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웃겨. 부끄러워하긴. 자, 여긴 먼저 내가 말한 우리 사촌 오빠, 미국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어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고, 이 언닌 나하고 직장동료였어. 자, 인사들 나눠!”
“안녕하세요. 김태영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유정아 예요.”
정아는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했다. 만약 남자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거나 고지식한 남자 같았으면 분명 꽤나 싸가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뭐야, 맞선 보는, 아니, 처음 소개받는 분위기는 아직도 이렇게 고전적이야? 마치 6, 70년대 다방에서 맞선보는 것 같잖아. 아무래도 내가 빨리 비켜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 먼저 갈게. 자, 그럼 나중에 연락들 해요.”
“우진이 한데 애기 듣고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듣던 대로 상당히 미인이신 데요, 하하하!”
우진이 나가자 태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미국에서 공부하셨다고요?”
“네.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석사 했습니다.”
“어머, 좋은데 나오셨네요. 전공은 뭐 하셨어요?”
“네. 경영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업체 들어가시지 않고 어떻게 어학원 근무하세요?”
“뭐, 우리 사회가 요즈음 학력 인플레 아닙니까? 어학원 여기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강사들 대부분 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친구들이 많아요. 뭐, 제가 다닌 학교보다는 못하지만.”
"그래요? 자신만만하시네요.“
“뭐, 별로. 그런데 정아 씨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놀아요. 우진 이하고 같이 근무하다, 지금은 그냥 놀아요.”
“네에…….”
태영은 정아의 차림을 유심히 살폈다.
“어머, 뭘 그리 쳐다보세요?”
“아, 정아 씨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지금 놀리시는 거예요?”
“아니, 정말입니다. 정아 씨 같은 분이 어떻게 아직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게 저는 아직 이해가 안 됩니다. 어디 땅속에라도 들어가 있다가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건 아니죠?”
“……?”
순간 정아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우진이 정아 자기가 이진영 부장하고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결혼이 전제 조건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자기 사촌 오빠에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냥 부담 없이 서로 섹스 파트너로 즐기라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아 씨,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시죠.”
“그럴까요. 그런데 어디 가실 데 있으세요?”
“자, 춘삼월 꽃 피는 계절인데 우리 여의도로 꽃구경 갑시다.”
“벚꽃이오?”
“네. 여의도 윤중제 벚꽃 축제가 그제 끝났다는데 뭐, 한 일주일 정도는 꽃구경할 수는 있을 겁니다. 참, 차는……?”
“택시 타고 왔어요. 여기가 복잡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하긴 오늘이 토요일이라.”
***
둘은 나와서 태영의 차를 탔다. 흰색 소나타였다.
“차가 시원치 않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당장 차가 필요해 중고로 하나 샀습니다.”
태영은 차에 타자마자 시디플레이어를 작동했다. 비틀스의 노래가 나왔다.
“이 노래 아시죠?”
“렛 잇비.”
“네. 맞아요. 1970년대 발표된 비틀스의 마지막 음반이죠.”
“비틀스를 좋아하시나 보죠?”
“네. 그의 음반은 거의 다 모았습니다. 처음엔 엘피음반을 모으려 했는데 쉽지가 않아 오리지널 음반사인 영국의 이엠아이가 제작한 시디로 16장 모두 모았습니다. 여기에 비틀스가 발표한 음반은 다 있는 셈이죠.”
“저는 존 레넌을 좋아하는데. 이 노래도 존 레넌이 만든 거죠?”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작품으로 아는데 사실은 폴 매카트니가 작사 작곡한 노래죠. 비틀스의 노래 대부분은 폴 매카트니가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정말 환상의 멤버죠. 64년돈가 이들이 미국을 향해 런던 공항을 출발하자 생중계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네에…….”
“정아 씨, 혹시 비틀스가 동양철학에 심취했던 거 아세요?”
“동양철학이오?”
“네. 이 렛 잇비를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도올 김용옥 교수도 그렇게 주장했거든요. 무위자연이란 게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순수한 삶으로 본 거죠. 어때요? 비틀스 멋있는 친구들 아닙니까?”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저것 보세요.”
차가 마포대교를 지날 때 태영이 한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한강 콘크리트 제방 보세요. 저거는 전두환이 한강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굽이굽이 곡선인 한강을 직선으로 바꿔 온통 콘크리트로 뒤집어씌운 겁니다.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심각한 생태계 파괴 현상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요즈음 수천억 원을 들여 저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모래강변을 살리려고 하는데 저 콘크리트 쓰레기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렛잇빗입니다.”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내버려 두어라,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길, 내버려 두어라)
“호호호, 태영 씨가 바로 철학자 같네요.”
목적지에 다 달은 태영과 정아는 차를 세우곤 아직 벚꽃이 만개한 길을 걸었다. 벚꽃축제는 이미 끝이 났지만, 길거리엔 벚꽃을 구경 온 사람들과 이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노점상들로 넘쳐났다.
“우리도 저 제방으로 내려갑시다.”
노점에서 구운 옥수수와 몇 가지 간식거리를 사든 태영이 물었다. 둘은 강가 계단에 앉았다.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아이를 잡으려는 아빠, 잔디에 앉아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 등 여기저기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는 한쪽 길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 지났다.
“우진이하고는 오래 근무했습니까?”
“제가 우진이 보다 늦게 들어와 한 이 년 정도같이 근무했을 거예요.”
“아까, 쉬신다고 하신 것 같았는데 당장 할 것도 없이 왜 그만두신 거죠?”
“조금 쉬다가 다른 것을 한번 해볼까 하고 하고요.”
“다른 거요?”
“네. 더 나이 먹기 전에 내 사업 같은 걸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어떤…… 사업을?”
“뭐,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있는 건 아니고요.”
“자금은……?”
“……네?”
“아, 아닙니다. 대단하시네요. 전 어학원 들어가는 것도 아주 힘들게 들어갔는데, 그룹 비서실 근무, 그 좋은 보직을 뿌리치고 나오다니, 부모님들은 반대를 하셨을 것 같은데.”
“어린애도 아닌데, 반대는 무슨…….”
“정아 씨,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유학 다녀와서 상당히 거취 문제로 고민을 했었거든요. 제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나 기업 경영, 교육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고심하다 제 나이를 감안해 이쪽을 선택한 겁니다.”
“네에, 그러시군요.”
“자, 이것 좀 드세요.”
태영이 간식거리가 든 봉지에서 몇 가지 먹을거리를 꺼내더니 옥수수를 반을 뚝 잘라 정아에게 건넸다. 정아는 태영이 건넨 구운 옥수수를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랑 공차기할래요?”
정아와 태영이 앉은 곳으로 한 아이가 공을 들고 뛰어왔다.
“뭐? 공차기……?”
“네. 축구해요. 한 명이 부족한데 같이해요.”
태영은 정아를 보고 빙긋 웃었다. 마치 정아의 허락을 받으려는 듯이.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태영은 아이에게서 공을 빼앗아 잔디로 몰고 갔다. 정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서늘한 기운이 정아의 얼굴에 와닿았다. 정아는 그리 싫지가 않았다.
정아는 옥수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일부러 으적으적 소리를 내어 씹었다.
이 한강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을 나온 기분이 되었다.
정아는 아이들과 뛰어노는 태영을 바라보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까탈스럽지 않고 털털해 보이는 성격이 무엇보다 좋아 보였다.
우진이 사촌 오빠가 뭔가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소개를 했을 거란 생각을 하자 왠지 더욱 그가 미덥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