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배 과장님 어디 계세요?”
창배가 김호진 기자와의 저녁 약속으로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며 한 여직원이 들어섰다.
창배가 손을 들어 보이자 여직원은 다가오더니 창배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저어, 자금부에서 왔는데요.”
여직원은 창배를 확인하곤 조심스레 쇼핑백을 하나 건넸다.
“이게 뭐요?”
“저어, 회장님이…….”
여직원은 주위를 살피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창배는 짚이는 게 있어 누가 볼세라 얼른 받아 책상과 의자 사이에 집어넣었다.
“이만 가볼게요.”
여직원이 돌아 나갈 때까지 기획실과 홍보실을 함께 쓰는 방이 너무 넓고 분주해서인지 그때까지 자금부 여직원이 다녀가는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배는 의자에 앉아 쇼핑백으로 덮어 놓은 신문지를 살짝 벗겨 내용물을 살폈다. 그 안엔 한눈에 천만 원으로 짐작되는 돈 세 뭉치가 들어 있었다.
‘실탄이라 이 거군.’
창배는 돈뭉치가 안 보이게 원래대로 덮었다.
***
“밖에도 빈자리가 많던데, 답답하게 왜 룸으로 들어왔어요?”
창배가 들어와 자릴 잡고 조금 앉아 있자 김호진 기자가 들어왔다.
“호젓하잖아요?”
창배는 곧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화성그룹이 참 대단하긴 대단해요. 이 와중에 공장을 다 짓고…….”
“회장님이 전에부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중국은 다른 분이 가셨죠?”
“예. 제가 바빠 우리 산업부 후배를 대신 보냈어요.”
“김 기자님이 직접 한번 보셨어야 했는데.”
“뭐, 기사 잘 나왔던데.”
“다음에 내가 자릴 한번 마련할 테니 같이 한번 갑시다. 간 김에 아예 우리 해외 현장들도 한번 쭉 들러보시고. 자카르타엔 아예 끝내주는 내 단골집이 있죠. 거기 애들도 기똥차고.”
“글쎄, 시간이 될까 모르겠네.”
“김 기자님, 너무 스트레스 받고 살지 맙시다. 이번에 매일경제 최정수 기자 문상에 갔다 와 보니 참 허망하더군요.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 술 먹던 사람을 영정 사진으로 대 하니, 아, 참 사람 사는 게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퍼뜩 듭디다. 몸이 좀 이상하긴 했는데 워낙 바쁘니 보니 병원 가는 걸 차일피일 미뤄놓고 있었대요. 또 며칠 전에도 어느 신문인가, 사회부장이 과로 사 했죠?”
“기자라는 직업이 워낙 그래요. 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주 힘들어요. 삼십 중반이 넘어가면 슬슬 앞일 걱정을 하게 되죠. 하긴 뭐, 그전 이태백이니 사오정이라 했던 말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만.”
“참, 그런데 아까 전화했던 건 무슨 얘깁니까?”
창배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자 넌지시 말을 끄집어냈다.
소주를 두 병째 시켰지만 김 기자는 부서 회식이 있다고 별로 마시질 않아 창배가 거의 한 병 반 정도를 혼자 마셨다.
“뭐, 말입니까?”
“예? ……. 아니, 오전에 전화로 저하고 이야기한 진산이니 일성이니 하는 정치자금 건 말입니다.”
창배는 김 기자가 입장이 곤란하니까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성에서도 그런 일 있지 않냐 고 물었잖습니까?”
“아, 그거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어요.”
“신경 쓸 게 없다니 요?”
“그건 내가 그냥 한번 물어봤던 거예요. 하도 기삿거리가 없어.”
“원, 이 건이 빨리 끝나든가 해야지. 김 기자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자꾸 기업만 갖고 흔들면 어떠합니까? 가만히 있는 아이 젖 주겠습니까. 와서 손 벌리니 안 줄 순 없고, 그러다 막상 문제가 생기면 피해는 애꿎은 기업들한테 다 돌아가고.”
창배는 김호진 기자의 이야기를 듣곤 안심이 되자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창배가 보기엔 적어도 김호진 기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 과장님 얘기대로 이건은 우선 조속히 수습이 되어 끝나야 돼요. 지금 정말 경제 상태가 말이 아닌데, 정치인들은 늘 자기들 잇속 만 챙기려 하니……. 이는 아마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하고 있을 겁니다.”
