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손만 밖으로 뻗어 침대 맡을 더듬거렸다.
‘핸드폰이 어디 있지.’
몽롱한 정신 속에서 핸드폰이 손에 잡히자 그대로 이불속으로 손을 가져왔다.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반쯤 들어 올린채로 시간만 확인 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오전 10시 34분.
출근시간으로 생각한다면 지각이었고, 주말로 생각한다면 아직 새벽이었다.
그리고 혼자만의 여행에서 아침은 이불 속에서 헤매는 행복한 시간이다.
한 번 깨버린 잠을 다시 청하기 위해 눈을 감은 재희는 이불 속에 파묻혀 찬찬히 어제 일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 카페, 저녁, 칵테일, 그리고 키스.
키스?
다시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일어났어요?]
화면에 문자가 보이고 어제 주고받은 짤막한 문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구나.
비현실성이 다분한 첫 만남부터, 저녁식사, 술자리 그리고 헤어짐이었기에 문자가 없었다면 굉장히 생생한 꿈이었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쥐고 잠에 다시 빠져 드려는 순간.
[:)]
화면이 다시금 밝혀지며 웃는 이모티콘이 도착했다.
그저 이모티콘 하나였을 뿐인데도 앞 문자와 상당한 시간을 두고 보낸 것에서 너무 사무적이여 보이지는 않을까, 어떤 이모티콘이 나을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재희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웃으며 자판을 톡톡 두드렸다.
[*네. 일어났어요. 아직 침대이긴 하지만.]
보낼 문자를 한참이나 보다가 이모티콘 하나를 덧붙여 전송했다.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그 느낌을 만끽하며 이불속에서 발을 구르고 난리를 치던 재희는 기지개를 한번 켠 후 이불 밖을 나섰다.
방금까지 몰려오던 잠은 어디로 갔는지.
다시 자기는 글렀으니 차라리 나가 공원에라도 누워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음, 음, 음.”
침대 근처에 널브러져있던 슬리퍼를 신고 허밍으로 제목 모를 노래를 부르며 욕실으로 향했다.
톤 다운된 핑크빛의 아이섀도와 영롱한 펄이 들어간 섀도를 바르고, 코랄빛 블러셔를 은은하게 바른 후 색을 맞추어 립스틱도 코랄색으로 발랐다.
요즘 푹 빠져있는 트로피컬팝으로만 구성되어있는 재생 목록을 틀어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한 화장은 신난 기분만큼 만족스러웠다.
새초롬하게 뺀 브라운 아이라이너와 잘 컬링된 속눈썹 위로 인조속눈썹을 붙이며 필요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빼지 못하고 짐을 싸서 가져온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화장을 마치고 옷장 앞에 선 재희는 챙겨온 다섯 벌 중 무엇을 입을지 한창 고민 중이었다.
연분홍 홀터넥 원피스 또는 노란색 나시와 연한 청반바지.
몸에 대어보기도 하고, 직접 번갈아 입어보기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렇게 고민을 반복하던 중 결국 자꾸 눈에 밟히는 원피스로 확정을 지었다.
금빛 나뭇잎 귀걸이를 하고 짐을 간단히 챙기는 것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재희는 문 근처에 있는 전신거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입모양으로 거울 속 자신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고 호텔 방을 나섰다.
햇빛이 찬란한 점심.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간단하게 주문했다.
아메리카노와 에그 베네딕트.
음식이 나올 때까지 뭘 할까.
턱을 괴고 환한 햇살을 즐기며 활기차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혼자 혹은 둘 혹은 무리지어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점차 흥미를 잃어갈 때 쯤 일기장을 꺼낸 재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펜을 꺼내들었다.
어제 공원 후의 일부터 차례대로 감상평을 마음대로 덧붙여가며 기록해나갔다.
<…
밤은 쌀쌀했지만 노란 불빛의 가로등 아래 산책은 모든 것을 잊을만큼 로맨틱했다.
그렇게 호텔 앞에 도착 후 이어진 키스.
첫 만남에 키스라니!!!>
키스부분에서 수많은 느낌표를 만들어내면서도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 빼고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유지하려 애썼다.
분명히 아침에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설렘뿐 이렇게 격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기록하기 위해서 어제 밤의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심장이 요동치며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웠다.
일기장 바로 위에 놓인 핸드폰이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확인하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한눈에 보이는 내용에 결국 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얼굴과 동시에 가릴 수 없는 귀 끝이 터질 것 같이 붉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다시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내가 20살도 아니고 첫 만남에 키스로 이렇게 난리칠 나이는 아니지.
