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과장! 그거 지금 어떻게 돼 가!”
“뭐, 말입니까?”
“그룹 브로슈어 만드는 거 말이야!”
“브로슈어요? 그거 아직 진행 중인데요.”
“진행이 지금 어떻게 돼 가냐고!”
“……?”
“그 대영 인가하는 업체 말이야…….”
“……?”
“허어, 그 조영기 사장이 추천한 업체라고, 내가 일전에 제안서 준 거 있어, 없어!”
“아……, 그거요?”
창배는 그제야 며칠 전 박두식 전무에게 건네받았던 서류 봉투가 생각이 났다.
그룹 소개 잡지를 만드는데 박 전무가 조영기 사장이 소개한 업체라고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검토하라고 하자 창배는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김창현에게 그대로 넘겨준 것이다.
“업체 선정이 거의 끝나 가는 걸로 아는데요.”
“그 대영인가 하는 업체, 들어갔어? 안 들어갔어?”
“한번 알아보죠.”
“알아보고 말 것도 없이, 그리 결정해서 지금 당장 결재 올려! 한번 얘기를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박두식은 방금 조영기 사장에 불려 갔다가 호되게 야단맞은 일이 생각나 기분이 찝찝했다.
그룹 소개 책자를 만든다고 각 계열사에 필요 자료를 요청했는데 이것을 안 조영기가 대영이라는 업체를 소개하며 그 업체에 일을 주도록 부탁을 한 것이었다.
박두식이 홍보실을 맡고 나서 이런 홍보 제작물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별거 아닌 것 같이 생각한 이 일을 하려고 자신에게 청탁해 오는 곳이 한두 업체가 아니었다.
또 외부에서 소문을 들은 업체들은 자기 업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룹 내 사장이나 임원들의 인맥을 동원해 부탁들을 해오고 있어 가뜩이나 골머리가 아픈 가운데 마침 조영기 사장이 부탁을 하자 핑계 김에 얼씨구나, 잘 됐다 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조영기가 누군가.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장차는 화성그룹의 주인 될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박두식은 그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했다.
“김창현 대리의 의견을 한번 들어 보고 올리겠습니다.”
“최 과장!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대영으로 결정해 그냥 바로 결재를 올리란 말이야. 알았어? 이건 내 뜻이 아니고 조영기 사장 뜻이란 말이야. 자존심 상하는 얘기지만, 솔직히 너도 그렇고 나도 월급쟁이 아니냐. 무슨 의견이고 개나발이야. 빨리 그대로 시행해!”
창배는 기분이 나빴지만 억지로 참았다. 개나발이라니, 아직 박 전무와 오래 근무는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그런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배는 조 사장한테 얼마나 당했으면 그러랴 싶어 애써 속으로 삭이려 했다.
“지금 당장 대영으로 해서 결재 올려! 오늘 다 끝 낼 테니.”
최창배가 나가자 박두식은 서랍에서 접대용으로 보관하고 있는 담배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오래전에 끊은 담배인데 몹시 피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박두식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과장 놈의 새끼가 한번 지시를 했는데도 들어 처먹질 않으니. 박두식은 조영기 사장에게 당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손치더라도 아래 직원에게 전무인 자신의 지시가 먹혀들어 가지 않는 게 몹시 분했다.
‘저게, 혹시 다른 업자들로부터 돈을 받아 처먹느라고 그런 게 아닐까.’
박두식의 머릿속은 온갖 상상들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제작비가 못 들어도 어림잡아 한 2억 원은 들 거라고 예상하던데, 그 와중에 그 일부가 흘러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전에 내가 법인 카드를 준다고 했을 때도 그냥 나가고 결재를 올리지 않았던데. 혹시 그런 데서 비자금을 만들어 쓰는 것은 아닐까.’
박두식은 그러다 창배가 얼마 전 회장실에 직접 들어갔던 일이 다시 떠오르자 그만 숨이 턱 막혔다.
‘혹시, 그때 회장실에 보고하러 들어가 회장님한테 돈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박두식은 갑자기 자기 입지가 급격히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 정말 더러워서. 별것 도 아닌 일 가지고 말이야. 야, 김창현! 어제 그 후보업체 골라 비교해 놓은 서류 가지고 이리 와 봐라.”
“뭐, 브로슈어 건 말이에요?”
“그래, 그거.”
창배는 박두식 전무의 방에서 들어오자마자 담당 직원을 불렀다.
“그러니까, 들어온 업체들 중 네가 정리해 놓은 이 두 업체가 제일 낫단 말이지.”
