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어여쁜 소녀들
시계가 오후 4시를 지나고 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5월6일이라는 날짜가 표시되고 있다. 벌써 내일은 일요일이다. 결국 그날은 나를 보자고 한 가연과 만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 왔다. 그날 공원에서 발견된 시신은 지 윤과 지연의 부모였다. 시신의 신변을 조사한 결과 둘의 딸인 지 윤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연락한 것일 거다. 그래서 이 명수 선생님이 그곳에 경찰의 연락을 받고 오신 것이고. 아무튼 간에 정말 이번일은 나와 관련 없다. 시험 마지막 날이었던 저번 주 주말은 지 윤에게 들은 말 때문에 상당히 낙심이라고 부를 만한 심정으로 이틀을 보냈다.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나에게 인사하고 싶다고 했던 동급생 여학생 입에서 내가 죽은 자기 오빠랑 닮았다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왜 그날, 입학식이 있던 그날, 왜 난 그리도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을까. 후회와 미안함. 그 두 가지 외에도 무엇인지 알 수없는 이상한 감정들이 마구 섞인 상태로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강하게 옥조인다. 이런 이상한 감정들은 한데 모여,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 잘 생각해보면 오지랖이 넓은 건 현준이 아니라, 나다. 나 자신 역시 쓸데없을 정도로 주변에 신경 쓰고 걱정하고 생각한다. 혼자 결론지어버리기.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결론지어버리고 혼자 죄책감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한다. 가연과 세정에게 공포를 느낀 것도 혼자 이상한 걱정이나 한 것이다.
“이 녀석 또, 혼자 고민하고 있다.”
아, 맞다. 지금 내방에, 내가 앉아있는 의자 뒤에는 그녀들이 있다. 가연과 세정이다. 자기 방처럼 베개를 깔고 엎드린 채 책을 펼쳐 놓은 세정이 나에게 핀잔을 준다. 가연을 그 옆에서 벽에 기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앉아있다. 나도 믿기 어렵지만 두 사람은 어제부터 계속 이집에 있다. 여기서 잤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와는 다른 방이었다. 어제 내가 공원에서 집에 돌아오고 몇 시간 뒤인 오후 1시,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이 아가씨들이 계셨다. 어떻게 알고 왔냐는 질문에, 세정에게 ‘신 현준이 알려 줬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녀석 내 연락처부터 집 주소까지 개인정보를 싹 다 누설한다. 그리곤 왜 왔냐는 질문에 ‘놀러 왔는데.’ 라는 매우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가연이 나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녀들을 문전박대 했을 것이다.
하긴 그녀들에게 지 윤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니 아무런 미안함이나 죄책감 없을 것이다. 세정도 듣고 놀라긴 했지만.
가연은 나에게 나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며 나를 최대한 설득했다.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정작 와서는 놀고만 있다. 의외로 본인을 독서가라고 하는 세정은 내 책들이나 읽고 있고 가연역시 놀기만 한다. 나와 한 대화도 전부 잡담이다.
당연히 저녁에는 가라고 했지만, ‘여기서 잘게.’라는 충격적인 대사와 함께 둘은 이불을 가지고 거실 소파와 바닥에서 진짜로 잦다. 거참 조심성 부족한 아가씨들이다. 나중에도 남자 집에서 함부로 자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 알려줘야 할 탠데. 가뜩이나 수많은 여성들이 범죄에 노출되는 세상에서. 남자도 위험한데 이런 행동의 여자라면 보통사람보다 몇 배는 위험해지기 쉽다.
“그냥 둬, 고민하고 진지한 게 저 얘 특기잖아.”
내가 또 고민하고 있다는 세정에 말에 가연이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신경 쓰인다. 설마 주말 내내 있을 생각인건 아니겠지.
“야, 그러지 말고 나가자.”
“어디를?”
세정은 이번엔 나에게 나가자고 제안했다. 아니, 말이 제안이지 팔을 끌며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꼭 어린 딸과 젊은 아빠 같네. 기왕이면 딸 부탁은 좀 잘 들어줘. 나중에 커서 시집가면 많이 아쉬울걸.”
