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지도 않는 심술을 부린 사람의 최후란.
멋대로 요동치는 감정에 밑도 끝도 없이 모난 말을 내뱉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리고 그걸 어떤 질문도 없이 받아준 건 해리였다.
‘나를 화나게 한 행동, 말투 전부 다 잘못했다고 말할 건 뭐야. 차라리 화를 내지.’
‘아니, 내가 화났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른다고 한말에 그렇게 단정 지을 필요가 있나?’
‘그래… 말투가 그냥 말투가 아니었지.’
생각이 이어지며 테이블에 놓여있는 죄 없는 에그 베네딕트가 칼에 의해 조각조각 해체되었다.
‘괜히 전화까지 하게 해서 회의 시간에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심술부리지 말걸…’
뒤늦은 양심이 재희를 은근하게 괴롭혔다.
“어떡해.”
신입사원 때 스케줄이 꼬여 이전 미팅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미팅이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미팅이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 때의 아찔함이란.
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끊임없이 울리던 전화와 문자, 받을 수도 없고 안받을 수도 없던 자신.
그 관경이 생생히 떠올라 작게 몸서리를 쳤다.
검지 끝을 잘근잘근 물며 어떡하지. 만 반복하던 재희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핸드폰을 쥐었다.
[*심술 부려서 미안해요. ㅜㅜ]
[*이건 우는 표시에요. ㅜㅜ]
남아 있는 선택지란 결국 사과뿐이다.
의도치 않게 반도 못 먹은 식사를 끝내고 지도를 한걸음 걸을 때마다 확인하며 부지런히 테이트모던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첫 번째 행선지로 향하던 길에 손으로 잘 못 눌러 알게 된 위쪽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글로브.
이를 보고 단숨에 경로를 변경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이렇게 딴 길로 새기 쉽다.
둘째 날의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관광지에 도착한 재희는 생존신고를 위해 원형 극장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고 그대로 전송했다.
잘 찍혔든 못 찍혔든 귀찮아 한 장만 찍고 그만두는 버릇은 해가 가도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오~ 오후에 첫 번째 장소네. 재희야 죽고 싶어?^^]
[여기 어디야? 완전 유럽 같네.]
[유럽 같은게 아니라 그냥 유럽이겠지. 바보 서우연.]
[딸, 예쁘네. 얼굴 나온 사진도 좀 보내줘.]
[누나. 내 기념품은?]
[재희씨 영국 날씨 좋아요? 여긴 완전 하루 종일 비에요. 태풍이 오려나 봐요.]
[오, 유럽! 저는 열심히 서핑 배우는 중! 온몸이 다 아파요.]
한 장의 사진에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여행 기간이라 그런지 활발한 연락에 단어선택을 적절히 조정해 가며 답장을 시작했다.
친구들에게는 [혜수가 없는 여행은 역시 오후부터 출발이 제 맛. 여기 셰익스피어 글로브~ 바보 서우연.]
가족에게는 [숙소 가서 사진 더 보내줄게. 어차피 몇 장 없지만. 한재준 네 선물은 없다. 내 아이스크림 훔쳐 먹고도 그 말이 나와?]
직장동료에게는 [여긴 화창해요! 아이고, 비와서 어떻게 해요… 서핑! 재밌겠다.]
열심히 답장을 하고 있던 때, 마지막 문자가 도착했다.
[Love looks not with the eyes, but with the mind.]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한 해리의 문자에 재희도 그대로 문장을 인용해 답장을 보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보내고 나니 동문서답 속에 미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대답이 웃겨서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테이트 모던에 입성하자마자 이게, 아닌데? 라는 마음이 강하게 든 재희는 바로 인터넷을 켜서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은 런던, 인상파화가 미술관.
그리고 주르륵 나오는 미술관 중 테이트 모던은 어디에도 없었다.
검색에 제일 자주 보이는 건 코톨드 갤러리.
검색어를 지우고 코톨드 갤러리를 넣어 다시 검색해보자 바로 정보가 나왔다.
마네, 모네, 고흐 등 유명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갤러리.
‘정말이지. 검색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
심지어 코톨드 갤러리가 호텔에서 좀 더 가까웠다.
‘시간 아까워. 그리고 귀찮아.’
두 가지 이유만으로 머리에 물음표만 띄운 채로 작품을 감상했다.
그리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집중력이 바닥을 보일 때 쯤 울리는 진동.
[*지금은 어디에요?]
