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갑자기 태클걸긴 싫은데.”
우리 집에 도착해서야, 이때까지 조용히 있던 승우가 입을 열었다.
“하 준아, 정말 그 사람을 치자는 이유가 그것뿐이야?”
“왜? 오히려 남자답고 좋구만.”
가연이 나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니, 넌 원래 남을 위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니잖아?”
“나도 알아. 나도 원래는 그랬지. 이 녀석처럼, 철저하게 이득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애 늙은이 같은 놈이었지.”
현준을 턱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런데, 최근에 성격이 엄청 변했어. 아마, 이 아가씨랑 같이 지낸 탓인 것 같긴해.”
옆자리에 앉은 세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세정도 약간이나마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가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살아서 돌아온 뒤로 가끔은 이게 꿈인가, 싶어. 너는 실제로 죽었고 이건 나와 세정이가 꾸고있는 아주 행복한 꿈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볼을 꼬집어보거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봐도 이건 현실이지. 보통은 좋은게 꿈이고, 끔찍한 게, 현실이지만, 우린 아니지. 네가 살아있다, 이건 곧, 세정이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의미니까.”
“너무 그렇게 편을 들어주면, 나는 섭섭한 걸.”
“너, 네가 사실 죽은 척하는 거고, 실제로는 살아있다는 걸, 세정이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지? 시신이 발견된 그날 세정이는 진심으로 슬퍼했어. 그걸 바로 옆에서 보고, 같이 슬퍼한 나는 그걸 잊을 수 없고.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는 지 따위, 내 알바 아니야. 네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 지도 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곁에 있는 이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다면 용서하기 어렵지 않을까?”
“정말.”
가연이 살짝 작은 한숨을 쉬고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성격 많이 변했어.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정말 전혀 다른 사람이 됐잖아.”
“그 녀석도 사람이라고, 변할 수 밖에 없지.”
현준이 대신 변호해주었다.
“자, 그건 그렇고 한 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승우가 가연과 세정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두 사람, 아버지가 형제인데, 왜 성씨가 달라? 최 씨랑 구 씨 중에 뭐가 맞는 거야?”
나와 현준도 역시, 모르고 있던 부분이라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둘 다 맞아. 난 엄마 성을 따랐으니까.”
세정이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맞아. 둘 다 맞는 성씨야. 우린 아버지들이 형제인 사촌지간이지만, 성씨가 다른 사촌이야. 최 씨는 내 아버지와 삼촌이 가진 성이고.”
그리고 그녀는 ‘최 정용’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이 사람이 내 삼촌이자, 세정이의 삼촌이며, 정 지 윤 일가와 김 진 형을 죽인 사람이야.”
가연이 말을 끝내자, 내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잡을 사람이지. 혹시 이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있나?”
내 물음에 아무도 답하지 않고, 전원 찬성으로 논의는 시작됐다. 어디부터 손을 대고 어디부터 준비를 해야 할지 솔직히 감도 오지 않았다. 상대는 우리보다 훨씬 높이 있고, 일단 중요한 멤버인 가연과 세정은 그 사람의 수하에 있다. 게다가 이미 현준은 그 사람에게 상당히 노출된 상태다. 나 역시 후보였다고 하니, 깨끗하다고 볼 수 없다. 그 사람에게 전혀 정보가 없는 사람은 승우 정도다. 뭐, 가연을 통해 어느정도는 말이 갔을 테니, 완전히 깨끗하다고 볼 수 도 없다. 우리가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을 떠올리던 중, 하 연의 이름이 나왔지만, 그녀 역시 후보여서 안 된다는 의견이 동시에 나왔다. 그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 학년, 김 소영이었다.
“소영 선배? 근데 그 언니도 후보였는대.”
“너, 네 삼촌에게 보고할 때, 동급생들 위주로 했지?”
내 질문을 들은 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상급생인 그 선배가 후보가 된 거야?”
“너는 모르겠지만, 일 학년들한태도 제법 유명하거든. 입학하고 단 한 번도 전교1등을 놓친 적 없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수재로.”
이번 물음에는 읽던 책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현준이 대답했다.