비로소 창배는 아침에 김 기자와 통화를 했을 때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했음을 깨달았다.
“어이쿠. 이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는 더 늦기 전에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김호진 기자가 일어설 동안 창배는 잠시 갈등을 느꼈다. 오백만 원을 봉투에 담아 봐서 필요하면 주려고 가방에 담아 들고 왔는데 이제 그럴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이거 바쁘신 데, 그럼 나중에 연락할 테니 술이나 한잔합시다.”
함께 나와 김호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자 창배는 어정쩡했다.
오전부터 이 일로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손쉽게 일이 마무리가 되자 갑자기 허탈감이 들어 어디서 술을 한잔하고 싶었다.
원래대로 라면 지금쯤은 김호진 기자와 어디 룸살롱이라도 가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창배는 생각 끝에 정아에게 핸드폰을 했다.
“응, 난데?”
“어, 오빠! 웬일이야?”
“일 때문에 밖에 있어. 그런데 넌 거기 어디냐?”
“집이야.”
“일찍 들어왔니?”
“응. 회장님이 만찬 약속이 있어 다섯 시 경 나가셨어. 그래서 일찍 퇴근해 우리 여직원하고 청담동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조금 전에 들어왔어. 미스 유 걔가 나한테 참 잘해. 언니, 언니 하며 잘 따라. 그래서 내가 떡볶이랑 맛있는 것 많이 사줬어.”
“너 그러고 다니다 젊은 놈들이 꼬시려 들면 어쩌려고 그래.”
“어휴, 그러잖아도 어린애들 둘이 클럽 가자고 자꾸 치근덕거려 혼났어. 한 대학 이 삼 학년쯤 됐을까. 동생도 한참 동생뻘 되는 애들이 미스 유하고 같이 있으니 친군 줄 알았나 봐. 한편 속으론 요것 봐라, 젊은 피 수혈 좀 받아볼까 하다 참느라 혼났어. 그 내숭 떠는 것도 아주 못할 일이 데. 아주 닭살 돋는 것 있지.”
“너, 까불지 말고 다녀. 그랬단 아예 가만히 안 둘 거야.”
“오빠가 뭔데?”
“잔말 말고. 빨리 이리 나와.”
“거기 어딘데?”
“시청 앞이야.”
“아, 귀찮은데. 거기까지 언제 가.”
“내가 이 앞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다시 전화할 테니 그리로 와.”
“웬 방?”
“내가 지금 급해서 그래.”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내가 오늘 계 탔잖아.”
“계?”
“그래. 빨리 나와.”
“오케이. 금세 갈게. 기다리고 있어!”
***
“우와! 방 좋네.”
창배가 방을 잡고 들어가 맥주를 꺼내 침대에 걸터앉아 마시고 있는 새 정아가 들어오며 탄성을 질렀다.
창배는 정아가 들어오자마자 정아의 입술을 덮치며 침대로 이끌었다.
“자, 잠깐만. 빨리 씻고 올게.”
“괜찮아, 가만있어.”
창배는 서둘러 정아의 옷을 벗겼다.
“아이, 저리 가. 내가 벗을게.”
창배가 허둥대자 정아는 일어나 앉아 옷을 벗었다.
상의를 벗고 브래지어를 풀자 곧 눈부신 가슴이 드러났다.
창배는 한 손으로 정아의 가슴을 움켜쥐며 정아의 입술에 입을 갖다가 대자 곧 정아의 혀가 미끈거리며 창배의 입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정아는 두 손으로 창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윽고 정아의 샘에서 분출된 뜨거운 마그마가 굳는다고 생각했을 때 창배도 몸에서 불기운이 빠져나가며 침대 위로 떨어졌다.
“아, 나른하다. 그런데 오빠는 오늘 회장님은 왜 만난 거야?”
창배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던 정아가 창배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뭐 좀 보고해야 할 일이 있었어.”
정아의 물음에 건성 대답하며 창배는 조금 전 정아가 절정에 들떠 올랐을 때 자기의 이름을 불렀는지 아니면 오빠라고 했는지를 떠 올렸으나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회장님도 보기 완 달라.”
