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니미럴 오늘도 자리가 없네!”
“주인이 어떤 놈인지, 아주 떼돈을 버네, 벌어.”
강남의 일식집 미다미(味多美).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맛과 청결하기로 미식가들 사이에 소문이 나 초저녁인데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손님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불평들을 늘어놓았다.
다섯 개의 방 중 제일 넒은 방인 난 실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듯 남자들의 떠드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주 오가는 욕설 때문에 화장실을 오가느라 복도를 지나는 손님들은 밖으로 나오는 이들의 소리에 아주 허물없는 친구들의 모임일 거라는 추측들을 했다.
“자, 오랜만에 만나는데 한 잔 씩 들 하자. 화투판에서 광파는 놈, 술판에서 술 취하지 않는 놈은 더 이상 우리 친구가 아니다. 참, 창배는 윤수 오랜만에 보는 거지? 네가 잘 나오지 않아 그래, 인마. 윤수는 취재하러 지방에 내려갔다가도 우리 모임이 있다면 밤중이라도 올라오는 놈이다. 네가 본다고 해서 내가 급히 연락해 나왔으니, 자! 실컷 봐라.”
친구들 중 좌장 격인 혁주가 말했다.
창배는 들어올 때 윤수가 건네줘 무심코 주머니에 넣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성지일보라고 얼마 전에 창간됐다고 하는데 아직 창배의 기억엔 낯선 이름이었다.
명함엔 정치부 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창배는 한때 그가 옐로 페이퍼인 무슨 주간지 같은데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오늘 이차는 윤수가 쏜다. 저놈, 아마 촌지 받은 게 두둑할 거다.”
“야, 새끼들아 내가 지금 촌지나 받을 군번이냐? 그건 이미 옛날에 다 졸업했다. 술을 사면 돈 많이 버는 회사에 다니는 창배가 사야지, 왜 내가 사냐. 참, 창배 너 명함 하나 다우. 창간 한지 얼마 안 돼 아직 어려운데 차장 체면에 모른 척할 수 있냐. 나중에 우리 광고국에서 누가 찾아가면 아랫도리나 하나 가려 다우.”
창배는 마지못한 듯 명함을 하나 건넸다. 승진을 하고 아직 얘기를 하지 않아 명함 돌리기가 왠지 쑥스러웠다.
“아니, 너 언제 차장이었냐?”
“뭐? 창배가 차장이야?”
“승진했나 벼?”
“천상 오늘 이차는 정말 창배가 사야 되겠구만.”
창배는 친구들의 한마디에 갑자기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친구 윤수가 신문사 정치부에 있다고 해 조용히 윤수 만 만날까 했는데 혁주가 전부 연락들을 했던 것이다.
“요즘 나라가 이 왜 이리 돌아가냐? 기름값은 잔뜩 오르고 정치인들은 네 탓이니 내 탓이니 정신 못 차리고 치고받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그나마 세비들이나 안 올리면 다행이게.”
“윤수, 너라도 좀 조져라.”
“조지긴…… 저 새끼도 똑같을 텐데, 뭘. 별 이름도 없는 데 있다가 갑작스레 옮겨 앉아 저 명함 박아 폼 잡고 다니는 것 보면 모르냐.”
“그래 새꺄, 꼭 그렇게 다 까발려야 시원하냐?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냥 모른척 하고 있으면 안 되냐? 저 새낀 친구지만 의리라곤 좆도 없어.”
“그만해 인마. 이러다 싸움 나겠다.”
“싸움은, 뭐……. 그런데 너희들한테 내 하나 보여 줄게 있다. 이게 뭔지 아냐?”
그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뭐냐 하면 말이다. 강문수 한데 받은 거다. 강문수 의원. 그가 신문이나 티브이에선 아주 점잖은 척하지만 아주 구린 데가 많아. 내가 입만 벙긋하면 그 사람 정치생명은 끝이다. 너희들 내 얘기 듣고 여기서 나갈 때 다 잊는 거다.”