“예. 한 열 개 업체에서 우선 절반 정도를 골라 추리고, 그 중 검토한 결과 이 두 업체가 가장 믿을 만하더라고요.”
“이 업체들은 누가 추천한 사람이 있어?”
“이 우신기획은 우리 화성전자 기술부에 있는 한 대리의 작은아버지가 하는 곳이고 여기 산호광고는 연고 없이 들어온 데 에요. 전에 광고 대행사 에드 프라자에 있던 젊은 애들 몇이 나와 만든 업체인데 아주 기획력이 뛰어납니다.”
“얼마 전에, 내가 준 서류 있었지. 대영 인가 뭔가 하는…….”
“예.”
“그곳은 어때?”
“거기는 안돼요. 그간 했다는 실적을 봐도 그렇고 해서, 아예 처음부터 배제시켜어요.”
“어휴, 이거 갑자기 머리가 터질 것 같네.”
“왜, 무슨 일 있었어요?”
“씨발, 박 전무 새끼가 무조건 그 업체에다 일을 주라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어? 그러면 안 되는 데. 이 두 곳 중 한 곳을 결정하도록 이미 품의서를 다 꾸며 놨는데.”
“누구, 전화 받으세요?”
창배가 김창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직원 최미정이 전화를 받았다.
“누구야? 최미정 씨.”
“한번 받아 보세요. 화성건설 조영기 사장 여비선데 브로슈어 담당자가 누군지 바꾸래요.”
“놔둬 봐, 내가 받을 게.”
창배는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뭐, 사장님이 찾는다고? 알았어. 곧 갈게.”
“무슨 일 이예요?”
“조영기 사장이 담당자 오라는 데.”
“제가 가요?”
“놔둬. 내가 얼른 갔다 올게.”
창배는 조금 전 박두식 전무와의 일로 미루어 조영기가 몹시 열받고 있는 걸 짐작했다.
“그 서류 이리 줘 봐.”
창배는 김창현이 만들어 놓은 기안 품의서에서 해당 업체 비교표를 빼 들었다.
자기 방에서 실내 골프 연습기로 퍼팅 연습을 하고 있던 조영기는 창배가 들어서자 힐끗 쳐다보곤 계속 연습에 몰두했다. 순간 창배는 서 있기가 어정쩡했지만 그의 눈치를 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그 구멍 되게 안 들어가는구먼.”
“……!”
“에이. 오늘은 그만 넣자.”
조영기는 퍼트를 벽에 세워 놓곤 수건으로 손을 문지르며 의자에 가 앉았다.
“당신이 그 브로션가 책자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야?”
“예. 밑에 담당 직원이 있고 제가 바로 그 위에 있습니다.”
창배는 조영기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지만 잠자코 대답했다.
“당신은 직급이 뭐야?”
“과장입니다.”
“내가 담당자하고 부장이 있으면 함께 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전달이 잘못됐나?”
“예. 담당자 오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여비서가 전달을 잘못했구만. 미친년!”
“…….”
“내가 왜 오라고 했는지 알아?”
“예. 박 전무한테 대략 얘기 들었습니다.”
“그럼, 빨리 그대로 시행해.”
“그런데 거기는 문제가 좀…….”
“이 새꺄, 문제고 뭐고 필요 없어! 오늘 중으로 당장 그곳으로 결정해서 박 전무 보고 나한테 직접 와 보고하라고 해!”
“그렇지만…….”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냐?”
조영기는 창배를 칠 듯이 노려봤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하죠.”
‘에이, 그래. 이 씨발 놈아! 장차 네 회산데 다 말아먹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창배는 속으로 생각하며 조영기의 방을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창배가 화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김창현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당장 대영에 연락해 사장 들어오라고 해. 씨발, 그 업체하고 도대체 어떤 관계기에 그리 난리를 죽이는 거야. 빨리 들어오라고 해. 그 사장 새끼 얼굴 한번 보자.”
“무슨 일 있었어?”
조영기 사장 방에 들어갔던 창배가 들어 와 씩씩거리자 그때까지 자기 자리에 조용히 있던 박순업 부장이 다가와 물었다.
“조영기 사장 워낙 그럽니까? 마치, 무슨 양아치 새끼를 만나고 온 것 같습니다.”
“그 양반이 좀 그래. 회장이 아들 하나라고 애지중지 키웠으니……. 기분 나빠할 것 없어. 그 밑에 나이 많은 임원들도 가끔 황당하게 당하고 그러거든.”
박순업은 해외지사에 있을 때 결혼하기 전의 총각인 조영기가 놀러와 망나니 짓 노릇 한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막무가내일 수가 있습니까.”
