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을 실사 한 후 인수하기로 마음을 굳힌 조만호 회장은 곧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화성그룹의 대진 인수 사실을 알리고 인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대외비로 할 것을 지시했다.
실사 결과 대진의 부채비율도 청록당 사무총장인 이영길의 말처럼 높은 것도 아니었고, 지난 몇 년간의 재무상태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나쁘지 않았다.
조만호는 그래도 좀 찝찝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오로지 이영길이 얘기한 김덕호의 외화 밀반출 때문임만을 자기 암시로 굳게 믿기로 하고 나머지 생각은 모두 지워 버렸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별문제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성의 인수 팀이 알아본 바로는 대진은 국내의 일곱 개 현장과 해외에 5개국에서 여덟 개의 현장을 갖고 있었다.
그중 말레이시아에서는 화성에서도 입찰에 참가했다가 탈락한 적이 있는 5억 3천만 불 규모의 대규모 리조트 공사가 제일 구미에 와 닿았다.
가끔 국내 일로 머리가 아플 거 같으면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조만호는 앞에 놓인 파일을 집어 들었다.
화성 인수팀이 작성한 대진에 대한 실사 보고서였다. 색인에서 철강사업 쪽을 펼쳤다.
화성그룹에도 건설 회사가 있어 건설 쪽은 알겠는데, 철강 쪽은 아주 생소했다.
“음. 20만 평이면 확실히 상당히 넓은 부지야.”
조만호는 부채를 안고 회사 여유자금 삼천억 원을 동원키로 했지만 처음 공장 터를 보는 순간 회사 돈이 아닌 개인 자금을 털어서라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공장이 들어선 부지는 조만호가 판단하기로 설사 철강 사업이 어려워 최악의 경우 접는다고 해도 수년 내에 아파트를 지어 팔면 그 몇 배의 수익이 나올 요지 중의 요지였다.
철강 쪽은 지금 호황이었다. 실사 보고서에는 이곳에서 연간 백이십만 톤의 철근이 생산된다고 나와 있었다.
조만호는 시설을 보완한 후 내년에는 백오십만 톤, 다음 해는 이백만 톤까지 생산 물량을 늘릴 생각이었다.
건축공사에 많이 사용되는 철근 고장력 10미리 가격이 톤당 칠십만 원을 호가하니 어마 어마한 매출에 곧 대 그룹 군에 속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흡족했다.
“웬 전화야?”
조만호는 책상 위에 놓인 직통 전화의 벨이 울리자 뚫어지게 바라봤다.
자신을 찾는 전화가 있으면 연결하지 말라고 비서실에 지시를 해놓았지만 이 직통전화는 번호를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조만홉니다. 아…… 총장님!”
이영길의 전화를 받은 조만호는 털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제저녁에 요정 대원에서 모처럼 거나하게 한 잔 하고 돈이 든 상자 3개를 실어 보냈다.
그리고 아침에 고맙다고 전화까지 왔었는데 또 연락을 해 온 걸 보면 혹시 대진 인수에 제동이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네? 언론에요?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까까지 그런 말씀 없으시더니.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호는 전화를 마치고 나자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별일은 없겠지만 언론에 신경을 써서 혹시 있을지 모를 말썽의 소지가 없도록 하라니,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일은 없겠다고 했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가. 아니면 인수 시 의례적으로 한 번씩 겪을 수 있는 단순 특혜성 시비에 대한 염려를 한 것일까 궁금했다.
조만호는 곧 인터폰을 해 비서에게 박두식 전무를 들어오라고 호출했다. 그러나 마침 박두식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럼, 그 밑에 직원 오라고 해!”
조만호는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느긋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나더니 직원 하나가 들어왔다. 이진영 부장이었다.
이진영은 소파 의자에 앉아있는 조만호 앞으로 다가서더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
조만호는 앞에 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넨 기획실 직원이 아닌가? 난 홍보실 직원을 찾았는데.”
“며칠 전부터 홍보실 겸직을 하고 있습니다.”
“자네 말고, 그 직원 있잖아. 최 과장 말이야. 그 친구 오라고 해.”
이진영은 회장이 찾는 이가 바로 최창배 임을 알곤 아주 곤혹스러워했다.
“저어…… 최 과장은 지금 휴가 중인데요.”
“뭐, 휴가?”
“…… 예.”
“이런, 미친놈!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한가하게 휴가야! 빨리 연락해 오라고 해!”
“예. …… 알겠습니다.”
이진영은 회장실을 나오면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회장이 자기를 제치고 최창배를 찾는 것도 그렇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최장배를 당장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그도 그렇고 최창배가 들어와 만일 회장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면 당장 자신의 거짓말이 금세 탄로가 날판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최창배가 오지 않자 조만호 회장은 박두식과 인사실장까지 호출해 난리를 쳤다.
