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번 도로를 타고 청평 검문소에서 죄 회전해 들어가는 길은 철 지나서인지 토요일인데도 한적했다.
여름 한 철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밀려드는 사람들의 나들이 차량의 물결로 그야말로 늘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창배는 이순옥과 늦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이 산 중턱 높이 자리해 있어서인지 길 맞은편으로 하천 물줄기가 보이고 그 끝은 뱀 허리같이 산을 휘감고 돌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생활한복을 입고 턱 수염을 기른 남자가 마른 녹차를 띄운 잔 두 개를 갖다 놓으며 자기가 직접 재배해 말린 것이라 했다.
그러나 창배는 남자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지난여름 정아와 이곳에 왔을 때 그의 아내 되는 사람이 밖에서 찻잎을 팔러 온 사람과 가격을 놓고 흥정을 벌리는 것을 본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난 창배는 시장기를 느꼈다. 그것은 이순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회사에서 열두 시 가 되자마자 각자 서둘러 나와 회사와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 빨리 가 목적지인 춘천에서 요기를 할 생각으로 출발했으나 대성리 부근에서 앞서가던 차가 사고로 그 수습이 더뎌지자 돌아올 때 너무 늦을 것 같다는 이순옥의 제의로 할 수없이 이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시간은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네 시가 거의 되어 가고 있었으나 그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털보는 산채비빔밥 두 그릇과 파전과 항아리에 담은 동동주를 놓고 갔다.
창배는 대충 밥을 떠 넣으며 그때까지 숟가락으로 밥을 비비고 있는 순옥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손가락에 자기가 사 준 반지가 보이지 않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 한잔합시다.”
창배는 항아리 속에 담긴 표주박으로 잔에 술을 채워 순옥에게 건넸다.
“전 술 잘 못해요.”
“한 잔 정도는 괜찮아요. 이 집이 이걸로 아주 유명한 집입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보죠?”
“아니, 두 번 쨉니다. 지난여름에 아버님을 모시고 한번 왔었죠. 아버지가 막걸리를 좋아하시는데 이걸 한번 잡숴 보고는 그 맛에 아주 그냥 혹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와서 이 술을 보니 그때 아버지 생각이 몹시 나는군요.”
“그럼, 아버지가…… ?”
“예. 집에 계세요.”
“…… ?”
창배는 처음 만난 여자를 꼬실 때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막걸리나 이런 동동주 같은 게 딱 제격이라 생각했다. 달착지근한 맛에 별 거부반응 없이 홀짝홀짝 입을 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금방 확 취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자 입에서 나는 그 냄새는 고역이었다.
“처음에 제가 갑자기 드라이브하자고 했을 때 혹 놀라지 않았습니까.”
“같은 직장 동료인데 뭐 어때서요?”
“동료는 다 괜찮은 겁니까?”
“예?”
“아, 아닙니다.”
“성폭행 당하는 여자아이들의 경우 그 가해자들은 대부분이 주위의 친지나 아는 사람들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요.”
“그건 무슨 뜻이죠?”
“아무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일전에 그 반지, 별론 가 봅니다”
“아, 그거요?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회사에서만 끼는데 오늘은 깜박하고 사무실 책상에 넣어두고 왔어요.”
“예? 남편이오? 아니, 그럼…… 결혼을 했습니까?”
“어머, 그럼 모르셨어요? 애가 세 살 이에요.”
“이런, 멍청하긴.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럼, 최 과장님은 아직 미혼…… ?”
“예. 아직 못 갔습니다.”
“어머, 그렇구나!”
“그런데 남편 가진 여자가 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니 선뜻 따라 나선 겁니까?”
“그거야 뭐…….”
창배는 이순옥의 입을 통해 그의 남편이 조만호 회장 여동생의 아들이며 지금 화성 증권 부산지점에 근무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순옥은 조만호 회장의 조카 댁인 셈이었다.
이순옥은 이 년 전 남편이 서울에 근무할 때 여직원을 건드려 말썽이 나 부산지점으로 쫓겨 가듯 내려가게 되어 무료해지자 시어머니를 채근해 결혼 전에 다른 회사에서 경리로 근무하던 경력으로 화성그룹에 대리로 입사하였다.
창배는 순옥이 인척이 되는 점도 있지만 똑똑해 그랬는지 일 년 전부터 조만호 회장의 눈에 들어 회사 자금 을 맡아 관리를 해오고 있음을 알고는 은연중 비자금도 관계하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부군께서 부산에 계시면 혹시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을지도 모르겠네요?”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은 올라오니까요.”
처음에 꺼리던 순옥은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활달하게 모든 얘기를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순옥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용기를 얻어 장난기가 발동한 창배는 상 밑의 발로 슬쩍 치마를 입은 순옥의 다리 사이를 건드렸다. 순간, 순옥은 움찔하더니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요것 봐라’
창배는 이번에는 다리사이로 발을 슬쩍 집어넣었다. 그러자 순옥은 다리를 살짝 벌리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창배는 순간 아래가 뻣뻣해 옴을 느꼈으나 애써 억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궁금한 사안들이 꽤 많았다.
