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는 차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대지도 못한 채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잡고 꼼지락대었다.
차 뒷좌석에 벽이라도 세워놓은 것처럼 가운데는 비워놓고 왼편엔 재희, 오른편엔 해리가 앉은 채였다.
차안, 작게 틀어져있는 음악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조금만 숨을 크게 내쉬어도 소리가 크게 퍼질 것 같아 재희는 꼼짝도 못한채 숨소리도 죽이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시선 한자락도 줄 수가 없어 고개를 완전히 왼쪽으로 돌린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았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빅벤, 런던아이. 사진에서 보았던 건물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해리는 호텔에 가는 길 내내 틈틈이 왼편을 바라보았지만 재희의 몸은 한껏 긴장한 채 고개가 돌아가 있어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재희가 열심히 창밖만 바라보는 사리 해리는 운전기사와 눈빛과 입 모양으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10여분이 지나자 불편했는지 고개는 다시 정면을 향했지만 꼿꼿이 세우고 있는 허리는 그대로였다.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투명한 창을 톡톡 두드렸다.
빨간불에 차가 멈춰 서자 해리는 한숨을 나지막하게 쉬며 재희의 어깨에 손을 조심히 올렸다.
“*편하게 있어요.”
“….”
“*나쁜 짓은 안 할 테니.”
해리가 입 꼬리를 당겨 웃었지만 재희는 농담으로 한 말에도 웃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해리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은 긴장감 때문에 빳빳이 굳어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조심스레 몸을 뒤로 눕혀 차 시트에 등을 붙이고 기대어 앉았다.
가죽으로 된 시트가 몸을 감싸며 긴장으로 지친 몸을 달래주었다.
음악의 볼륨이 조금 더 커지고 시야가 넓어지자 무릎위에서 까딱거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태연해 보이는 모습에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그러나 깊게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방향제로 놓아둔 라벤더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호텔까지 500m쯤 남았을까. 택시가 길에 세워지고 해리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내렸다.
내려야 하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앉아있던 재희는 문이 열리고 틈 사이로 해리의 몸과 내밀어진 손이 보이자 안심했다.
“*잠시, 걸을까요?”
예의바르게 내밀어진 손. 그 손을 잡고 말없이 차 밖을 나섰다.
호텔이 멀리서 보이고, 둘은 발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늦은 밤, 해가 진 후 런던 거리는 낮과 다르게 조금 한적하고 쌀쌀했다.
애초에 이렇게 밤늦게까지 밖에 있을 생각이 없던 재희는 긴 원피스만 달랑 걸친 채였다.
불어오는 찬바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고 해리는 자연스럽게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날씨를 생각을 못했군요. 미안합니다.”
미안함과 걱정이 뒤섞여있는 눈빛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재킷을 걸친 채 걸었다.
몇 걸음 걷자 자연스럽게 발이 맞춰지고 손등이 조금씩 스쳤다.
처음에는 손등이, 그다음엔 손가락이, 이내 손을 마주 잡고 깍지를 낀 채 걸었다.
단단한 해리의 손의, 말랑한 재희의 손의 온기가 느껴졌다.
마주잡은 손이 앞뒤로 작게 흔들리고 조심히 흔들리던 팔이 점점 크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90도 가까이 팔이 올라가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재킷이 자리를 잃고 이탈했다.
“어.”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옷을 간신히 붙잡은 재희는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앞으로 숙인채 한참이나 웃다가 재킷을 몸에 다시 걸치며 양팔을 넣어 완전히 입었다.
긴 소매가 손을 완전히 가려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꼼꼼히 소매를 두어 번 접어올린 재희는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자, 다시 잡아요.”
해리는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전보다 아주 조금 느리게.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늦춰지고, 늦춰진 속도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호텔에 둘은 마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재희는 활짝 웃으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눈이 안보이도록 휘어진 눈매가, 광대가 올라간 두 볼이, 치아가 살짝 보이는 입이 사랑스러웠다.