***
그날 저녁 집에서 정아로부터 회장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은 창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대진 인수와 관련된 일이라 지레 짐작한 그는 일부러 회장이 찾는 것을 알면서도 이틀이나 집에서 더 뭉그적거리다 출근했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자넨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
창배는 잠자코 있었다. 이미 정아로부터 회장이 인사 발령 사항을 알고 있으며 자기가 그럴듯하게 살을 더 붙여 놓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대진을 인수할 예정이니 빨리 준비하게.”
“예? 대진을 요?”
“그래. 그런데 왜 그리 놀라나?”
“대진 침댑니까, 아니면 대진 주식회삽니까?”
창배는 짐짓 모른 채 엉뚱한 침대 회사를 끄집어냈다.
“인천에 철강 공장이 있는 대진 말이야.”
“언제쯤 하게 됩니까?”
“삼 일 후에 계약서에 도장 찍게 되니 서둘러야 해. 필요한 자금은 빨리 와 얘기하고.”
“저어,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는데요.”
“청이라고?”
“예.”
“그게 뭐야?”
조만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창배를 쳐다봤다.
“이번에 난 인사 발령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그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나?”
“지금은 이 일을 제가 말할 사람이 없는 상황입니다.”
“…….”
조만호는 말없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좋아. 그렇게 하겠네. 그렇지만 이번 일은 한 치의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되네. 약속하게.”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야?”
“지금 지시하신 이 사항과 관련해서는 제가 회장님께 직접 와 보고하게 해 주십시오.”
박두식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웬 단서가 그리 많은가? 좋아, 그럼 그것도 그렇게 해.”
조만호는 곧 대마를 먹게 되는 마당에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
회장실에서 나와 창배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새로 홍보부장을 맡게 된 이진영이 힐끗 쳐다봤으나 창배는 아예 그를 무시키로 했다. ‘
‘ 조만호 회장에게 든든한 다짐을 받았으니 어디 내색을 않고 돌아가는 꼴을 두고 보기로 했다.
이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집에서 대강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온 창배는 성도일보의 김무웅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김무웅 기자는 창배의 대학 선배로 산업통상자원부에 출입하는 차장 급 기자였다.
“형님이요?”
“응. 웬일이냐?”
“지금 바빠요?”
“응. 무슨 일이야?”
“내 뭐 좀 물어볼게 있는데. 사무실에 있는 거요?”
“응. 지금 막 들어왔어.”
“내 지금 그리 나갈 테니 꼼짝 말고 있어요. 저녁이나 같이 하게.”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창배는 김무웅과 성도일보 앞에 있는 김치찌개 집에 마주 앉았다.
“무슨 일이야?”
“대진 말입니다.”
“대진…… ?”
“예.”
“대진이 왜…… ?”
“그거 우리가 인수합니다.”
“뭐, 정말이야?”
“예. 그런데 이건 발표 때까지 엠바고로 해줘야 합니다.”
“언젠 데?”
“삼 일 후요.”
“대진이 갑자기 왜 그래? 요 근래 들어 조금 어렵다는 얘기는 듣기는 했는데, 요즈음 어렵지 않은 기업이 있나. 그런데 벌써 그 정도까지 됐나?”
“그래서 말인데요. 철강 쪽 기자들하고 인사나 하게 자리 한번 만들어 줘요. 건설 쪽 담당 기자들은 알겠는데 그쪽은 내가 통 모릅니다.”
“내가 그쪽을 담당하고 있으니, 그건 어렵진 않은데…….”
김무웅은 좀 찜찜한 생각이 들어 그 쪽 사정을 좀 더 알아봤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자, 이건 아까 전화로 부탁한 각 언론사 철강 담당 기자 명단이야. 한 달 전에 새로 만든 건데 그간 혹 출입처가 바뀐 사람이 있을지 몰라.”
“그건 확인해 보죠.”
“그런데, 언제쯤 만나게?”
“삼일 후면 계약 체결을 하는데 그날 저녁에 어떨까요?”
“그날 기사 쓰느라 바쁠 텐데 시간들이 있을까? 일단 보도 자료는 나갈 거니 자리는 그 후에 만들어도 되잖아.”
“그날 해치웁시다. 아예 단체로 오입할 생각으로 느지막하니 만나 한번 놀죠, 뭐.”
“그런데, 혹시……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얘긴데…….”
“뭔데? 얘기하세요.”
“저어, 촌지 같은 거 돌릴 생각은 하지 마.”
김무웅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출입 기자 중에 나이가 제일 많고 기자 생활을 오래 해 많은 걸 봐 왔던 감각일까.
김무웅은 갑작스레 대진이 화성에 넘어가는 것도 자신이 보기에 석연치도 않았고 이 또한 혹시 동료 기자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지 알 수가 없어 아직은 조심스러웠다.
“참, 형님도.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걸 돌립니까? 염려 말고 내일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생각이나 하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