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 이 부장이 생각을 한번 해 봐. 방안이 서면 내가 그대로 밀고 나갈 테니. 이 부장이 홍보까지 맡게 되면 나중에 이사 진급도 빠를 테고 나도 좋은데, 참 뾰족한 방법이 없네.”
박두식 전무 방에 들어간 이진영은 결재가 끝나고도 한 시간 째 그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총무, 회계 등 화성그룹 내 각 부서를 두루 돌아 업무를 섭렵했지만 아직 홍보 쪽 업무만 접해 보지 않았다.
화성그룹을 출입하는 기자들의 공간인 기자실이 기획실과 홍보실이 함께 쓰고 있는 사무실 한쪽에 별도로 마련돼 있어 이진영은 최창배가 홍보실로 찾아오는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은 고작 우물 안의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많은 업무를 알고 그 업무에 뛰어난 능력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화성그룹이라는 한정된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먼 앞날을 생각해 그룹 내 머무르기보다는 바깥으로 두루두루 길을 넓혀 연을 넓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화성 내에서 손쉽게 사장도 한번 하고 나중에 대학 때 마음에 두고 있던 정치 쪽으로도 한번 나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진영이 이런 생각을 하자 홍보실을 수중에 넣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불길같이 일었다. 지금 당장은 홍보 업무를 꿰차고 있는 눈엣가시 같은 최창배가 있지만 일단 홍보 업무만 맡게 된다면 당장이라도 그를 다른 부서로 쫓아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홍보에서 외부로 나가는 그룹 관련 자료는 기획실의 협조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 뒤엔 화성의 하나회 수장 같은 대학 선배 박두식 전무가 굳건히 버티고 있으니 빠르게 그 업무에 적응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또 하나 박순업 부장이 있긴 하지만 이미 이진영의 마음속은 홍보실 허수아비 박순업은 그 안중에도 없었다.
“기획실과 홍보실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면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조직을 다시 한 번 흔들어야 되니 이렇게 되면 기구가 축소가 되는 건데, 그럴 순 없고, 이거 참, 머리 아프구먼.”
박두식도 어서 이진영을 홍보실에 앉혀 놓고 적당한 시기에 최창배를 날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게만 되면 이제 그룹 내에서는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그때 광고료로 최장배를 한번 애 먹인 이후 창배 그놈은 자신에게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업무를 잘 모르니 홍보 업무와 관련해서는 회장실에 들어가도 제대로 답변을 못하니 박두식은 아예 죽을 지경이었다.
자꾸 그러다 보니 얼마 전부터는 조만호 회장도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최창배를 부르는 눈치였다.
더구나 회장이 돈까지 직접 챙겨 주는 것 같은데, 최창배 그 새끼가 크렘린 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돌아가는 내용들을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박두식은 자기의 수족인 약삭빠른 이진영을 데려다 놓고 회장실에 창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일은 자연스레 해결이 된다고 생각을 했으나 그것 마자 뾰족한 해결책이 없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여의치 않자 이래저래 미칠 지경이었다.
“아! 전무님,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앉아 입으로 계속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이진영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이미 침독이 올라 허옇게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뭐, 생각난 것 있어?”
“저를 전무님처럼 겸직 발령을 내면 되잖아요!”
“뭐? 그렇지! 그럼 되겠군. 그렇게 되면 기획실과 홍보실의 틀은 흔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가 되는 거구만.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여태 고민을 했네. 그럼, 박순업 이는……?”
“그거야, 적당히 전무님이 알아서 하면 되죠.”
“저기 어디 현장으로 보내버리면 되겠군. 좋아! 그럼 당장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건 내가 인사실장한테 협조 공문 하나만 보내면 되니 더 두고 볼 것 없이 지금 바로 하자고.”
“저는 그만 갈랍니다. 전 모른 척 빠질 테니 전무님이 조금 있다 우리 직원을 불러 공문 작성하라 지시하십쇼.”
박두식 전무 방의 문이 열리고 이진영이 나오자 문 앞 책상 의자에 앉아있던 김윤희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허겁지겁 돌아가는 이진영의 뒷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다보았다.
***
“최 과장! 이, 이리 좀 나와 봐!”
홍보실 안에 있는 기자실에서 직원들과 내일 자 초판 신문을 체크하던 창배는 밖에서 박순업의 다급한 소리가 나자 얼른 홍보실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 이예요?”