손을 얌전히 앞에 둔 채 서있는 재희를 가만히 응시하던 해리는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의미인가요?”
적당히 벌어져 있던 거리가 줄어들고 둘 사이에는 세 걸음 정도의 공간이 남았다.
“*허락해주신다면.”
한 걸음 더.
“*내일도.”
“….”
“*모레도.”
“….”
“*언제나.”
다시 한걸음 더.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둘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마주섰다.
해리는 재희의 손을 올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손을 잡았을 때와 다른 뜨거운 온기에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재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대답에 해리는 손을 내려놓고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려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가 나는 짧은 버드 키스.
짧은 접촉에 재희의 놀란 표정을 보고 해리는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다시금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다시, 또 다시.
끊임없이 이어지는 키스에 재희는 결국 눈을 감았다.
동그랗게 드러나 있는 이마, 눈두덩에 곱게 반짝이는 오렌지 빛 색,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속눈썹, 발갛게 물들어있는 양 뺨과, 분홍빛을 띄고 있는 입술.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고개를 조금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문자그대로의 긴 입맞춤 끝에 조심스럽게 입술이 벌어지고 조심스레 입안으로 혀가 침범했다.
수줍어하는 재희의 혀를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부드럽게 감싸기도 하며 혀가 얽혀들고 때로는 여린 입안을 갉작였다.
턱을 들어 올렸던 손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받치고 한손은 허리를 감찬 채로 둘의 몸은 점점 더 밀착되었다.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하며 노력하는데도 호흡이 점점 가빠져왔다.
방어하듯이 가슴 앞에 있던 재희의 손은 해리의 어깨와 팔 사이로 어느새 옮겨졌다.
입속을 부드럽게 탐닉하는 혀, 손으로 잡은 팔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냄새.
재희는 아득해져가는 정신을 잡으려 노력했다. 이대로 가다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장난치듯 입술을 깨무는 간지러운 촉감에 재희는 입술을 맞댄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
달 뜬 숨이 웃음을 끊어지게 만들었다.
입술이 잠시 떨어진 사이 재희는 해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웃었다.
해리는 가쁘게 올라오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사이 조금 떨어진 재희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귓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귓가를 만지던 손길은 목선을 타고 내려와 쇄골을 손끝으로 약하게 쓸었다.
그 손길에 웃음이 잦아들고 열감이 다시 올라왔다.
웃음이 잦아들자마자 키스가 시작되었다.
웃은 이유가 이 순간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필요 없었다.
조금 전의 키스보다 조금 더 격렬하고 조금 더 아찔해졌다.
얽혀드는 혀가, 마주 안은 두 몸이 그 증거였다.
재희는 좀 더 편하게, 좀 더 밀착될 수 있게 손으로 해리의 목을 휘감았고, 해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지탱하며 손으로 재희의 허리를 휘감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이 이어졌던 격정적인 키스는 다시 잦아들고 가벼운 버드키스로 변했다.
몇 차례의 짧은 키스 후에도 입을 맞대고 한참을 서 있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아직도 열기에 가득 찬 눈동자를 하고 담백한 말투로 말했다.
“*잘 자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굿나잇 키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키스를 받은 재희는 얼굴을 마주본 채 말했다.
“*잘 자요.”
가볍게 발을 들어 입에 굿나잇 키스.
예상치 못한 행동에 해리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풀어졌다.
이내 정신을 차린 해리는 웃고 있는 재희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품안에 안긴 재희가 꾸물꾸물 편한 자세를 찾아갔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에 해리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연락해요.”
남자는 꼭 멀리 가는 사람처럼, 오래 못 볼 사람처럼 애틋하게 말했다.
손을 흔들며 끝난 마지막 인사 후에도 해리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재희는 해리의 몸을 돌려 세운 후 가볍게 떠밀었다.
떠미는 대로 순순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해리의 모습이 멀어져 점이되도록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재킷은 아직도 재희의 어깨에 걸쳐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