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 더, 하실래요?”
식사가 자연스럽게 마무리 지어질 쯤 간결한 말투로 내던져진 한 문장.
태연한 말과 달리 손은 샴페인 잔을 부산스럽게 만지고 얼굴에는 긴장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잘 정제된 미소에 마주보고 웃어주며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늦었으며,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고, 이곳은 한국이 아닌 영국이다.
그러나… 식사는 맛있었고, 이야기는 즐거웠으며, 남자는 좋은 사람이다. 자신에게 단순한 호감 그 이상을 가지고 있는.
그러나.
그러나 뒤에 이어질 말이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어떠한 단점을 말한다고 해도 곧이어 따라붙을 그 말에 재희는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애초에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커다란 장식장 앞에 기다란 바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놓여 있는 스탠드 테이블. 깔끔한 내부는 서울에 하나쯤 있는 보통의 바와 비슷했다.
다만, 창문에 달려있는 붉은색 벨벳커튼과 진녹색 레이스가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는 와인, 위스키와 어우러져 와인을 뒤집어 씌워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몇 번 와본 곳인 듯 바텐더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해리는 재희를 왼쪽 벽으로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재희는 메뉴 선택을 전적으로 해리에게 넘겼다.
“*전 마시는 건 잘하지만 선택에는 영 재주가 없거든요.”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웃는 재희는 은은한 조명 밑에서도 환하게 빛이 났다.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없습니까?”
“*음… 너무 단 건 싫어요. 몇 모금 마시고나면 입이 얼얼해져서. 그리고 민트향도 싫어요. 치약 맛이 나서.”
재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취향을 용기 내어 고백하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사소하다고 비웃도 하고, 겨우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며 타박하기도 했으며, 진정한 술맛을 모른다며 비하하기도 했다.
인생에 술고래인 사람들과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양 극단의 사람들하고만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삶이란 그랬다.
아닌 척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해리는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떠한 말도 없이.
그런 모습에 감동이 차올라 잘 아는 지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뽀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리는 재희의 속사정을 모른 채 칵테일을 고르는데 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주문하기 직전, 재희는 화장을 고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잠시 실례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디 가냐며 붙잡는 손길에 말없이 화장실이 표시되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시선이 몸과 얼굴에서 떨어지고 해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손을 씻으며 머리 모양, 화장 상태, 옷매무새를 체크하고 투명한 핑크색 립스틱을 덧발랐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 상태면 양호하지.”
입 꼬리를 올렸다가,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가.
표정을 이리저리 바꾸던 재희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칵테일과 간단한 안주가 놓여있었다.
“*칵테일 이름은 핑크레이디. 연극 핑크레이디 주연배우에게 받쳐져 유명해진 술이죠.”
핑크레이디… 분홍빛 술에 몽실한 거품이 얹어져 있는 칵테일은 이름과 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이다.
“*첫 잔은 런던을 떠올리게 하는 술, 그리고 그렇게 달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으로 골라봤어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보니 자신과는 다른 칵테일이 해리 앞에 놓여있었다.
“*이건 뭐에요?”
“*러스티 네일. 스카치 위스키에 벌꿀과 허브가 들어간 칵테일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바꿔 마셔도 되나요?”
재희는 각각 앞에 놓인 잔을 바꾸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물론 대답은 더할 나위 없이 진중했지만.
“*장난이에요. 고마워요.”
재희는 눈을 찡긋거리며 잔을 집어 들었다.
런던을 왜 여행지로 정하게 되었냐는 물음에 재희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글쎄요… 해리포터 스튜디오?”
“*그것밖에 없습니까?”
“*솔직히…네.”
조금 머뭇거리다 순순히 자백하는 듯 한 재희의 대답에 해리는 조금 웃었다.
“*오기 전까지는 큰 매력을 못 느꼈거든요.”
식빵에 무화과 쨈, 치즈, 그리고 위에 앙증맞은 크기의 무화과 조각까지.
한입크기로 먹기 좋게 놓여있는 무화과 카나페는 입속에서 상큼 달달한 맛을 과시했다.
“*예를 들어 로마에는 콜로세움 등 유적지가 널려 있고 파리에는 에펠탑, 몽마르뜨, 오랑주리가 있죠. 근데 런던은…”
“*인상파 화가를 좋아하나 봅니다.”
“*네. 색감이 예뻐서 좋아해요. 밝은 그림을 좋아하거든요. 알록달록하고.”
“….”
“*특히 모네가 좋아요. 인상파 화가 중에 유독 화사하고 물먹은 색감이 매력적이라.”
재희는 그림을 떠올리는 듯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고 부유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저희아버지도 좋아하셨죠. 특히 모네를.”
