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마무리되어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재킷의 안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해리는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끊임없이 울리기에 전화인 줄 알았더니 화면 속에 사진들이 나란히 도착해 있었다.
사진을 차근차근 보면서 걸어가자 회의에 같이 참석한 유진이 어깨너머에서 훔쳐보고는 제이야? 라며 물어왔다.
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희. 한국이름이 재희래. 라고 하지 않던 사적인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재희. 라고 발음하고 싶었겠지만, 해리 입에서 나온 단어는 제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제이라고 소개했는지 알 것 같군.’
유진이 어제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재희의 이름과 방금 전의 해리의 발음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돌아가면 바로 제품 런칭 준비해야 해서 바쁘다고 하던데. 그리고 사는 집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곧 옮긴다고 하더라. 또…”
“*언제 그런 얘기를 했어?”
재희에 대해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마구 쏟아지자 해리는 인상을 찌푸리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자리 비웠을 때.”
깔끔한 대답에 해리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자정 무렵 자리가 파하기 전,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자신이 있는데도 할 말과 못할 말 구분을 못 하는 사람들인데, 자신이 없다면 재희에게 어떤 말을 할지.
결코 좋지 못할 상황에 한 번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런데 그 잠깐, 그사이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니.
유진에게 한 이야기도 재희가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에 지나지 않겠지만 자신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유진과 했다는 게 서운했다.
같은 국적의 사람을 여행 중에 만났으니 반갑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했는데, 봐봐.”
유진이 보여준 핸드폰 안에는 자신이 읽지 못하는 언어인 한국어로 나눈 대화들이 가득했다.
“*재희 말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네가 보여준 것을 어떻게 순순히 믿냐. 자신이 읽을 수 없으니 믿을 수 없다.
함축적인 의미가 너무나 잘 전달되었다.
해리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와, 이 정도면 중증이네.”
만난 지 삼 일째인 거 맞아? 유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가로지르던 해리는 발걸음이 늦춰져 거리가 살짝 벌어진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했는데?”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궁금하기는 했는지 무심한 말투를 한번 두르고, 표정으로 두 번 두른 채 지나가는 목소리로 묻는 물음.
유진은 그런 해리의 의도가 뻔히 보여 픽-하고 웃었다.
‘연애하더니 사람 다 됐네.’
얼마 전만 해도 해리가 자신과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연애 전 해리가 감정이 과연 존재할까. 싶은 비인간적인 존재였다면 지금은 그저 일 잘하고 똑똑한 보통 사람 같이 느껴졌다.
유진은 자신보다 머리가 반이나 더 솟아 있는 해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업무를 끝낸 해리는 약속 시간 10분 전, 트라팔가 광장 분수대 앞에서 재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진과 문자에서 이미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사들였는지 알게 된 해리는 재희의 호텔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밥을 먹고, 술 한잔을 한 후 어제보다 조금 이르게 헤어지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장소가 이쪽인 것은 어제 직장 근처 식당에서 식사 도중 팀원들을 만난 것도 한 몫 차지했다.
물을 뿜어내는 분수대와 곧게 뻗어있는 탑, 근처에 보이는 내셔널 갤러리와 공연을 펼치는 행위 예술가들.
그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해리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알록달록한 목도리를 두른 채 저 멀리서 걸어오는 재희를 발견했다.
사람들과 뒤섞여 언더그라운드에서 나왔는데도 머리 위로 조명을 환하게 켜놓은 것처럼 단번에 눈에 띄었다.
온종일 문자로 해리포터 스튜디오의 멋짐과 굉장함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해리는 입고 있는 옷이 단번에 그곳에서 산 것임을 알아차렸다.
지금 기온은 32도. 자세히 보니 망토 안에 스웨터도 입고 있는 모양새였다. 늦가을에나 입을법한 옷차림에 덥지는 않은지 조금 걱정되었다.
걱정에 미간이 좁혀지며 입이 가로로 길고 굳게 다물어진 것도 잠시였다.
손에 큰 쇼핑백을 들고 달랑이며 걸어오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들떠 보여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발견했는지 팔을 벌리며 뛰듯이 걸어온 재희를 마주 안아주며 그대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조심히 몸을 내려놓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자 재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잘 보고 왔어요?”