“누가 들으면 진짜 자식 키워 본줄 알겠다. 그리고 얘가 결혼을 하던 독신으로 살던 나와는 관련 없어. 난 이런 딸 없으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나가자, 아빠”
“너 같은 딸 없다고. 딸에 대한 나의 환상을 깨지 말아줘.”
“나처럼 예쁜 딸 있으면 좋잖아?”
“딸이 외모는 다가 아니잖아.”
“그래도 부정은 안하네.”
거참, 이 얘 실제 부모는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네. 이런 딸이 있다면 정말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아, 맞다. 깜빡하고 못 물어봤는데.”
“뭘? 내가 왜 이렇게 예쁜지?”
“아니면, 내 외모의 비결?”
흠, 아무래도 이 아가씨들은 자신의 외모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듯하다.
“그런 건 전혀 알고 싶지 않아.”
“아쉽네. 일장 연설을 해줄 수도 있었는데.”
“일단 넌 대화 할 거면 귀에 이어폰부터 빼지.”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정작 물으려한 걸 이제야 물을 수 있게 됐다. 현준과 대화하면 이럴 일없는데.
“어제 네가 너희 둘이 같이 산다고 했잖아.”
“뭐야, 얘한테 말한 거야?”
“그렇게 됐어. 그런데, 그게 왜?”
“너희가 같이 사는 이유가 좀 궁금해서.”
어제부터 계속 궁금하던 걸 물어보자, 가연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얘 부모가 엄청 부자 인가봐. 얘가 혼자 살고 싶다고 해서 작은 방 하나 마련해줬데. 믿을 만한 친구랑 같이 산다는 조건으로.”
“참나, 어떤 부모가 중학생 딸이 친구랑 같이 둘이 사는 걸 허락한다고 그런 조건을 걸어.”
“우리 부모님은 허락했는데.”
“너희 아버지 경찰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 그것도 아네. 경찰이라도 허락할 수도 있지,”
이번엔 세정이 말했다.
“뭐야, 요즘 부모들 왜이래,”
“너도 혼자 살면서.”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우리 둘만이 아니야.”
“또 누가 있어?”
“어. 누군지는 말해도 너는 모를걸.”
“그런데 네 부모는 얼마나 부자 길래, 앞에 ‘엄청난’이 붙어?”
“T사 임원.”
뭐? 그 회사 임원? 우리가 입학하던 날, 전자제품 판매 세계 10위안에 진출했다고 뉴스에 나온 그 회사다. 이야, 엄청난 부모 밑에서 태어났구나.
“그런 사람 자식이 우리학교에 다니다니.”
“난 그냥 버린 자식이야. 오빠나 언니들에 비해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안 좋으니까. 나와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솔직히 속으로 좋아 했을걸.”
뭔가 슬픈 얘기다.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았는데 부족한 건가?
“그러니까 나 좀 놀아줘.”
“무슨 이야기가 그래.”
“나가자. 응? 제발.”
“그래, 가자.”
어린 딸 같은 동급생의 손에 이끌려 난 결국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어디가려고?”
“네가 정해.”
“우리가 나가자고 한 거니까 선택권의 너에게 줄게.”
아무 생각도 없이 나가자고 한 거였군.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인가. 어디가 좋을 까. 이 까다로운 여자들을 만족시킬만한 장소가.
“흠. 아, 개천 쪽 어때?”
“개천? 이 근처에 하천이 있어?”
“어, 조금 걸어 가야하지만, 시간은 넉넉하잖아.”
“하긴, 우린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지.”
“좋아. 그럼 가자.”
집안의 전등을 끄고 현관을 나서면서 문득 생각났다. 난 불과 이틀 전, 나는 이들에게서 공포를 느끼고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다. 그날은 그냥 순간적인 착각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때 현준의 표정은 마치 나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왠지 알 것 같다. 그 신호는 ‘이상해’였던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들 자체가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앞서가던 그녀들이 나를 돌아본다.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이런 건 이상하다고 표현하기 어렵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맞아. ‘예쁘다’라고 표현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