문장이나 단어 대신 앨범에서 들어오기 전 찍어두었던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답장을 보낸 후에도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고개를 왼편으로 기울였다가, 오른편으로 기울였다가 반복하며 애써 작품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테이트 모던이네요.]
도착한 답장을 핑계로 감상을 멈춘 재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네. 근데 별로 재미없어요. :( ]
[*코톨드 갤러리로 넘어갈까 봐요.]
[*온지 20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반은 돈 것 같아요.]
비록 문자에는 시무룩함이 묻어나더라도.
[*코톨드 갤러리가 제이 취향에 더 적합해 보이네요.]
[*그렇죠. 내가 왜 여길 온 거지.]
이어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송했다.
작품을 보고 있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후 핸드폰을 돌려받았을 때 누구보다 솔직한 태도로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웃겼던지.
‘이렇게라도 쓰여서 다행이네.’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을 보내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귀찮아서 그냥 놔두었던 사진은 해리에게만 보내졌다.
그렇게 관람용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연락만 주고받던 재희는 결국 한 시간도 안 되서 테이트 모던을 한 바퀴 돈 후 밖으로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버로우 마켓.
마켓을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각종 유럽 나라들의 음식, 빵들, 크로넛, 터키쉬 젤리들이 한가득 반겨주었다.
물론 각종 과일들과 야채, 꽃들도 있었지만 재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디저트, 음식 결국 먹을 것으로 칭해지는 것들뿐이었다.
점심은 한참 지났고 저녁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은 애매한 때.
‘왜 지금 여기를 와 가지고.’
해리와 저녁식사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구경만 하던 재희는 결국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스페인 음식을 파는 곳에서 샹그리아를 한 잔 마셨다.
‘빠에야… 내 빠에야… 행복해야 해.’
빠에야와 마음속으로 이별을 마친 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안에는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음식에 둘러쌓여 있으니 먹고싶은 마음만 커져 생각보다 일찍 마켓을 벗어나게 되었다.
쫓기듯이 나온 마켓 주변에 익숙한 빌딩,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도착한 문자에 재희는 사진을 한 장 찍어 전송했다.
[*어제 갔던 곳 근처에 왔어요, 버로우 마켓이 이 근처라니. 공원에서 적당히 놀고 어제 가볼 걸 그랬어요.
아쉬움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문자에 해리는 웃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혼자 다시 가니 감회가 어때요?]
답장이 도착하기까지 1초, 2초, 3초, 4초, 5초.
[*당신이 보고 싶어요.]
펜이 툭하고 서류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장 경사를 타고 내려가 책상 밑으로 하강해 마크자리까지 굴러갔다.
마크가 떨어진 펜을 주워들고 자리에 오는 줄도 모르고 해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착한 문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해리. 정신 차려. 야, 해리 지금 맛 갔다. 봐봐.”
마크는 기회주의자였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재빠르게 사진으로 남겼다.
마크의 난동으로 겨우 정신을 다잡은 해리는 단호하게 제자리로 쫓아 보내고 조심히 핸드폰을 쥐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다시 보고, 또 다시 봐도 그대로인 문자에 입을 열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더 깊이 다가오는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어떤 단어로, 어떤 문장으로 이 말에 답장을 할 수 있을까.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새로운 문자가 도착하고, 답장할 기회를 놓쳤다.
아쉬움도 잠시, 다른 주제로 완전히 넘어간 문자에 해리는 빠르게 답장을 시작했다.
*
“*해리.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우리끼리 간단하게 먹고 맥주 한잔 하러 갈 건데.”
모처럼 다 같이 일찍 퇴근하는 날 마크가 의자 등받이를 잡고 물어봤다.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던 해리는 들은 척도 안하며 손을 내저었다.
“*핸드폰 확인은 칼같이 하면서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는 것 봐. 정말 서러워서.”
서러운 것치고 정말 또박또박 말을 내뱉으며 해리 자리를 서성이던 마크는 결국 시선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 시선이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 저녁. 못 먹게 만들어줘?”
고작 꺼져. 정도를 예상했던 마크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살벌한 말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연애하더니 더 살벌해진 것 같아. 잘 되고 있는 거 맞아?’
물론 속에 있는 말을 했다간 바로 서류 폭탄을 맞을 것이라는 분별은 있었다.
“*알았어. 간다고, 가. 데이트 잘해라.”
상투적인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 마크는 혹여나 뒤에서 자신을 잡는 말이 들려오지 않을까 두려워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어떻게 됐어?”
엘리베이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이 마크에게 보나마나한 질문을 던졌다.
마크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제일 먼저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