창배는 곧바로 박순업 부장이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박순업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본 창배는 놀라 절로소리가 튀어 나왔다. 방금 인사실에서 보낸 인사명령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
“……이진영이…… 홍보실을!”
창배는 놀라 황당했다. 기획실 부장인 이진영이 기획실과 홍보실을 겸직하는 것으로 겸임 발령이 나고 그 밑에 박순업 부장은 전주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발령이 난 인사 명령이 올라왔다.
창배는 단박에 박두식과 이진영 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챘다.
“결국…… 이렇게……!”
“나한테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이렇게 하면 어떡해!”
“이걸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몰랐어. 전혀…….”
“개 새끼들, 이따위로 일 처리를 하다니…….”
순간 창배의 머리엔 빙글빙글 웃고 있을 박두식과 이진영의 얼굴이 교차되며 지났다. 창배는 이진영의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벗어 놓은 회사 잠바가 한쪽 팔은 속으로 말려 들어간 채 의자에 아무렇게 걸쳐졌다.
평소에는 꼭 박두식이 퇴근 한 후에야 나갔는데 오늘은 여섯시 퇴근시간이 되기 무섭게 나가 무슨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빨리 박 전무한테 전화 해 봐요.”
“해 보면 뭐 하겠어.”
박순업은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답답하긴. 그래도 빨리해 봐요. 그럼 그냥 쫓겨 가듯 전주까지 내려갈 거요!”
창배가 화를 내듯 말하자 박순업은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집으로 하지 말고 직접 박 전무 핸드폰으로 해요. 보나 마나 집엔 아직 안 들어갔을 테니.”
창배는 어디엔가 이진영과 박두식이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로선…… 어쩔 수 없었대. 위에서 내려 보낸 명령이라. 내일 아침 출근해 얘기해주려 했는데, 그렇게 빨리 명령을 내 보낼 줄은 몰랐다는데…….”
박두식과 통화를 마친 박순업이 말했다.
“이 씨발 놈들, 정말 사람 열 받게 하네. 야, 모두 가자. 술 먹으러. 그러고 있지 말고 나갑시다. 원, 소주라도 한잔 들이켜야 속이 풀리든가 하지.”
창배는 회사 앞에서 직원들과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박순업과 둘이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층은 시끄럽고 혼잡해 이층으로 올라가니 조용하고 드문드문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조금 전 홍보실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조용히 앉은 채 술을 별로 마시지 않던 박순업은 창배와 둘이 있게 되자 연신 잔을 비워댔다.
“이제 어떡할 거 요?”
“아…… 죽겠다!”
“죽으면 어떡해요! 형수하고 애들은 어떡하라고?”
박순업은 괴로운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최 과장, 내일 말이야, 박 전무한테 얘기를 한 번 더 해 보면 어떨까?”
“필요 없어요. 이미 다 끝난 상황이란 말요!”
창배는 순간 박순업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애들 때문에 어디 관두기라도 하겠어요? 내려가야지.”
“그래야겠지. 그런데, 이거 참…….”
박순업은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꾸 왜 그래요?”
“…….”
박순업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처음 시작하는 공사라면 공사가 발주된 후부터 바로 새 팀이 구성돼 들어가니 처음부터 서로 한 식구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겠으나 지금 공사 도중에 자신이 들어가 봐야 굴러온 밥그릇이니 눈치밖에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은 기술자도 아니고 직급도 관리부장이니 이래저래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지금 있는 홍보실에서도 직원들 보기가 떳떳치 못했는데, 공사 현장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박순업은 그런 것쯤은 충분히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눈뜨면 매일 나가야 할 직장이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에요.’
언젠가 아내가 한 이 한마디가 그에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거기에 있지 않았다. ‘
박순업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현장은 한 두어 달 지나면 공사가 바로 끝 날 예정이었다. 그럼 그 후에는 또 어떡해야 할지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 현장은…… 곧 공사가 끝나.”
“알아봤어요?”
“응.”
박순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하필 그런 현장으로…….”
창배는 잔을 들어 차가운 맥주를 단 숨에 들이켰지만 쉽게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내일 출근하면 짐 정리하고 바로 내려가요. 미적미적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내려가 낯을 익히는 게 낫지. 그리고 너무 걱정 마요. 공사가 끝나면 또 어떻게든 되겠지.”