“그래? 그건 금시초문이네. 어쨌든 그 선배도 끌어 들여보자.”
“전략 적으로 도움은 될 것 같은데, 그 사람도 후보였다니까.”
“노출이 안 된 사람이 제일 좋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
이 의견을 가지고 꽤 오랜 시간 결론이 나지 않았다. 현준과 승우는 큰 관련도 없는 사람을 괜히 얽히게 하지 말자는 의견이었고, 가연은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게, 그와의 승부에서 유리해진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소영에게는, 그녀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세정이 부탁해보는 걸로 하고, 일단 이야기가 일단락됐었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학생들이 돌아온 6월12일, 월요일. 마지막 수업인 음악 시간, 벽 바로 옆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지만 마땅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6월8일, 목요일, 다시 학교에 모인 우리에게서 처음 제시된 의견은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그 사람을 한 번 실제로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일단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그 사람에 대한 계획이 나올 거라는 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바로 전날에 나온 이야기대로, 우린 이미, 그 사람에게 어느정도 알려진 상태여서, 만나기 상당히 어려울 거라는 반박이 바로 나왔다. 일반적인 동급생이라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우린 그야말로 일반적이지 않기에, 그 방법은 실행하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가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역시 나 혼자라도 그 사람을 만나고 와야하나.’
하지만, 그런 모험에 지나치게 많을 것을 걸수는 없다. 운 나쁘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상대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잡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역시 혼자 위험을 감수하고 서라도, 도전하는 수 밖에 없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후, 문득 옆에 벽을 쳐다보았다. 음악실이다 보니 방음처리가되 울퉁불퉁한 벽이고, 그 구석에 왠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아. 내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것 같아?’
문장을 읽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지금 나에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누가 이런 곳에 이런 글을 써놓은 거지? 아무리 봐도 누군가 생각없이 해놓은 낙서를 우연히 발견한 것을 아니다. 간단히 생각해도 이학년과 삼학년은 음악 수업이 없다. 그럼 음악실을 쓰는 사람은 일학년 학생들과 음악관련 동아리에 학생들 밖에 없다. 벽에 쓰거라 그런지 글씨가 일정하지 못하다. 이래선 글씨체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다. 굉장히 많이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담임의 종례가 끝나자, 늘 그렇듯 세정이 나에게 왔다. 그러곤 같이 어디 좀 가달라는 거다.
“어디가는 건데?”
나는 복도를 앞서 걸어가는 세정을 따라가며 물었다.
“소영 언니 만나려고.”
“김 소영 선배? 설마 그 사람 도움도 받게?”
“네가 낸 아이디아잖아. 그 언니도 끌어들 이라고 한 건.”
“그건 그런데, 진짜로 끌어들여도 될까? 여차하면 우리도 바로 포기하고 발빼야할 수도 있는데.”
내가 들어도 한심하다. 분명 내가 하자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이런 말이나하고. 내 말을 들은 세정이 멈춰서더니 뒤돌아 서서 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위험할 거라고? 나도 알아. 위험하니까 그 언니도 부르려는 거고.”
“무슨 소리야.”
“그 언니랑 제대로 대화라도 해보고 다시 말해봐. 아마 만나보면 생각이 싹 바뀔 테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나는 세정의 말을 알 수 없어, 어깨를 으슥 거려보였다.
“우와, 나도 할래.”
나는 소영 선배의 반응에 놀라움을 감추기 쉽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자, 잠시의 틈도 없이 이런 반응을 한 것이다. 선배는 그런 위험한 사람을 치는 것에 더 없는 흥미를 보였다.
“이대로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하게 있다, 졸업까지 하는 것 아닌 가 했는데.”
우리가 찾아가자 선배는 주위에 친구들을 전부 비켜달라고 하더니, 오로지 세정의 말에만 집중했다. 아차피 다른 사람들은 가급적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선배가 세정을 상당히 각별히 생각하는 건 맞는 듯 싶다.
“그 말은 우리랑 같이 해주겠다는 말이죠?”
“당연하지. 언제부터 할 거야?”
이 물음에 내가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지금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