“*네! 완전 재밌었어요. 딱 들어서는데 꾸며 있는 세트장이 너무 실제 같아서 제가 막 마법사가 된 것 같고…”
흥분했는지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말이 나왔지만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빗자루 옆에 서서 업! 업! 이라고 외치니까 빗자루가 이렇게 올라오는 거 있죠.”
재희가 오늘 봤던 것을 한껏 자랑하는 사이 해리는 묵묵히 귀를 기울이며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으로 옮겼다.
재희는 가벼워진 손에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자유로워진 손을 가지고 손짓을 섞어 말을 이었다.
“*…그래서 9와 4분의 3 승강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살짝 짐을 밀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고…”
걷는 속도가 이야기에 맞추어 느려졌다, 빨라졌다가 하는 등 제멋대로였다.
퇴근 인파와 저녁을 먹으려 혹은 다음 일정을 위해 움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재희가 혹여 누구에게 부딪히지 않을까 주시하며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이것도 샀어요. 어, 어디 갔지. 내 쇼핑백.”
오늘 산 지팡이를 자랑하려던 재희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지 않은 쇼핑백에 당황하며 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안돼. 내 지팡이, 내 모자, 내 먹을 거….”
뒤돌아서서 오던 길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던 재희는 해리를 돌아보며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말하려던 순간 해리의 손에서 자신의 쇼핑백을 발견했다.
“*어, 저거 내 건데.”
“*참 일찍 발견했네요. 뭐 꺼내줄까요?”
해리가 쇼핑백을 살짝 벌리며 물어보자 조금 멍한 표정으로 해리와 쇼핑백을 번갈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마치 그게 어떻게 내 손에서 저쪽으로 옮겨갔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 보여줄게요.”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둘은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재희는 기분이 좋은지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제와 똑같은 허밍이 흘러나왔다.
무슨 노래냐고 묻는 말에 재희는 수줍게 얼굴을 조금 붉혔다.
“*음…한국노래인데… 제가 부르는 음이랑 많이 다를 거예요, 아마. 들어볼래요?”
잠시 멈추고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연결한 후 한쪽을 내밀었다.
순순히 받아들며 나란하게 서서 왼쪽, 오른쪽을 나눠 끼고 걸었다.
산뜻하고 발랄한 재희의 허밍과 달리 왼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보다 끈적하고 우울했다.
왼쪽 귀에는 노래가, 오른쪽 귀에는 재희의 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재희 말대로 허밍과 노래는 아주 달랐다.
재희의 허밍이 훨씬 좋았다.
자유로운 손으로 이어폰을 살짝 빼낸 해리는 재희의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노래를 들으니 가사가 생각나는지 허밍 위에 가사가 덧입혀졌다.
손을 잡은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재희는 거리를 구경하느라 옆쪽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걸어가며 건물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편리할 거로 생각했던 차가 그저 이동할 때 챙겨야 할 또 다른 짐이라고 생각되자 해리는 미련 없이 차를 두고 출근했다.
운전하느라 쳐다보지 못했던 시간 만큼 재희의 얼굴을 볼 시간이 늘었으니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새로운 노래로 바뀌었는지 재희의 노랫소리도 바뀌었다.
슬픈 음에서 신나는 음으로, 산뜻한 음에서 짙은 감정이 담긴 음으로.
얼마나 노래가 바뀌었을까.
한참을 노래만 부르며 걷던 재희는 이어폰을 살짝 빼며 해리에게 물었다.
“*저 건물은 뭐에요?”
어제부터 지나가다 예쁜 건물이 보이면 재희는 곧잘 어떤 건물인지 물어왔다.
거의 평생을 보고 지나친 건물임에도 해리는 솔직히 무슨 건물인지도, 왜 세워졌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순전히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걷다가 단순한 궁금증으로 물어오는 재희 때문이었다.
어제 그렇게 설명할 기회를 놓치고 나서 오늘 식당까지 이동하는 경로를 보고 관심이 있어 할만한 건물을 추려 공부했다.
저 건물은 분명 어제 봤던 것 중 하나였다.
잠들지 않고 인터넷을 열심히 뒤적거렸던 어제의 자신에게 칭찬을 보냈다.
건물을 짓게 된 배경부터, 그 시대의 역사, 건축과정과 세월이 지나며 변한 쓰임새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재희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는 이야기에 한마디 보태며 주제가 삼천포로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역에서 10분 거리를 헤매지 않고도 30분이 걸려 도착하는 기적을 보인 둘은 마침내 가고자 했던 식당 앞에 멈추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