“저거 봐. 저 새끼 촌지 받은 거 금방 드러날 걸 아까 또 거짓말했잖아.”
“이 새끼는 왜 뻑 하면 나만 갖고 그러냐?”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봐.”
“알았어. 재가 자꾸 나한테 시비 거니 까 그러잖아. 너네 김미지라고 알지? 얼마 전 ‘여정’이란 드라마에 나왔고 요즘 자동차 시에프로 한참 뜨기 시작하는 애 있잖아? 뭐, 이십 대의 순수함으로 달리는 차가 되고 싶단 가, 하는 컨셉으로 나오는 광고.”
“알아. 그리고 걔가 나오는 그 드라마는 나도 봤어. 걔가 끝에 가서 아마 폐암으로 죽었지 아마.”
“저 새낀…… 폐암이 아니고 유방암이야, 인마. 똑똑히 알고 나 말해”
“저 새끼는 암 이래도 꼭 이상한 쪽으로 갔다가 대더라. 대학생으로 나오던 데 어린애가 무슨 유방암이냐, 인마 유방암은. 자궁암이면 또 몰라도.”
“좀 조용히 해! 이야기 좀 듣자. 계속해 봐, 윤수야.”
“사실 강문수가 걔 스폰서야. 걔를 강문수가 키운 거야. 강문수가 걔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어.”
“너는 정치부에 있다는 놈이 어디서 그런 것만 취재하고 다니냐? 하긴 그것도 정치인 동정이니 가능은 하겠다.”
“가만있어 봐. 좀 들어보자. 그래서 본 사람이 누군데?”
“내가 먼저 있던 직장의 후배가 봤는데 내가 정치부에 있다니까 그 정보를 나한테 넘긴 거야. 그래서 의원 사무실로 가 좀 알아봤지. 처음엔 발 뺌 하더라고. 그래서 오피스텔 이름하고 호수를 대니 뭐 별 수 있나. 사실 이야기를 하며 사정하더라고. 봐줘야지 뭐. 개인적인 일인데 그렇잖아. 사회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봐주기로 마음을 먹은 건 돈을 건네받고 난 후겠지. 윤수, 잰 순 사이비 같지 않냐?”
“그래도 양심은 있다. 돈 받은 걸 다 털어놓으니. 그런데 주머니 한번 뒤져봐라 그 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봉투 하나로 모자랄 것 같은데 다른 주머니를 찬 것 같은데.”
“야, 새끼들아! 내가 그 양반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다고 하는데 넣어주는데 그럼 어쩌냐? 그 일로 그 양반 정치생명 끝장낼 일 있냐. 좀 주의하라 그랬다. 됐냐? 가자 이차도 내가 살게. 아직 열어 보진 않았는데 이거면 이차도 충분하지 않겠냐. 모자라면 너희들이 좀 보태고.”
일행은 모두 단란주점으로 가 열두 시가 되어 나왔으나 다행히 돈은 모자라지 않았다.
일행을 모두 보내고 난 후 창배는 윤수를 데리고 다시 그곳의 조용한 구석진 방을 하나 얻어 들어갔다. 마담이 오늘 장사는 이제 거의 끝났다며 마시라고 맥주를 몇 병 들여왔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
창배는 이렇게 물어놓고 이제 비로소 둘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나, 나나 사는 게 다 같지 뭘 그래. 죽겠다.”
“왜?”
“왜 갈수록 이리 먹고살기가 힘드냐? 창배야, 뭐 좋은 건수 없냐?”
“건수? 그런 게 있으면 인마, 네가 좀 알려줘야지. 그런데 너희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그러냐?”
“그도 그렇지만 우리는 나이 정년이 짧아. 너희야 부장도 달고 임원도 되고 하지만 우리는 내 나이면 이제 슬슬 다른 걸 생각해 볼 때 야. 이참에 돈이나 있으면 난 지금 어디 조용한 시골에나 가 살았으면 좋겠다.”
“너 티브이 자연인 자주 보냐? 새꺄, 젊은 놈이 무슨 시골이냐, 시골은.”