“참아, 최 과장이 참아야지, 뭐, 회장님 아들인데. 똥이 무서워 피하나.”
창배는 박순업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가라앉혔다. 창배는 박순업이 일에 적극적으로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런 조직의 생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순업 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마을을 가라앉혔던 창배는 전화를 받고 달려온 대영의 사장을 보자 금세 화가 다시 치솟아 올랐다.
“그러니까 정말 당신이 사장이란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창배는 대영 사장의 명함을 받아들고는 명함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허, 이럴 수가……!”
대영에서 사장이라고 들어 온 사람은 기껏해야 스무 살 초반이나 중반쯤이나 됐을까. 대학생이거나 이제 대학을 갓 졸업했을 새파란 젊은이였던 것이다.
“당신, 잠깐 이리 좀 와 봐.”
창배는 그를 옆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 좀 앉아.”
그는 조심스레 창배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네 실적을 보니 아주 미비한 것 같던데 이 일을 한지는 얼마나 되는데?”
“저어…… 시작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습니다. 작년에 창업했어요.”
“이 일을 하려면 당장 해외에도 나가고 해야 되는데 당신들이 할 수 있겠어?”
“일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어, 그거 참. 좋아. 그럼 당신 오늘 계약서 쓰게 되면 이 개월 내로 납품시켜야 돼. 만일 기간 내에 납품을 못하면 위약금 물 각오하고.”
“어, 얼마를 물어야 하는지…… ?”
“뭐? 얼마나 물어야 되냐고? 이런, 제길…….”
창배는 답답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당신은 조영기 사장과 어떤 사이야? 어떤 관계가 있기에 그렇게 백이 좋은 거야?”
“…….”
“말해 봐. 괜찮아.”
“조……, 좀 말씀드리기가 그렇습니다.”
“말해봐. 나중에 다 알게 돼.”
“…….”
“말하기 싫어? 그럼, 관 둬.”
“……저, 실은 저는 잘 몰라요.”
“뭐……, 몰라?”
“예. 제 누나가 소개를 해줘서.”
“누, 누나가…… ?”
“예. 사촌 누나가 있는데 화성그룹에 한번 들어가 조영기 사장님을 만나 보라고 해서.”
“그 누나가 뭐 하는데?”
“백화점에서 수입 의류점을 차려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만나서 제가 이것을 한다고 하니, 조 사장님을 만나 보라고 해서…….”
“누난 몇 살인데?”
창배는 나이까지 물어보고 괜한 질문을 했다고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저보다 두 살이 많아요.”
“당신 나이는?
“스물일곱이요.”
“그래? …… 그랬었군.”
스물아홉 나이와 마흔일곱의 거의 스무 살 차이라. 순간 창배의 머릿속엔 어떤 밑그림이 그려졌다.
“좋아. 열심히 한번 해 봐. 설사 당신네가 초짜라도 우리가 열심히 도와주면 그리 어려울 것은 없을 거야. 우린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니까. 우린 모두 프로페셔널들이라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어……, 그런데 말이지.”
“예?”
“혹시. 당신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타부서와 달리 우리 부서엔 돈이 좀 필요한 때가 많거든. 우리는 그것을 통상 홍보 추진비라고 하는데, 부서 특성상 돈 쓸 곳이 많단 말이지. 그렇다고 회사에다 마냥 보태달라고 할 순 없잖아. 안 그래?”
“아, 예…….”
“난, 이걸 정말 나이도 어린 당신한테 얘기하고 싶지가 않은데.”
“염려 마세요. 저도 그쯤은 들어 알고 있어요. 얼마 되진 않지만 준비해 왔어요.”
대영 사장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하나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오백인 데요. 수표로 다섯 장 넣었어요.”
“하, 이러면 정말 내가 조영기 사장님을 볼 면목이 없어지는데.”
“아무 염려 마세요. 과장님 하고 저와 단둘만의 비밀인데요, 뭐.”
“좋아, 당신 맘에 든다. 아주 잘 할 것 같다.”
***
“김창현 대리, 계약서 들고 안에 들어가 봐! 그리고 결재 지금 바로 올려. 오늘 중으로 끝을 내자고. 에이, 머리 아파. 조 사장이 별걸 다 참견해 가지고…….”
창배는 회의실에서 나오며 김창현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그리고, 이거…….”
창배는 김창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슬쩍 수표 한 장을 그의 수첩 밑에 밀어 넣었다.
“새끼가 조영기 사장 소개로 왔다고 겨우 이백으로 입 닦네. 백씩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