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 꽃 되게 예쁘다. 이름이 뭔지 아냐?”
학교 화단에 핀 꽃을 보며 세정이 질문했다. 5월 9일, 화요일 미술 시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라는 교사의 지시 하에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화단과 운동장을 배회하고 있다.
“나라고 알겠냐?”
“근데, 나보다는 덜 예쁘다.”
“너랑 비교하니까 꽃이 몇 배는 예뻐 보이네.”
“야.”
단순히 풍경이나 사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남녀가 두 사람으로 짝을 지어 같은 것을 한 장씩 그리라는 어이없는 조건이 붙어 있다. 이유가 도대체 뭐야. 같은 관점을 바라보는 남녀의 차이를 알아보아라, 이런 것도 아니고. 성적에 들어간다고 하니 대충 할 수도 없고, 힘들 뿐이다.
처음에는 왠지 이런 쪽에서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은 가연을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승우 놈이 먼저 채갔다. 이러면 도경이 다른 반인 것이 한이 된다.
‘가만, 왠지 오늘따라 저 녀석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가연이 유독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보였다. 기분 탓인가? 어제는 별 문제 없어 보였는데 말이지.
“이제 완전 여름 같아.”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그리던 세정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세정은 교복을 하복으로 바꿔 반팔에 짧은 치마차림이었다. 뭐, 연휴 때의 옷차림에 비하면 엄청 조신하게 입은 편이지만. 그땐 옷이 너무 짧았다고.
“이제 5월이라고. 제법 더워 질만도 하지.”
“흠, 그런가?”
“그런데, 뭐야? 너 그 꽃으로 그리게?”
가만 생각해보니 우린 같은 것을 그려야 한다. 그런데, 나와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먼저 아까 그 꽃을 그리고 있었다.
“짠, 어때? 괜찮지?”
“야, 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되게 잘 그렸다. 잠깐 사이에, 불과 5분 정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꽃을 종이에 멋지게 담아놓았다. 실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야, 너, 그림 배웠냐?”
“응? 아니, 그냥 재미 삼아 몇 가지 따라 그린 게 전부인데. 왜. 엄청 잘 그렸지? 그치?”
엄청 활발하게 웃는다. 아마, 질문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잘 그렸다는 의미에서 한 말은 맞지만, 이상하게 밝다. 아니, 원래 밝은 사람이지만 이상할 만큼 신났다.
“그거 잘 그렸다는 의미 맞지?”
“어, 그래. 잘 그렸어. 내 것까지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고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 사실대로 말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다는 옛말이 맞다.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있던 모양인데, 아마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 한듯하다. 적어도 학교 미술 교사나, 하다못해 부모 정도는 보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순간 토요일, 정확히는 일요일 새벽, 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창가에 창녀랑 제 명예만 챙기는 아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그 얘가,’
부모가 그렇다면 아마 제대로 된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겠지. 어쩌면 어미의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 할지도 모른다.
혹시, 나에게 유독 어린 아이처럼 구는 것이 애정 결핍일 수 도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 스케치가 됐으니까 너도 이걸로 그려.”
“오케이, 알겠어.”
그림에 소질은 없지만 최대한 열심히 그려 보기로 했다. 단순히 점수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림 그리기라는 건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고되고 힘들 일이다. 특히, 나처럼 재능 따윈 없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 말이다.
“뭐야, 너 그림 엄청 못 그리잖아.”
미술시간이 끝나고 미술실로 돌아와 그림을 모두 제출할 때, 내 그림을 본 가연이 말했다. 확실히 오늘따라 목소리에 힘이 없다. 승우 놈은 저걸 눈치 못 챈 건가. 남자는 여자보다 100배 정도 눈치가 없다. 하지만 저놈은 일반 남자에 100분의 일 정도 눈치를 가졌을 것이다.
“저 놈, 다른 건 몰라도 그림 하난 더럽게 못 그리지.”
“그나마 그림 조금 더 잘 그리는 거 빼면 나보다 잘하는 거 단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은 입 다물지.”
승우가 나의 그림 실력을 말하며 제출한 종이에는 운동장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저 둘은 운동장과 그 곳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모양이다.
뭐, 결국 가연의 상태에는 의문만을 품은 채 오늘 모든 수업이 끝났다.
‘내일은 평소랑 같겠지.’라는 생각을 품으며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살짝 드는 불길함은 애써 감추며.
오후 열시 즈음, 저녁을 먹고 할 일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세정에게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뭐야?”
“가연이 어디 갔는지 아냐?”
본론부터 깔끔하게 나온다.
“네가 모르는 데 내가 어떻게 알아. 잠깐, 설마.”
“아까 5시에 나가더니 전화도 안 받고 안 들어와.”
“뭐?”
“아니 하다 못해 편의점 갈 때도 웬만하면 같이 가는 데. 혼자 이렇게 오래 연락도 없이 안 들어올 리가 없어.”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세정이 말한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경찰에 연락은?”
가연의 아버지가 경찰이라고 했다. 따로 살긴 해도 세정이 연락해서 이야기 하면 바로 찾으려고 할 텐데.
“가연이 아버지는 교대해서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데, 연락처도 모르고. 경찰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하긴 여학생이라도 요즘 세상에 오후 열시에 돌아다니는 경우는 충분히 많다. 하지만 경찰이 그 정도로 무반응일까?
“가연이가 내 전화도 안 받고 이 정도로 밖에 있을 애는 아닌데.”
당연하다. 가연의 성격상 틀림없이 세정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녀가 걱정 할 것을 가연이 모를 리 없다.
“내가 지금 승우 불러서 같이 찾고는 있는데.”
“알았어. 나도 찾아볼게. 별일 아닐 거야. 더 늦어지면 경찰도 도울 거고. 걱정하지 마.”
그 뒤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오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는 쉴 새 없이 서로 부딪치며 딱딱 거리는 소리를 낸다. 경찰이 나설 만한 시간 전에 가연을 찾아야한다. 그러지 못하면 나나 세정 중 한 명이 미칠 지도 모른다.
미칠 듯이 불안 하고 걱정된다. 세정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지금 내가 불안하고 걱정 돼서 견딜 수 없다.
서둘러 집 밖으로 뛰어 나왔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할지 나는 알 수 없다. 가연이 사는 곳도, 자주 가는 곳도, 갈 만한 곳도, 나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은 움직였다. 분주하게 다리는 뛰었다. 나 자신도 내가 어디로 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개천에 서있었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뛰었는지 숨이 터질 듯이 갚아왔다. 그곳에 가연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연은 그곳에 없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12시 32분, 내가 가연을 찾아 동네를 돌아다니다 지쳐 집에 들어간 시간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결국 가연은 찾지 못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자 경찰들이 와서 학생들이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하는 것이 보였다. 설명을 필요 하는 나에게 눈물범벅이 된, 기절 직전에 반 실성상태의 세정이 말했다.
“가연이가, 가연이가, 가연이가, 죽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