태여 진실을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뻔뻔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기록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쓰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
“*여행일기를 쓰게된 계기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머뭇거리는 말투로 애매하게 말을 끝내자 해리는 눈짓으로 재희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다 예전에 여행 갔던 이야기가 나왔어요.”
“*밤에요?”
“*네, 밤에요. 보통 술에 취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죠. 아무튼, 근데 서로 기억하는 게 조금씩 달라서 누가 맞는지를 한참을 싸웠어요.”
“*무슨 일로 그렇게까지?”
“*음, 말하기 좀 창피하니 안 말할래요.”
재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금 흔든 뒤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친구 5명이 같이 간 여행이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4명의 기억은 얼추 맞아 떨어지는데 1명의 기억이 조금 달랐어요.
그래서 조금 몰아붙이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억울했던지 다음 만날 때 여행당시 썻던 일기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결국 누명을 벗었네요.”
“*네, 뭐. 그렇게 된 거죠. 사과하고, 맛있는 거 사주고, 비위를 맞춰주면서요.”
조금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제희를 바라보며 해리는 그저 미소 지었다.
미소를 유지한 채 웃으라며 손으로 자신의 입 꼬리 근처를 톡톡 치는 손에 재희는 결국 웃음이 터졌고, 이내 둘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날 모여서 일기를 다 같이 읽으니 기억에서 잊혔던 일들이 다시 생각나기도 하고, 그 때 네가 이랬다며 투닥이기도 하고. 밤새서 이야기히고 싸우고 웃고, 떠들고. 재밌었어요.
“….”
“*그래서 친구들끼리 여행가면 꼭 일기를 써서 나중에 잊혀질 때 쯤 같이 보곤 해요.
여행가서 예민했던 일, 서운했던 일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좋았던 일, 재밌었던 일은 간직하게 되니까요.”
“*말을 들으니 떠나고 싶네요. 저는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요.”
해리의 고백에 재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빛이 너무 뚜렸한 감정을 담고 있어서 모른척하기 힘들었다.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요?”
“*음, 정정하죠. 영국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조금 신기하네요. 저는 쉬는 날만 생기면 나가려고 애쓰거든요. 그럼 여름휴가 때는 보통 뭐하면서 지내요?”
“*책도 읽고, 가끔 본가에도 갑니다.”
“*그렇구나.”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해 단숨에 사적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은 둘은 금세 다른 이야기 거리를 찾았다.
작게는 지금 마시고 있는 음료의 종류부터 크게는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꿈꾸는 미래까지.
때로는 진지해지기도 하고, 농담에서 농담으로 끝나기도 하며 진지한 이야기가 가볍게 끝나기도 했다.
즐거운 마음과 상관없이 테이블 위 올려놓은 손에 찬 시계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시간을 확인했다.
1시 40분. 회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계속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자리를 떠야했다.
하지만 이대로 만남을 끝내긴 싫었다.
한 때 여행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으로, 스쳐가는 인연으로 남기 싫었다.
“*오늘 저녁 같이 드실래요?”
해리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지며 눈동자가 조금 가려졌다.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과 달리 테이블에 올려둔 손은 조금 초조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재희는 뻔한 수작에 적당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여행에서 로맨스라… 나쁘지 않았다.
“*좋아요.”
해리는 재희의 노트를 자연스럽게 가져가 메모를 적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전화해요.”
노트를 향해 뻗은 손을 고의적으로, 그러나 우연인 것처럼 맞잡은 해리는 살짝 스치듯이 잡고는 이내 놔주었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공주님(your Highness).”
해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서 왼팔을 가슴에 대각선으로 올리며 경례했다.
여왕을 에스코트하는 기사를 본 딴 몸짓에 경건한 태도와 표정이 더해졌다.
재희는 유쾌하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네, 있다 뵙지요. 애들러경.”
재희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엄숙한 표정으로 해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내려가 있는 재희의 손을 살짝 들어 입을 맞춘 해리는 태연하게 손을 돌려놓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손등의 입맞춤은 욕망이나 정열보다는 고결하고 비장한 느낌이 강했다. 적어도 재희가 느끼는 바는 그랬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얼굴이 조금 붉어진 재희가 웃자 해리도 따라 웃음을 지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가볍게 포옹한 후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