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에 병실에서 그 남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난 오전 아홉시 십오 분, 난 역 옆에 위치한 제법 큰 공원 앞에 서있었다. 아직도 구경꾼들이 많다. 아니, 지금 있는 사람들은 온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 물론 공원에서 시신이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여기가 내전 중인 아프리카도 아니고, 치한 율 높은 한국이다. 한국에서 시신이 아주 않나오는 건 아니지만 공원에서 갑자기 시신이 나오다는 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경찰이 주변에 출입을 제제하고 구급차까지 처음에는 있었을 태니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 상황을 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오늘이 공휴일이고 이제 오전 아홉시라고 해도.
난 처음 그 남자의 통화를 들었을 땐 살짝 놀라긴 했지만 이곳에 와볼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누군가가 연락을 했기 때문인데, 지금 그 사람을 벌써 십오 분 째 기다리고 있지만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딱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어? 빨리 왔네.”
“네가 늦은 거다. 분명 오십 분까지 오라며.”
“여자가 좀 늦을 수도 있지.”
“약속시간이란 건 여자건 남자건 지켜야지. 뭐,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오, 이해해주는 거야?”
“너의 평소 모습에 비하면.”
“에이, 뭐야.”
참 표현도 풍부하다. 감탄사가 넘쳐나네. 어젠 내가 도망쳐야만 했지만 지금 보면 또래 다른 여학생과 다를 바 없는 세정이 내 앞에 서있다.
“그런데, 걔는? 왜 너밖에 없어?”
“곧 올 거야. 지금 누구 좀 보고 있거든.”
“누구?”
“형사. 그것도 강력계 1반.”
“뭐?”
강력계면 살인사건 같은 중범죄 전담 아닌가?
“뭐야? 이거 살인이야?”
“그럼 차가 못 들어가는 공원 안에서 교통사고가 나겠냐? 시체 수풀에서 나왔다는데 자살 겠냐?”
“수풀 안에서? 죽이고 시신을 거기에 버린 거야?”
“그게 제일 일반적인 생각이잖아.”
“잠깐 그런데 걔가 왜 형사랑? 설마 용의자는 아닐 태고 혹시 걔가 시신을 발견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 그냥 지네 아빠만나는 거야.”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네 아빠? 그럼 걔가”
“형사 딸내미라는 거지.”
‘이건 뭐, 진짜 신이 날 놀리나? 허허, 시체가 나왔다는 곳으로 나를 불러낸 사람이 형사 딸이라니.’ 정신이 아늑하다.
“그런데 나는 왜 오라고 한 거야?”
세정이 나에게 연락한 건 아니다. 연락한 건 가연이었는데 세정하고 같이 온다고 했다. 내 연락처는 현준에게 들었다고 하는데, 이런 일을 미리 예측한 건가? 그럼 뭔가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할 예정이었던 건가? 왜지?
“나도 몰라. 나도 그냥 같이 있다 같이 온 거야.”
“이런 아침부터?”
“너도 아침부터 그 녀석하고 같이 있었잖아. 물론 우린 조금 다른 경우야.”
“다른 경우?”
“우리 같이 살거든.”
‘오, 신이시여. 제발 저 좀 그만 놀라게 해주세요.’ 최근 들어 분명 심장이 많이 약해졌을 것이다.
“자,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듯한 이야기를 나에게 납득 시켜봐.”
“뭐야?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야?”
“그럼 같이 산다는 그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들리겠냐?”
“이성끼리도 동거 많이들 하잖아. 우린 동성인데도 않되?”
“성별을 넘어서 거기에는 성인이라는 전재가 있잖아.”
“최근에는 미성년자들도 많아. 우리나라 역시.”
“보통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잖아. 너희도 그래? 그리고 그건 우리나라가 10대임신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낙태도 많잖아.”
“지금 이야기가 약간 산으로 간다는 생각 안 들어?”
“영화나 소설하고 현실은 달라. 이야기가 한 곳으로만 가면 재미없지.”
“진짜 넌 지기 싫어하는 구나. 한마디도 물러서질 않는 군.”
왜 이런 녀석이 시험 성적이 좋을까? 시험기간 중 시험지와 답안지를 대조해보고 평균점수가 95점을 넘는 다고 나에게 자랑하던 게 생각났다. 그래 누군 평균 80도 겨우 넘는다. 생각해보니 현준하고 이 녀석하고 누가 더 성적이 좋을지 궁금해졌다. 걔도 95는 넘는다고 하던데. 어째든 나와 압도적으로 다른 성적들이다.
“저기요.”
그때 나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여섯 살에서 일곱 살 정도 된 어린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왠지 어디서 본적 있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와 닮은 듯한 아이였다.
“저희 언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언니? 너희 언니가 누군데? 언니가 몇 살이야?
뒤를 돌 필요 없이 내 뒤의 아이를 보고 있었던 세정이 물었다.
“지금 중학생이고요. 이름은”
언니를 찾아달라면서 옷차림이나 외모가 아니라 이름을 말한다. 순수한 건가 아직 생각이 짧은 건가. 아이의 언니를 찾아주려면 근처 여중생에게 이름을 죄다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아이의 다음 말을 듣자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이름은 정 지윤 이요.”
신이 날 놀리는 게 분명해졌다. 이참에 무신론자가 될까? 종교나 미신은 믿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믿는 게 신인데, 배신당한 기분이다.
