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우진인데 잘 있었지?”
“어머, 우진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도통 연락이 없어?”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언니가 사준 백은 잘 갖고 다녀. 한참을 갖고 다녀도 질리지 않고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있지? 그래서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가 봐.”
“그래, 다음 네 생일엔 옷을 한 벌 사 줄게.”
“정말이야!”
“그럼.”
“그런데 언니, 요즘 부장님은 잘 계셔?”
“회사에서 네가 직접 물어보렴.”
“에이, 쑥스럽게 그걸 어떻게 물어봐? 그런데, 언니 내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뭔데……?”
“저어, 이 부장님하곤 결혼 언제 할 거야?”
“뭐, 결혼?”
“응. 결혼 안 할 거야?”
“글쎄?”
우진의 느닷없는 물음에 정아는 갑자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
자신과 진영이 과연 결혼할 생각으로 동거를 시작했던가.
분명 자신은 진영과 결혼을 생각지도 않았다. 그냥 만나 육체적 관계를 맺고 좋다 보니 어떻게 합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진영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아는 자신의 이혼 전력을 아직 진영에게 말하지 않았고 진영은 정아 자신의 그간 남자관계가 어쨌는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왜 그랬을까. 앞으로 진영과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돼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둘이 전적으로 마음이 통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혼 사실을 알고서도 진영이 결혼하자고 할지는 의문이었다.
자신 또한 남성이 아닌 아직 남편으로서의 진영에 대해 말하라면 아직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응,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니?”
“그냥, 궁금하잖아.”
“얘는, 궁금하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어.”
“언니, 부장님을 사랑하긴 하는 거야?”
“……우진아, 너 오늘 이상하다. 마치 이 부장님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네가 차지하기라도 할 것 같지 그러니.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냐, 무슨 일은 뭐……, 그냥 궁금해서…….”
“우진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뭔데? 말해봐, 괜찮아.”
“저…… 실은, 언니가 이 부장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남자를 하나 소개해 줄까 했었어.”
“뭐, 남자……?”
“응. 괜찮은 남자가 있어서 언니가 한번 사귀어 보며 어떨까 생각했지.”
“호호호, 갑자기 웬 남자야, 얘는.”
“응. 내 사촌 오빤데, 키도 크고 아주 잘 생겼어.”
“오, 그래……? 자, 잠깐…… 우진아, 내가 전화 다시 할게. 부장님 들어오시나 보다. 끊어.”
문 쪽에서 진영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자 정아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누구하고 통화 중이었어?”
“응. 고등학교 때 친구. 결혼해 미국에 살다가 며칠 전에 나왔는데 한 번 보자구.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들어오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연차휴가 얻어 내일 하루 좀 쉴까 했더니 박두식 전무가 못 쉬게 펄쩍 뛰는 거야. 그래서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겠다고 했어.”
“내일 쉬면 뭐 하려고 했는데?”
“모처럼 바깥으로 드라이브나 좀 하려고 했지.”
“진영 씨는 집에 안 가?”
“집에……?”
“응. 부모님 기다리시지 않나?”
함께 동거를 시작하고 나서 집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 걸 궁금히 여긴 정아가 물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뭘……, 정아 씨, 우리 어디 나갔다 오자.”
“어디?”
“어디 가까운 데 드라이브나 가서 밥이라도 먹고 오자.”
“좋긴 한데, 올 때 차가 많이 막힐 텐데.”
“아예 늦게 오든가, 아니면 자고 아침 일찍 바로 회사로 출근하지 뭐.”
“좋아. 그럼 그러자.”
정아는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차에 올랐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정아 씨가 한번 정해 봐. 나는 청평이나 양수리쪽 밖에 아는 데가 없어.”
“그러지 말고 우리 장흥 한 번 가자.”
“장흥?”
“응. 일영과 송추 사이에 있는데 진영 씨는 안 가봤어?”
“글쎄, 나는 그쪽으론 가본 기억이 없는데.”
***
정아는 경기도 장흥으로 차를 몰았다. 일전에 창배하고 한 번 다녀갔는데 그때는 토요일 저녁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볐었다.