“*정말요?”
해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장에 개인소장 작품이 몇 점 있습니다.”
모네 작품이? 별장에?
모네를 좋아해서 별장에 모조품을 모조리 모아놓기라도 한 걸까.
하긴, 이채의 거실에도 재희가 강제 집들이 선물로 주었던 양귀비 밭이 커다란 사이즈로 걸려있었다.
“*나중에 보러가요. 같이.”
나중에.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서 굴려보았다.
타워 브릿지가 열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후겠지. 별장에 같이 가는 건.
그 때까지 만남을 지속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데.
재희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삼키며 어떠한 대답도 없이 그저 술을 들이켰다.
두 번째는 클래식 마티니 두잔.
연한 녹색 빛 술에 올리브가 두어 개 잠긴 채 각각 앞에 놓여졌다.
첫잔은 다른 술, 두 번째 잔은 똑같은 술이라…
“*설마, 제가 바꿔먹는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대답은 짧은 시간에 돌아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살짝 피하는 해리를 보고 재희는 고개를 살짝 반대편으로 돌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웃지 말자, 웃지 말자.
“*믿을게요. 애들러씨.”
잔을 들어 해리 앞에 놓여있는 잔에 가볍게 부딪힌 후 한 모금 마셨다.
소금의 짠맛과 산뜻하며 씁쓸한 칵테일의 맛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간단한 칵테일 설명이 끝난 후 흐지부지되었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아무튼 런던엔 빅벤, 런던아이, 공원, 마켓뿐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휴가 내내 뭘 해야 하나 싶었죠.”
“*런더너 앞에서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닙니까.”
해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 나쁘거나 불쾌하다는 표정이 아니라 도리어 재밌어하는 표정이었다.
재희가 마티니에 잠겨있던 올리브를 입에 한 알 넣으며 웃었다.
“*지금이야 매력적인 도시죠. 여름 햇살 속 공원, 템즈강의 야경 그리고… 잘생긴 남자까지.”
칵테일 잔 끝을 검지로 매만지다가 이내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잔 끝에 리밍되어 있는 소금이 손길에 따라 손끝에서 뭉개지며 서걱거렸다.
말을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냥 한국에 오기 전에 생각이 그랬어요.”
태연하게 다시 마티니를 마시는 재희와 달리 해리는 방금 전까지 칵테일 잔과 손가락이 맞닿아있던 자리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출국하기 전까지 회사 일로, 또 한가해진 이후로는 여행을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여유가 없어서…”
칵테일 잔을 내려놓는 손, 손끝에 발라져 있는 옅은 살구색 매니큐어, 삼분에 일쯤 사라진 칵테일, 잔에 맺혀있는 물방울.
모든 것이 너무 선명했다.
“*듣고 있어요?”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손짓에 해리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재희를 쳐다보았다.
비스듬히 기울인 옆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기울어져 있는 머리 탓에 오른쪽 얼굴을 거의 덮고 있었다.
‘넘겨줘도 될까.’
해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었다. 생각과 동시에 손이 움직였다.
귀 뒤를 자나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간 손은 금속으로 되어있는 침을 건드리고도 떼어지지 않았다.
손길을 따라 귀 밑으로 늘어져있는 진주가 중심인 장식이 흔들렸다.
‘손끝에 심장이 달린 것 같아.’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재희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대로 자세가 굳어버렸다. 애꿎은 냅킨이 재희의 손끝에서 조각조각 찢어졌다.
‘어떡해. 너무 떨리잖아.’
영원 같았던 시간이 지나가고 방해인지 구원인지 모를 세 번째 잔이 도착했다.
세 번째 잔은 맨하탄과 블랙러시안.
앞에 놓인 검붉은 칵테일이 꼭 자신의 얼굴을 대변해주는 기분이었다.
잠시 열을 식히려 두 손으로 가볍게 양 뺨을 감싸 쥐고 팔꿈치를 바 위에 올려놓았다.
식을 줄 모르는 따끈한 볼에 손을 떼고 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조명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분위기는 오늘 어떤 때보다도 어색해져 두 사람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칵테일만 들이켰다.
대화가 사라지자 소음으로만 느껴졌던 재즈음악이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please, please hold my hand.”
애절한 목소리의 가사와 함께 해리의 손가락이 재희의 손끝에 닿았다.
검지에서 시작해 타고 내려온 손은 손가락과 손등의 사이 동그란 뼈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정복욕이 넘치는 왕처럼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으로 영역은 부지런히 넓어져 갔다.
손등 위로 깍지 끼어진 손은 손 안쪽까지 파고들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재희의 오른쪽 손이 마침내 완전히 함락되었다.
위험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그 감각에 재희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밤은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