어제 자기가 전해 받은 팔천만 원뿐만 아니라 회장이 주는 그런 돈들은 도대체 어디에 쌓아두고 있는지 또 순옥으로부터 돈을 전달받는 사람이 자신뿐 아니라 또 화성에 누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창배는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회사 장부에 잡히지 않고 나가는 돈의 액수가 상당하리라 생각했다.
회장의 가장 측근에 있는 여 비서인 정아도 전혀 모르는 이 사실이 순전히 이 앞에 지금 자신의 발끝 하나로도 몸이 달아있는 이 여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자 창배는 서두를 것 없다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만 가실래요?”
“예?”
“집에 가셔야죠. 오늘은 토요일이라 애 아빠가 오실지도 모르는데.”
“아, 예…….”
순간 창배는 이순옥의 얼굴에 실망의 표정이 스쳐 지나는 것을 재빨리 읽었다.
“순옥 씨! 저는 말이에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거든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창배가 말했다.
“뭔 데요?”
“혹시, 오해하실 까 봐.”
“괜찮아요.”
“순옥 씨가 가져오는 그 돈은 도대체 어디서 가져오는 거요? 회사 어디 쌓아 보관하는 데라도 있는 거요?”
“…….”
순옥이 아무 말 없이 운전하고 있는 창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자 창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
순옥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창배는 샤워를 하면서 식당에서 자신의 발끝으로 쉽게 달아오른 순옥의 벗은 몸을 상상하다 갑자기 아래가 빵빵해 지는 것을 느끼자 천천히 수음을 했다.
아주 오랜만에 해서일까, 그는 아주 색다른 감흥을 느껴 가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친 창배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들고 침대에 앉아 정아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어디야?”
“지금 막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어떻게 일찍 끝났나 봐.”
“응. 피곤해 일찍 들어왔어. 술 상무 노릇도 힘들어 못해 먹겠다. 이러다 장가가보지도 못하고 일찍 요절하는 건지 모르겠다.”
“말이 씨 된대. 그런 말하지 마.”
“근데 너, 나 방금 샤워하면서 뭐 했는지 알아?”
“샤워하면서 뭘 해?”
“마· 스· 터· 베· 이· 션.”
“술도 안 취한 것 같은데 무슨 헛소리야?”
“후후, 정말이야. 너의 벗은 몸을 상상하면서 했단 말이지.”
“아휴. 정말 주책이야.”
“정아야, 우리 결혼할까?”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뭐. 어……? 잠깐만…… 아니, 정아야, 나중에 내가 다시 할게. 이, 이만 끊어 봐!”
정아와 전화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눈이 가 있던 창배의 시선은 그대로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붙박여 움직일 줄 몰랐다.
화면은 고철 원자재 부족으로 철근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나마 구하지를 못해 건설현장들이 애를 먹고 있다며 공무원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고철 모으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내 보내고 있었다.
“저, 저거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생각했는지 창배는 곧 현장에 나가있는 박순업 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바로 이어졌다.
“저 창뱁니다.”
“어? 그래, 웬일이야?”
“지금 집입니까?”
“현장이지, 왜 집이야?”
“토요일인데 왜 안 올라왔어요?”
“공사 준공이 얼마 남지 않아 바빠. 나만 빠져 올라가기도 그렇고…….”
“뭐 해요? 지금…….”
“그냥 있지. 뭐…….”
“독수공방 그러고 있지 말고 나가서 술이라도 마시지.”
“술은 뭐…… 그런데 무슨 일이야?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박순업은 저녁 늦게 창배가 전화를 걸어오자 자기 인사와 관련한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줄 알고 반색해 물었다.
“그게 아니고, 뭐 좀 물어볼게 있어요.”
“뭔데?”
“지금 뉴스를 보니 고철 원자재 부족으로 철근이 모자라 건설 현장마다 애를 먹고 있다는데 거긴 어때요?”
“응. 그 뉴스 지금 나도 보고 있어. 지금 난리야. 내가 지금 있는 현장이야 공사가 다 끝나 이제 지장은 없는데, 우리 옆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아파트 현장들은 아주 난리가 났어. 톤당 70만 원하던 철근 값이 100만 원까지 오르고 그나마 현찰 갖고도 살 수가 없어. 오죽했으면 현장소장들이 우리가 인수한 대진에 철근이 나오는 걸 알고 그곳을 통해 좀 살 수 있나 알아봐 달라고까지 하겠어. 하긴, 현재 있는 철근 재고가 한 며칠 있으면 바닥이 난다니 그렇게 되면 곧 공사를 중단해야 할 텐데 어쩔 수 없겠지.”
“알았어요. 끊어요.”
“이, 이봐……! 최 과장!”
박순업은 창배를 불렀으나 이미 전화가 끊어진 상태였다.
박순업이 이곳 현장에 내려온 지도 곧 두 달이 되어간다.
당장 객지에 내려와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거야 오랜 해외 생활로 그다지 어려움이 없지만 이제 당장 공사가 끝나 본사로 들어가게 되면 다음 후속 공사가 있을 때까지 대기 생활을 해야 하니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왔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있는 게 큰 부담을 느끼게 했다. 박순업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냉장고에서 어제 먹다 남은 소주병을 꺼내 맥주잔에 다 쏟아부었다.
요즘 술 도수들이 약해져서인지 안주 없이 한 번에 털어 넣어도 그리 부담이 없었다. 이곳 현장에 내려와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