차는 카페가 있는 한적한 모텔 앞에 멈추어 섰다. 어둡고 사람이 텅 빈 카페 안엔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둘이 창가 개울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음, 이거 비후 스택으로, 술은 필요 없고.”
“……?”
“손님도 같은 거예요?”
종업원이 정아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는 됐고요. 맥주나 한 병 주세요.”
“난, 술 안 먹어!”
종업원이 주문을 받아 돌아가자 정아는 진영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참 진영 씨, 매너가 그게 뭐야? 여자랑 같이 왔으면 먼저 상대에게 뭘 먹을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냐? 술도 마찬가지고. 사람 무안하게…….”
“그래서 그게 뭐 잘못된 건가?”
“꼭 잘못되기보다 예의상 그래야 한다는 거지.”
정아는 진영이 그래서 아직 여자를 사귀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술을 다 마시도록 들어오는 손님이 없자 정아는 조그만 양주와 맥주를 하나 더 시켰다.
애초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잠은 창배와 함께 들린 적이 있는 위쪽에 새로 신축한 호텔로 가 잘 생각이었으나 열린 창으로 들려오는 개울 물소리가 정겹기도 해 이곳에서 자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 마셔. 원샷이야!”
정아가 맥주잔에 능숙하게 술을 섞는 모습을 바라보던 진영은 정아가 그 잔을 건네자 입을 조금 대고는 못 먹겠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호호, 자기는 직장 생활 어떻게 해? 술도 못 하면서.”
정아가 치즈 조각을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고마워, 정아 씨. 그런데 뭐 꼭, 술을 먹어야 직장 생활을 잘 하는 건 아니지.”
"……?“
정아는 진영에게서 그간 몰랐던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화성 그룹 비서실에 근무했을 때 그룹 기획실 부장이던 이진영은 상당히 도도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냉철한 이미지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기획실이란 데가 그룹의 두뇌들을 모아둔 곳이니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란 대부분의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가까이 다가 본 진영의 모습은 그 전과 달리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진영 씨, 이렇게 나하고 동거하는 거 물론 집에다 이야기 안 했겠지?”
진영이 조금 기분이 좋아진 듯하자 정아가 넌지시 물었다.
“응. 그런 이야기 뭐 하러 해.”
“진영 씨는 집에서 결혼하란 소리 안 해?”
“결혼?”
“응.”
“…….”
진영은 말없이 술이 반쯤 남은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정아는 안주로 나온 은행을 진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정말 고마워, 정아 씨.”
“……?”
“진영 씨, 자기 술 취했어? 뭐가 그렇게 고마워?”
“나를 챙겨 주니깐 고맙지.”
“그게 무슨 소리야? 고작 입에 안주 넣어 준 것 같구.”
“조금 전, 결혼이라 했지? 나…… 결혼하는 것 관심 갖는 사람 없어. 원래 나는 어려서부터 그랬어. 왜, 내 말이 이상해 정아 씨?”
“그, 글……세……?”
“아버지는 병원 일 때문에 항상 바빴고, 우리 엄마는 말이지, 이상한 종교에 빠져 지금도 그렇지만 한번 나가면 몇 달씩 집에 들어오지를 않아. 종교가 중세를 지나면서부터는 이성의 시대로 들어서잖아. 그런데 우리 집은 오히려 그 반대로 역행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집안이야. 그래서 내가 선뜻 정아 씨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나 대학 다닐 때도 방 얻어 나가 혼자 생활했어. 다 싫었어. 친구도 가족도. 그러다 이 화성그룹에 들어와 박두식 전무가 대학 선배라고 잘 챙겨주니까 그나마 잘 적응하고 있는 거야. 뭐, 하나하나 얘기하자면 끝이 없을걸. 그만하지, 뭐.”
“…….”
정아는 진영의 말을 듣고 나자 그에게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정아는 얼마 전만 해도 그동안 따뜻한 정에 굶주렸던 진영에게 자신이 전에 한 번 결혼했다 헤어진 사실을 이야기하면 보일 반응을 염려했었지만 그것은 커다란 기우였다고 생각했다.
설사 이제 이혼 사실을 이야기한다 해도 진영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정아는 진영을 안고 진영은 마치 엄마의 품이라도 되는 양 정아의 품 안에서 둘은 편안한 잠들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