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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은 큰 입을 벌려 태양을 삼킨 지 오래였다. 그 부른 뱃속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이 들었나. 빵 반죽처럼 속에서부터 부풀어 올라 그 넓은 어깨를 갖게 되었는지도.
저녁놀은 게슴츠레 감겨오는 눈을 내버려 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늘의 뺨에는 별들이 주근깨처럼 알알이 박혀있었다. 마침내 저녁놀의 고개가 꺾였을 때, 그의 정수리에 숨어있던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무신경한 표정으로 땅을 내려 보는 달과는 달리 연화는 기대감이 주체할 수 없이 차올랐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가슴을 울렸다.
“후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연화는 재빠르게 복도를 지나 들뜬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연화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눌러야 할까. 고민하던 연화가 위쪽 방향의 화살표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연화는 머뭇이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타는 게 맞겠지…?’
연화는 1층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가 마법처럼 자신을 1층으로 데려다주길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는 연화의 기대와 다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최고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텅 빈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타고 있자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녕하세요.”
예의 바른 연화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늘 이웃과 함께하라고 옥유에게 배운 덕이었다. 그러나 이웃은 고개를 홱 돌리고 1층을 누를 뿐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연화는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화살표가 붉은 빛을 내며 빛났다. 그 빛이 망막에 새겨졌는지 눈을 돌려 벽을 바라보자 파란색 화살표가 눈앞에 깜빡였다.
‘아래.’
그 한 단어가 잠들어 있던 연화의 생각을 깨웠다.
‘그러고 보니 아랫집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어.’
연화의 능력으로 조사해본 결과, 아랫집에는 분명 남자 혼자서 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것보다도 소리가 커지자 참다못한 연화가 능력을 써 알아낸 결과였다.
아래층은 언제나 남자 혼자라기엔 지나치게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가끔은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울려 연화는 귀를 접은 채 이불을 덮어쓰기도 했다.
‘며칠 그러고 말겠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곧 접어야 했다.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떠들썩한 소음이 연화네 집까지 들려왔다. 사람 한 명이 냈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소음이었다.
‘뭐지, 매일 친구들을 초대해 잔치라도 벌이는 걸까?’
어쩔 때는 소음의 강도가 너무 세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새로운 집을 찾아보았지만 지금 사는 집보다 더 나은 집은 찾기 어려웠다. 만족할만한 집을 찾지 못한 연화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집에 계속 살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비하지 못한 연화가 조금 비틀거렸지만 곧 중심을 찾았다. 곧 새로운 새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아랫집 남자에 대한 불쾌함을 지워버렸다.
‘만약 인간세계가 내 마음에 든다면 한글부터 깨우쳐야지. 나는 밖에 나가면 아는 글자가 한자밖에 없어서 까막눈이 될 지도 몰라.’
연화가 읽는 책들에서 보았듯이 이종족이 쓰는 언어는 한자였다. 물론 말이야 한국어로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먹에 찍은 붓을 세워 잡고 한자를 천천히 쓰곤 했다. 항상 이종족의 세계와 자신의 집만을 들락거린 연화는 한글을 접할 기회가 없었고, 한글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동안 한글을 모르는 게 내심 아쉬웠는데,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삼을 수 있을 수도 있겠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파트 밖으로 나선 연화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도 아니었고, 즐거움에서 터져 나온 탄성도 아니었다. 인간세계가 자신이 꿈에서 그리던 모습과 너무도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호수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가 둥실둥실 떠다녔다. 인간들이 산을 밀어내고 지은 도로에 자동차가 궤적을 남겼다. 공사장에 집을 잃은 동물들은 몸을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공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연화는 인간세계가 많이 발전된 만큼 공기도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연화가 본 하늘은 물감이 마구 섞였을 때 나오는 진한 회색빛이었다. 옅은 검은색의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자동차 매연과 공장의 연기가 하늘에 꾸덕꾸덕 쌓여만 갔다.
연화가 얼떨결에 숨을 들이마시자, 이종족이 사는 세계에서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숨에 섞여 들어왔다. 공기에 섞여있는 미세먼지가 폐를 괴롭히자 연화는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었다.
‘괴로워!’
한참이나 기침이 멈추지 않자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집에서 연화는 늘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환기를 시켰다. 이런 연화가 서울의 참된 공기를 마셔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이런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거지?’
기침이 가라앉자, 제일 먼저 연화는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연화는 사람들이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마스크가 무엇인지 모르는 연화는 사람들이 입에 쓴 종이쪼가리의 용도를 모른 채, 손으로 입을 가려 대충이나마 먼지를 막았다.
연화가 길을 나설 즈음 따르릉, 하는 전화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연화는 얼른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수화기가 그려져 있는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는 꾸준한 연습이 가져다준 산물이었다. 한글을 모르는 연화는 스마트폰 사용법을 그림만 보고 익힌 다음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는 법을 배웠다.
“여보세요.”
연화의 목소리에서 우울함이 묻어났다. 상상과는 다른 인간세계에 실망한 연화의 목소리는 풀이 많이 죽어있었다.
“연화야, 나 나랜데, 지금 시간 있어?”
쾌활한 목소리가 연화의 우울함을 조금이나마 날려주었다. 소개팅이 끝난 나래는 연화에게 제안도 할 겸, 약 한 달간 보지 못한 안부 인사도 겸하려 연락을 해왔다.
“응, 나 지금 밖에 나와 있는데, 너는 어디야?”
“오~ 밖에 나온 거야? 난 네가 인간세계에서 사는 동안 안 나올 줄 알았더니만 나오다니, 축하해 줄 일인걸? 그런 의미에서 내가 쏠게.”
에너지가 듬뿍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연화는 나래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나래가 방실방실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나 너희 집 근처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알았지?”
“알았어. 근데 바깥 공기가 너무 안 좋은 것….”
뚝, 전화가 끊겼다. 연화가 문장을 말하기도 전에 나래는 전화종료 버튼을 눌렀음이라. 매일매일 허둥지둥, 다른 사람이 말하기도 전에 행동하기 일쑤. 남의 말을 듣질 않으니 실수연발. 하루에 몇 번씩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던 나래의 모습이 연화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익숙한 친구의 모습에 연화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나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은 모두 잊힌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