“우리는 데스크 맡고 부국장, 국장되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허리 지나가기야. 처음 기자가 돼 아무것도 몰랐을 때와 생각하면 하늘과 땅 차이야. 타 신문에 있던 아는 선배 하나도 회사에 사표 내고 강원도 인제에 가 농원을 하나 만들어 벌써 이 년 짼가 살고 있는데 부럽더라고. 지난여름에 한번 내려가 만났는데 혈색도 좋아지고 아주 만족해하더라고. 처음엔 사표 내고 시골 내려간다고 얘기했을 땐 다들 놀랬지. 그래도 그 선배는 특종도 여러 번 하고 유능한 선배였거든.”
“인마, 죽어도 한양에서 뒹굴라고 했다. 젊은 놈이 무슨 시골이야, 시골은. 보기엔 아주 그럴듯해 보이겠지. 그러나 그건 환상이야. 신기루 같은 거란 말이다. 알았어?”
“이 새낀 남의 속도 모르고 말하는 쌍퉁 머리 좀 봐. 새꺄, 내가 지금 또 그런 얘길 하는 건 성치 않은 우리 성민이 때문이란 말이야.”
창배는 그가 맥주잔을 들이켜는 걸 보며 그제야 그의 애가 다운증후군이 있음을 상기했다.
“아주 심하진 않아. 그런데 일반 학교에 넣었더니 애들 시선도 그렇고 본인이 힘들어 한단 말이야. 지켜보는 와이프나 나는 더 힘들고. 그래서 아예 시골로 내려가 대안 교육을 시키려 하는 거야.”
“그럼 너는 거기서 뭐 해 먹고 살 거는 있어?”
“그러니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거지. 돈이나 넉넉하면 우리 식구 먹을 채소 거리나 가꾸고 살면 그리 힘들지 않게 살 수 있을 텐데.”
“…… 그렇군. 그런데 네 인맥이 좀 아깝지 않냐. 너는 그래도 언론사에 있으면서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텐데.”
“아, 시바! 나도 그걸 모르는 거 아냐. 더구나 요즘은 정치부를 맡고 나선 그들과 자주 접하다 보니 어떤 땐 마치 내가 정치인이 된 기분이라니깐. 여유만 되면 시골에 내려가더라도 그쪽으로 어떻게 줄을 대 출마해 볼 생각도 없는 건 아냐. 정치부에 있다 보니 자꾸 간덩이만 커져 큰일이다.”
“정치인들 많이 알겠구나?”
“너 의원들 대부분이 티브이 화면에 얼굴 한번 나오는 것 신문에 이름자 하나 실리는 것에 얼마나 관심들이 큰 줄 아냐? 사실 내가 있는 신문사도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그렇지만 아직은 별 볼일 없어. 그렇지만 나는 여야 대표실이고 어디고 다 들어가 누구든 만날 수가 있다고.”
“그럼, 너 사기를 쳐 두 아주 그럴듯하게 잘 치겠다.”
“요즘 같아선 돈만 된다면 정말 사기라도 한번 크게 치고 아예 서울을 떠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 자, 이건 얼마 되지 않지만 주머니에 넣어 둬.”
창배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윤수 앞에 놓았다.
“이게 뭐냐?”
“촌지다, 인마! 십만 원 짜리 수표로 삼십 장 넣었어. 안심하고 써도 돼.”
“네가 왜 나한테 돈을 줘?”
“새꺄, 친구 간에 돈 좀 나눠 쓰는 데, 뭐 어때서 그래! 빨리 집어넣기나 해. 그리고…… 좀 있어 봐. 혹 무슨 수가 생길지 알아”
“촌지를 받아도 친구한테 받기는 또 처음이네. 너, 그런데…… 무슨 수는 뭐냐?”
“몰라. 인마!”
“하, 새끼 정말. 줄래 면 화끈하게 주지. 속곳 자락만 보이다 마네.”
윤수의 말을 들으며 창배는 씩 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