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날, 시인의 예언처럼 마음 한 장 그대 발 앞에 내려놓을까. 그대라면 즈려밟힌 마음에도 아프지는 않으려만, 지나간 발걸음에 그리움이 묻어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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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우수에 젖을 법한 파스텔 빛깔의 가을이었다. 하늘에 날개를 적신 잠자리들이 허공을 굽이치며 날아다녔다. 잠자리들은 어린아이가 놓은 자수를 보듯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아이가 바늘에 찔려 흘린 핏방울은 나뭇잎에 앉아 단풍이 되었나.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염색하기 시작한 나무들은 아직 제 색을 온전히 뽐내기를 거부했다. 초록빛 그라데이션을 머리에 얹고서는 등을 떠미는 바람에게 아직은 아니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낼 뿐이었다.
수줍은 가로수들이 진한 물감을 막 머리에 찍어 바른 시기, 지금은 초가을이었다.
가끔 빨리 단풍을 들인 나무들은 머쓱한지 제 잎들을 얼른 털어내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 떨어지는 단풍의 눈을 맞으며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방방 뛰었다. 엄마, 저 잎은 내 잎이야. 그리 말을 하고는 작은 보폭을 서둘러 낙엽을 주워오고는 했다.
가을바람이 낙엽을 싣고 와 창문을 두드리자, 연화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화는 즐거이 가을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쓸쓸한 눈으로 내려보다가, 블라인드를 주욱 내려 가을과 자신의 경계를 그어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연화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책 한 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책갈피가 꽂혀있는 쪽을 찾아 넘긴 연화는, 새하얀 꼬리를 살랑거리며 책을 정독했다. 길쭉한 눈동자가 어느 구절에 와 닿았을 때, 새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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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아홉 개 달린 천 년 묵은 여우를 ‘구미호’라 한다.
허공에서 한 바퀴 재주를 넘은 구미호는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 사람으로 변신한 구미호는 특별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 변신한 구미호와 엮였다간 심장을 빼앗길 수 있으니.
구미호의 주식은 인간의 심장이다. 구미호는 대개 사람으로 변한 후 타인을 유혹해 심장을 먹는다. 인류에게 두려움의 상징인 구미호의 모습으로는 타인을 유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매력적인 외관으로 변신한 구미호는 사람의 심장을 훨씬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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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책의 내용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 생각되었을 즈음, 연화는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어버렸다. 미동하는 블라인드 너머로 얇게 흔들리는 햇빛이 책표지의 금빛 테두리를 비춰주었다. <구미호 완전 정복 도감>이라는 제목과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물고 있는 구미호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표지는 연화의 신경을 다시 한 번 거슬리게 했다.
“정말이지….”
연화는 한참이나 책의 표지를 노려보았다. 반쯤 감긴 눈동자가 못내 불쾌한 빛을 띠었다. 찌푸려진 미간의 깊이는 시름의 지표일까. 표정을 살짝 구긴 연화는 결국 책의 저자에 대한 화풀이를 글이 적힌 종이 묶음에다가 하고 만다.
“뭐 이런 헛소문에 관한 책이 다 있담.”
연화가 손을 털어내기 무섭게 두터운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장된 책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원망하며 속지를 파르르 떨어 넘겼다. 제 무게를 못 이겨 펄럭이며 넘어가는 종잇장이 한 장 한 장 찢어질 듯 위태롭다.
“정말 인간들이란. 조그마한 소문 하나하나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내고, 거기에 전설까지 만들어내? 지금의 구미호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인간들의 심장을 먹거나 하지는 않았거든?”
연화가 씩씩거릴 때 마다 뒤에 달린 네 개의 꼬리가 잘 다려진 옷깃처럼 빳빳하게 섰다. 창밖의 낙엽들도 연화의 감정이 빚어낸 초능력에 반응해 떨어지길 멈추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 작태를 사람들이 보았다면 아마 미신거리를 더 늘려대지 않았을까. 사미호의 이름을 지닌 연화는 과거, 힘겨운 수련 끝에 네 개의 꼬리를 얻어 내었다.
“하, 그리고 구미호가 천 년이나 묵었다고? 그래서 더 사악하다고? 백 년 묵은 여우들도 구미혼데, 천 년 묵은 구미호면 수련을 열심히 했거나 했겠지. 인간들은 구미호가 천 년 동안 가만히 있기만 해도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줄 아나 봐.”
연화가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 불만을 토해냈다. 연화의 말대로 실제 구미호는 사람의 심장을 먹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 구미호는 이종족의 일원으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종족 중 하나였다. 이종족이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생명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종족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종족이 되기 위해서는 같은 종류의 동물 속에서도 각기 다른 ‘조건’이 따라붙는데, 이 조건을 달성해야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이종족의 일원이 된다.