다만, 다만… 모르겠다.
이렇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강렬했던 키스는 정신에 해롭다는 것만 알겠다.
아, 오늘 저녁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아니, 오늘 만나기는 하는 걸까?
남자의 태도로 봤을 때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
일기를 적을수록 생각은 비관적으로 흘러갔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펜을 내려놓고 앞에 놓여있는 에그베네딕트를 작게 썰어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방금 전까지 설렜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의심만 남았다.
입을 삐쭉하게 내밀고 아까 보내지 못했던 문자의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탁, 탁탁, 탁.
자판을 치는 손길이 재희의 기분을 대변해 주었다.
회의 중, 문자를 받고 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레 중단된 회의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만 보고 있는 해리 때문에 계속되지 못했다.
영문도 모른 채 침묵 속에서 팀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그래도 가장 친한 마크에게 손짓과 눈짓을 보냈지만 마크는 그저 고개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한창 발표 중이었던 사무엘은 A사의 동향 그래프를 띄워 놓은 채 안절부절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뭐 들은 거 있는 사람 없어?]
[*해리가 저 정도 표정이면 큰일난거 아니야?]
[*설마 발표 중단?]
[*C사 주가 폭락한건 아니겠지?]
은밀하게 뒤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팀원들 가운데 해리만 미동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의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중 울린 진동.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며 미간을 좁히는 해리.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표정에 영문을 모르는 팀원들의 표정은 점점 불안함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점점 모두의 상상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 해리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 마지 못하는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해리의 얼굴로 집중되어 있던 시선은 눈이 마주친 순간 일제히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회의, 계속 진행하시죠.”
누구든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
분명한 표정에 순조롭게 진행되던 회의는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그래프를 보시면, 2분기 A사의 상승세는 B사와의 인수 합병을 기반으로…”
“*인수합병 보고서는 어디 있습니까?”
“….”
“*발표내용에 들어가 있는 기본 자료도 첨부 안합니까?”
“*죄송합니다.”
맞는 말에 사무엘은 반박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같이 진행되었으면 A사 동향파악 그래프 뒤에 인수합병 보고서를 추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도로 끝날 발표였다.
딱 그 정도의 실수.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저 해리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히 앉아만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료를 열심히 들춰보기 시작했다.
‘오늘 걸리면 죽음이다.’
사무엘 후의 순서로 배정되어 있는 팀원들은 일제히 울상을 지었다.
발표가 이어지고 해리는 의자에 한껏 기대고 앉아 성의 없이, 그러나 꼼꼼한 눈빛으로 발표 자료를 넘겼다.
모두들 긴장 속에 숨을 죽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핸드폰만 들고 자리를 뜬 해리는 복도 끝에 기대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기 전 통화음이 울리는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제이, 통화 괜찮아요?”
-*이미 걸었잖아요.
재희의 툴툴거리는 말투에도 해리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네요.”
-*뭐가요?
“*내가 싫은 게 아니라 그저 화났을 뿐이라는 거요.”
-*아니에요.
말투가 단숨에 순해지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화난 것 아니에요.
“*네, 그래요.”
해리는 대답을 하며 몸에 힘을 빼고 벽에 편하게 기대며 핸드폰의 볼륨을 조금 높였다.
-*정말로 아니에요.
“*네, 알았어요. 아침은 먹었어요?”
-….
“*제이?”
-*당신 정말…나빠요.
“*미안해요.”
-*뭐가요?
“*당신을 화나게 한 행동, 말투 전부 다요.”
-*당신 자체가 화나게 한다면요?
“*그건 좀 아프네요.”
-*…미안해요. 심술이었어요.
“*네, 알아요. 괜찮아요.”
잠시 수화기 너머에 침묵이 흘렀다.
불편하지 않은 고요함에 해리는 기꺼이 침묵을 지켰다.
-*…업무시간 아니에요?
길지 않았던 침묵이 끝나고 재희의 말에 해리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 늦었다.’
전화를 끊고 이동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핸드폰을 붙잡고 서서만 있었다.
“*네 맞아요. 그리고… 미팅시간에 늦었군요.”
-어서가 봐요. 괜히 전화가 길어졌네요.
“*아니에요. 좋았어요.”
-*얼른요.
“*네. 문자할게요.”
끊어져버린 통화.
뚫어져라 쳐다보면 전화가 다시 오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리는 시계를 다시 확인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