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근무할 만하냐?”
조만호는 의자에 앉아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정아에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네가 근무하던 은행보다야 번잡하긴 하다만, 그리 힘들진 않을 거다.”
“힘든 건 없어요.”
“봐서 적당한 때 과장으로 승진시켜 줄 테니, 그리 알고 있어. 너를 처음에 데려올 때 과장직급으로 데리고 오려 했지만 다른 여직원들이 불만 삼을까 그럴 수 없었어.”
“지금 대리 직급도 나쁘지 않아요.”
정아는 왜 회장이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화성그룹에 오고 나서 그간 한 번도 꺼내지 않던 이야기였다.
정아는 대리나 과장이나 별 직급의 차이를 못 느끼고 있었다.
실무 부서에 가면 그 직급에 걸맞게 상사와 부하직원들도 있겠지만 단지 회장만 바라보고 있는 비서인 자기로서는 직급은 무의미했다.
같이 근무하는 다른 세 명의 비서들 중 회장의 건강을 매일 체크하는 간호대학을 졸업한 대리가 그 중 나이가 좀 있긴 해도 정아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려 모두 자기에게 윗사람 대우를 해주고 있고 더구나 돈으로 따진다 해도 대리 최고 호봉인 자신의 급여와 과장 초임과는 차이가 나질 않아 직급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나는 그래도 네가 혹시라도 자리를 옮긴 걸 후회할까 싶어 그런다.”
“저 후회하지 않아요.”
“호,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조만호는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정아의 손 위로 슬쩍 자신의 손을 올려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정아는 순간 흠칫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깨를 주무르라고 했을 때는 약간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이가 있으니 피곤해 그런가 보다 그러려니 이해를 했었다.
그러다 한 번은 어깨를 주무르는데 슬그머니 회장의 손이 올라올 때는 깜짝 놀랐으나 회장은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참고 넘겼는데 그 후 더 이상의 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즈음, 회사에 별 이상한 일은 없느냐?
조만호는 어깨가 시원한지 느긋하게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내 분위기가 어떤가 말이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비서면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쫑긋 귀를 세우고, 행여 작은 거라도 있으면 말을 해 줘야 돼. 가끔 내가 모르게 벌어지는 일이 종종 있거든.”
“…… ?”
“전자 쪽에 있는 임원 하나가 아주 평이 안 좋아. 상가하고 집이 몇 채씩이나 된다는 소문이 있어.”
“…….”
“내가 요즘 걱정이 늘었다. 주위에 사람은 많은 데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같고…….”
“…….”
조만호는 말을 하면서도 정아 손등 위에 올려놓은 손을 뗄 줄 몰랐다.
“됐다. 이제, 그만하고 다리 좀 주무르겠니?”
조만호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탁자 위로 쭉 펴 올려놓았다. 정아는 순간 어떡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자신이 당황해하는 걸 회장이 알게 되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정아는 허리를 굽히자니 어정쩡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낮게 앉았다. 자꾸 블라우스 안이 신경 쓰였다.
바로 옆의 회장이 시선을 내리깔면 속 안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한 십 분이 지났을까 정아의 이마엔 땀이 돋기 시작하는데 회장은 가만히 미동도 없었다.
“헉……!”
정아는 갑자기 놀라 자지러졌다. 조만호의 손이 정아의 블라우스 속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
박순업 부장이 퇴근해 집에 들어오자 집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시간이면 작은 애는 학원이 거의 끝날 시간이라 곧 집에 들어올 테고, 고등학교 3학년인 큰 애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아마 바로 도서실로 갔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 종일 집을 비워 문들이 닫혀 있던 집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을 주었다.
박순업은 저고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곤 베란다 문과 주방 쪽 문들을 모두 열어 놓고 아이들 방문도 활짝 열었다.
주방엔 아침에 아내가 나가며 담가 놓은 그릇들이 그대로 설거지통에 담겨 있었다.
박순업은 담배에 불을 붙여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문득 허망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화성그룹 입사시험에 척하니 합격했을 때는 주위에서 모두 부러워하고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었는데 거의 십칠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명색이 기업체의 부장인데 애들 학원비 등 교육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가 식당 일을 하긴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할 순 없었다.
남들처럼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자신이 봐도 남이 삼킨 걸 등을 쳐 뱉게 해 주워 먹을 자신도 없었다.
오랫동안 해외 건설현장에 근무하다 공사가 모두 끝나 본사에 들어와 대기 상태로 있던 자신은 그나마 벌써 회사를 그만 둘 입장이었지만 회장이 해외현장에 오게 되면 안내를 도맡아 했던 게 인연이 되어 맞지도 않는 홍보실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게 벌써 일 년이 돼 가지만 그 자리는 자기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늘 거북살스러웠다.
자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그간 국내에 있던 영악 한 친구들은 부동산이다 뭐다 해서 자리들을 다잡아 웬만한 어려움에도 흔들림이 없지만 지금 자신은 그저 아이들 학원비조차 대기 힘들 정도로 저만치 뒤처져 있었다.
그때마다 박순업은 동물원에 갇힌 낙타가 사막을 그리워하듯 어서 해외에서 큰 공사가 터져 줘 현장이며 발주처를 쫓아다니며 뛰어다녀야 숨통이라도 좀 트일 것 같았다.
“당신, 언제 왔어요?”
박순업은 문소리가 나자 작은 놈인 줄 알았는데 그의 아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 왔지, 뭐.”
“식사 안 했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밥 차려 드릴게요.”
“작은 애 올 텐데, 기다렸다 같이 먹지.”
“오늘 좀 늦어요.”
“왜?”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가기로 했대요.”
“영화?”
“예. 뭐 재미난 영화를 하는데 친구들하고 보겠다고 하도 징징거려 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건 뭐야?”
박순업은 아내가 비닐봉지에 담긴 것을 접시에 쏟아붓는 걸 보고 물었다.
“가자미 식혜예요. 단골 상에 조금씩 올리는 건데 주인아줌마가 좀 가져가라고 담아 줬어요.”
“…….”
박순업은 말없이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요즘은 매일 반주로 이렇게 한 잔이라도 하지 않으면 쉽게 가슴속 응어리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명색이 부서장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자기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게 돼 버린 사무실 분위기. 가끔씩 그것은 늘 자신을 이방인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당신 마음 알아요.”
박순업이 점차 취해 가는 것을 보던 그의 아내가 말했다.
“뭘?”
“당신 직장 사표 내고 싶어 하는 거. 그리고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것 때문에 기분 안 좋은 것도.
“…….”
“그냥 힘들어도 꾹 참아요. 또 알아요? 내일이라도 해외공사가 터져 당신 같은 사람이 나가게 될지. 저는 당신이 매일 눈뜨고 나가는 일터가 있는 것만으로 그냥 감사해요.”
“알았소.”
그는 말하며 술이 반쯤 든 잔을 집어 들었다.
그 말엔 낙타가 사막으로 다신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이 묻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