여우가 이종족인 구미호가 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사냥을 하지 않고, 고기는 먹어도 잘 손질된 것만 먹어’야 했다. ‘그리하면 한 개의 꼬리를 더 얻을 수 있으며, 재주를 넘어 사람이 되리라.’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어버이에게서 아이에게로 전설처럼 전해진 ‘조건’이었다.
연화는 3년 간 사냥의 본능을 참았고, 풀떼기만 뜯어먹다가, 간간히 고기를 먹을 때면 보는 여우가 질릴 정도로 손질을 해댔다. 인고의 끝에 달디 단 열매가 있다고 하던가. 조건을 달성해낸 연화는 하나의 꼬리를 더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또 다른 수련들을 통해 두 개의 꼬리를 더 얻어 꼬리 네 개 달린 사미호가 되었다.
꼬리가 많다는 것은 여우족들 사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꼬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우족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꼬리는 총 아홉 개까지 늘릴 수 있었는데, 예외적으로 구미호 중 구미호인 천미호가 존재했다. 천미호는 꼬리가 천 개 달린 여우로, 특별한 수련을 통해 높은 경지까지 올라 초월적인 섬김을 받고 있었다.
천미호가 쉽게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천미호는 여우들의 역사상 두 마리 뿐,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평균 백 년에서 이백 년까지 살 수 있는 다른 여우와 달리 천미호는 천 년까지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꼬리가 네 개인 것도 어렵게 얻은 성과인데 천 개를 얻으려면….’
연화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생각들에 마음을 적셨다. 꼬리 하나 얻겠다고 3년간 고생한 것도 힘겨웠는데, 꼬리 천 개를 채우자고 고생을 구백구십육 번 더 반복해야 하다니. 결승선에 발이 달렸을까? 까마득하기만 한 골인 지점이 더욱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화는 아직 천미호가 되기에 많이 부족했다.
‘그전에 구미호가 일단 되어야겠지?’
연화는 원목침대 위에 사뿐히 앉았다. 녹빛의 이불이 가볍게 구겨지며 굴곡을 그려내었다. 방금 전까지 누워있던 이불은 연화의 온기로 따스하게 덥혀져있었다.
연화는 서울의 어느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구미호의 전설을 아는 사람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연화의 방은 현대적이었다. 차분하지만 세련된 분위기를 주는 탁자와 의자가 방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최신형 노트북이 노이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노트북이 올려진 탁자 옆에서는 신형 스마트폰이 예쁜 케이스에 담겨져 연화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미호 전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설화가 퍼져나가는 속도는 농촌이 제일 빨랐다. 꼬리가 여러 개 달린 여우설화의 전통이 길다는 것은 연화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서 연화가 옛날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침대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던 연화의 시선이 책장에 닿았다. 몇 권 없는 책이 가뭄에 콩 나듯 책꽂이에 꽂혀있었다. 연화는 꽂혀있는 책 중 한 권을 꺼내들었다. 세로로 적힌 책 제목은 당연하게도 한자였다. 어려운 한자를 연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 내렸다. 책을 손가락으로 쭉 훑던 연화는 자신이 찾아 헤매던 부분인 <구미호가 되는 방법>이라 적힌 곳을 손톱으로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꼬리가 하나 더 생기는 방법 다섯 번째…. 꼬리가 생기는 방법은 바로 매일 밤마다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 이 행동을 경전을 다 읽을 때까지 반복하다보면 꼬리를 하나 더 얻을 수 있다. 또한 몸을 청결하게 할 것. 항상 깔끔한 상태로 유지한 채 일 년을 보낸다면 꼬리를 얻을 수 있다.”
연화가 책에 적힌 글자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중얼중얼 책의 구절을 읊어보던 연화가 또 다시 생각의 늪 속에 가라앉았다.
‘몸은 반년 전부터 항상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건 오늘부터 실천하면 되고….’
사실 연화는 반년 전에는 청결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목욕은 일주일에 한번, 방은 어질러 놓으면 한 달에 한 번꼴로 치우고, 음식물 쓰레기는 널브러진 채로 그냥 두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연화의 친한 친구인 오미호, 나래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의 복사본을 주었다. 그걸 읽은 후, 연화는 반드시 꼬리 하나를 더 얻겠다 불타오르며 집안 대청소를 실시했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씻었다. 이후 연화는 청결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오미호를 지나 육미호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연화는 누구보다 자신했다. 칠미호가 되기 위한 수련도 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고. 그 어떠한 수련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지금까지 겪은 고생보다야 더 하겠는가. 그렇기에 연화가 책장을 넘기는 손길은 가벼웠고 미소는 청량했다.
“그 다음…. 그 다음이….”
그 다음장에 적힌 문장을 읽기 전 까지는.
“잠깐, 이, 인간의 사랑을 얻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