“자, 쭉 들어요!”
창배는 이게 어쩌면 박순업 부장과 마지막 술자리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창배가 형과 만나기로 한 곳은 서대문의 한 허름한 음식점이었다.
이제 막 점심 손님들을 모두 치렀는지 종업원이 손님이 먹고 간 식탁 위를 부지런히 행주로 훔치고 있었다.
창배는 벽에 등을 대고 식탁 밑으로 길게 발을 뻗었다. 바닥이 뜨뜻해서인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깜박 졸았는가 싶었는데 주인이 인사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 문 쪽을 바라다보니 잠바를 입은 왜소한 형이 들어서고 있었다.
오랜 힘든 생활을 해서인지 얼굴이 많이 초췌해 있었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내가 아버지한테 연락을 좀 하라고 했는데 왜 안 했어?”
“연락을 하긴…….”
“형수는 잘 있어?”
“응.”
“그런데 왜 같이 안 왔어?”
“…… 일을 좀 해.”
“무슨 일을…… ?”
“마트에서 일해.”
“어이구, 꼴좋다.”
“그런데 너 점심은 먹었니?”
“식당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딨어?”
“그, 그런가?”
창배는 삼겹살과 술을 한 병 시켰다.
“그리고 지난번엔 참 고마웠다. 돈도 없을 텐데…….”
“미안해하지 말고 얼른 정신 차리고 재기할 생각이 나 해.”
“글쎄. 그래야 되는 데, 이렇게 한번 망가지고 나니 참 힘들다. 술만 한잔 들어가면 자꾸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던 그전 생각만 나고.”
“…….”
창배는 두 어 잔술에 금세 마음이 풀어지는 형 창식을 보고 많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창배는 그래도 자기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형은 당초 의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교대에 들어갔다.
그것은 집안이 어려워 빨리 졸업해 집안에 도움을 주려는 형의 생각 때문이었다.
젊어서 뚜렷한 직업 없이 평생을 그럭저럭 보내던 아버지는 그때 공사판에서 미장이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꼼짝없이 육 개월 가량을 누워만 있었다.
그때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선가 지금도 날만 궂으면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창배는 아무든 그때 형이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 온 덕에 자신도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학교 복직은 안 돼?”
“지금 와 학교는, 무슨. 그리고 무슨 체면이 있어 학교로 돌아가. 이제 다 끝났어. 지금은 당장 이것저것 눈앞에 걸린 것만 해결되면 무슨 일을 하던 애들 가르치는 일 이상으로 보람을 찾겠어. 이거 야, 못 살겠다. 이제 엄마 아버지도 나이가 있는데 더 이상 애들 맡기는 것도 그렇고. 네 형수는 밤이면 맨 날 애들 보고 싶다고 찔찔거리지…….”
“그만 마셔.”
창배는 방금 마신 잔을 채워놓자 바로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는 형을 보고 낮술이 과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괜찮아. 창배야, 그런데…… 삼겹살, 일인 분 만 더 시키면 안 되냐?”
창배는 몇 점 집어먹지 않았는데 접시 위의 고기가 금세 바닥난 것을 알았다. 창배는 종업원을 불러 이 인분을 더 가져오게 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요.”
창배는 주머니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형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냐…… ?”
“내가 가진 전부야. 한 칠천 정도 될 거야. 형 친구 보증 섰던 거 그게 제일 말썽일 거야. 그것부터 해결해. 그리고 이제 다시 보증 같은 것 하지 마. 설사 내가 보증 서 달라고 해도 말이야. 그럼 다시는 형을 안 볼 거야.”
“…… !”
창식은 놀라 식탁 위의 통장과 창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만 일어나. 그리고 당장 집으로 전화해 엄마한테 들어간다고 해.”
“창배야, 너, 너 이거 혹시 장가가려고 모아둔 것 아니냐?”
“나중에 형이 나 장가보내 줘.”
“고, 고맙다.”
“애들처럼 울긴…….”
창식은 눈에 눈물이 글썽 해지자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래, 그럼 나가자.”
창식은 통장과 도장을 조심스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너 오늘은 한가한가 보구나?”
“응. 휴가야.”
창배는 형이 떠난 후에야 당장 자기가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