‘아니지, 동명이인일 수 도 있잖아.’ 그래, 가능한 이야기이다.
“우리 언니는 D중학교 1학년이에요.”
내가 아는 정 지윤 은 D중학교 학생이다. 맞아. 자세히 보니 이애는 그녀를 닮았다.
“왜? 아는 사람이야?”
세정이 아이에게서 눈을 때고 나를 보며 물었다. 허리를 숙여 아이를 보던 난 허리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아는 사람 맞아. 근데 얘야, 어쩌다 언니를 잃어버린 거야?”
지 윤은 작년에 전학 왔으니 그전에는 다른 곳에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이런 어린아이라면 1년 정도 밖에 지내지 않은 동네의 지리를 완전히 알고 있다면, 오히려 그쪽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하, 그러고 보니 이젠 우리도 어린취급 받는 일 확실히 줄긴 했다. 교복의 효과인가? 시간은 금방 지나가고 인간은 빠르게 성장한다. 이아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제법 아가씨티를 내겠지.
“저희 언니가 저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경찰아저씨랑 같이 가버렸어요.”
“경찰이랑?”
언제부터 여중생이란 존재는 경찰과 이리도 친했는가. 아니다. 가연은 본인 아버지라고 했으니 태어난 순간부터 경찰과 관련된 사람인거지. 어쨌든, 왜 지 윤이 경찰과 같이 갔다는 거지?
“경찰아저씨랑 같이 갔으면 곧 올 거야. 조금만 기다리자. 우리도 여기서 다른 사람 기다려야 하거든.”
세정이 차분히 아이에게 말했다. 평소의 그녀랑 조금 다르다.
“의외로 아이한태 잘 하네. 너 답지 않게.”
“이런 게 나다운 거야. 내가 얼마나 부드러운 사람인데.”
난 솔직히 어린아이를 대하기 어렵다. 나 역시 아직 어른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잘못 건들면 망가져 버릴 듯한 느낌이다. 나중에 거액의 연봉을 줘도 소아과 의사나 유치원 교사는 하기 싫다. 아니, 애당초 남자가 유치원 교사를 할 수 있나? 확실히 아이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잘 다룬다. 어릴 적부터 모성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애당초 동물에게 성별이 있는 건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이니.
‘생각해보니 걔도 아이를 잘 대했지.’ 전에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있던 일이 생각났다. 가연은 처음 보는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했다. 아이엄마와 별다른 말없었으니 처음 보는 사이가 맞을 것이다.
10분 정도 뒤,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나와 세정이 원래 기다리던 가연도, 아이가 기다리던 지 윤도 아닌, 이 명수 선생님이었다.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 하 준이구나. 오랜만이네. 어? 너 지 윤이 동생 아니니? 이름이 지연이었나?
선생님은 내 작년 담임이었으니 당연히 작년 지 윤의 담임이도 했다. 아직도 작년에 가르친 학생의 동생까지 기억하고 있구나. 지연이라는 이름의 지 윤의 동생은 이 명수선생님을 처음 보는 듯 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하니 당황한 듯 내 뒤로 숨었다. 굉장히 순진한 아이 같다.
“그런데 넌 하 준이 친구니?”
선생님은 이번엔 세정에게 말을 걸었다.
“네. 정확히는 이 녀석 여자 친구 입니다.”
“뭐? 그게 무슨 짐승도 안 할 악담이야?”
“왜 싫어?”
“그럼 좋겠냐!”
이 무슨 옛날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인가. 아니지. 한국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제법 써 먹는 듯 하긴 하던데.
“그리고, 내가 ‘여자’지, ‘남자’는 아니잖아.”
그래. 여자이고 친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한 거지? 하긴, 아직 새파랗게 어린 우리가 연인관계라면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하다. 우리의 대화가 웃겨 보였는지 선생님은 웃고 계신다.
“어쨌든 반갑다. 난 작년에 하 준이 담임이었던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몇 가지 잡담이 오간 뒤에야 나는 선생님께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경찰한태 연락이 왔거든.”
“네?”
나와 세정은 함께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경찰이야?
“경찰한태 여기서 시체가 나왔다고 전화가 왔어. 그쪽에서 나중에 다시 전화 하겠다면서 성급히 전화를 끌었는데 아무래도 내용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도 전화해보고 오는 길이야. 정말 아무도 안 받더라.”
설마.
“누구 시체인데 선생님께 연락이 가요?”
“어? 아직 몰랐어?”
다시 말문을 열려던 선생님은 지연을 보고 말을 잊지 못했다. 설마.
그때 우리 앞으로 지 윤이 왔다. 그 어느 때보다 슬픈 얼굴이었다. 언니의 슬픔을 지연은 이해하지 못해 보였다.
“아니지? 설마, 진짜로.”
지 윤은 내말은 들리지 않는 듯 허리를 숙여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지연아, 언니가 방금 경찰아저씨한태 정확한 이야기 듣고 왔거든. 지연이 한태도 말해줘야겠지?”
“뭐를? 언니 왜 그래 울 것 같아.”
옆에 있던 세정도 눈이 커지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연아, 잘 들어.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셨데. 저 멀리 가버리신 거야. 이제 언니랑 지연이랑 엄마아빠 없이 살아야해.”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의 지연과 그런 지연 앞에서 결국 눈물을 흘리는 지 윤을 나는 더 이상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