잠시의 침묵을 깨고 정아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회장님을 화성에 오기 전 봤을 때 하고 막상 오고 나서 봤을 때 하곤 많이 다르다는 얘기야.”
“뭐가 어떻게 다른데?”
“모르겠어. 일단 내가 은행에 있을 때 몇 번 봤을 때는 그룹을 이끄는 사람답게 굉장히 타산적이고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이 치밀한 것 같았는데, 막상 가까이서 직접 겪어보니 어딘가 허술한 것 같기도 하고 빈틈도 많은 것 갖고 좀 그래. 그래서 사람은 직접 겪어 봐야 하나 봐.”
“어이구! 얘가 공자님 같은 말씀하시네.”
“정말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게 있었어. 예를 들어 가끔 계열사 임원들이나 사장들이 결재받으러 올 때 차를 가지고 들어가 보면 회장님과 트러블을 빚을 때가 종종 있거든. 트러블이래야 뭐, 그들이 결재 판에 사인을 받으려고 회장님을 설득하는 거지. 그럴 땐 난 회장님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그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대부분은 회장님이 지더라고. 난 회장님이 고집이 굉장히 세고, 업무를 다 꿰차고 있다고 생각을 해 사람들이 다 따를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게 아냐. 회장님 생각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세세히 잘 모르니깐 결국엔 담당자의 말에 따라 결재 판에 사인을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그건 고집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건데 말이지. 결국 오너가 전 업무를 쥐고 독불장군으로 한다는 건 회사가 조그마할 때나 가능한 거지. 규모가 커지면 사람들에게 맡겨 놓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조직이 일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봐.”
“너 지금 나한테 경영학 강의하냐?”
“마저 들어 봐. 그간 내가 느낀 걸 얘기하는 거야. …… 그런 걸 보니까 자칫 사람을 잘못 썼다간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 결국 회사가 크고 그룹 같은 경우는 그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부정으로 개인적인 치부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는 거야. 결재를 갖고 들어온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 세세히 돌아가는 부분들을 회장님이 어떻게 다 알겠냐고. 물론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어 그렇긴 하겠지만. 그러니 결국 들이 미는 결재 판에 사인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몰라서도 속고 때로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속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 거지.”
“……!”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내가 오빠하고 오피스텔에서 처음 섹스를 나눴을 때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하고 나니까 이 사람을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쫓아다녔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맛보고 나니 결국엔 다른 남자하고 다를 게 없었다는 얘기냐?”
“참, 그런 게 아니고. 누굴 바람둥이 여자로 아나?”
정아는 곱게 눈을 흘겼다.
“아무튼 모든 게 마치 마술 같아, 마술도 신비롭게 생각하다가 그 눈속임을 알고 나면 갑자기 아주 시시해지잖아. 갖고 있던 환상이 깨지는 거겠지.”
“넌 회장실에 들어오는 계열사 임원이나 사장들 파악은 다하고 있겠구나. 어떤 새끼가 회장님한테 사기 쳐 거짓말하는 것도.”
“아직은 잘 모르지만, 더 있으면 누가 어떻고 하는 것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나야 뭐, 비서니까, 늘 입에 지퍼를 채우고 있어야지.”
창배는 정아가 한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혼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만호 회장이 오늘 자신에게 돈을 준 것은 금방 정아가 얘기한 대로 하면 몰라서 믿고 준 것일까.
아니면 먹자는 놈한텐 줘야 한다고 속는 걸 알면서도 주는 것일까.
창배는 자신의 경우는 아마 전자 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건 우선 자신이 어떤 돈을 바라고 한 게 아니고 억지로 등이 떼밀려 들어간 것이니 의심받을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만일 자신이 그 일을 꾸며 다른 마음으로 들어가 얘기를 했다면 그때 회장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창배는 그래도 회장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아 야! 옷 입어!”
“왜?”
“술 먹으러 가자.”
“지금?”
“그래. 아까 보니 여긴 위에 바가 있는 것 같더라.”
“거긴 비싸잖아?”
“걱정 마. 너보고 내라곤 않을 테니. 자, 그리고 이건 네 백에 넣어 둬.”
창배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정아에게 건넸다.
“어머, 이게 뭐야!”
정아는 봉투 안에 든 돈을 보곤 깜짝 놀랐다.
“형, 이돈 어디서 났어?”
“오늘 계 탔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