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모처럼 양재동까지 왔던 창배는 화성그룹 건물을 보자 불현듯 조영기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모두 퇴근하지 않았을까 염려해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전화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곧 비서가 받았다.
“……혹시, ……최창배 부장님……?”
“미스…… 장?”
"네."
"그래, 아직 내 목소리를 잊지 않았구나.”
“그럼요. 그런데 그간 그렇게 통 연락이 없으셨어요?”
“응. 그럴 일이 좀 있었다. 혹시 사장님 아직 계신가?”
“네. 일이 좀 있으신지 오늘은 늦으시네요. 바꿔 드릴까요?”
“아니, 내가 인근에 있으니 지금 곧 간다고 좀 전해 줘.”
“알았어요. 혹시 금방이라도 나가실지 모르니깐 빨리 오세요.”
창배는 화성그룹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혹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인근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곤 곧장 14층 조영기 사장 방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대부분 퇴근들을 했는지 계열사 사장실이 있는 14층 복도는 조용했다.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이는 일부 사장실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여비서들이 분주히 마무리 정리를 하느라 복도를 지나는 창배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네. 어서 들어가세요. 지금 혼자 계세요.”
창배는 조영기 방을 노크하며 모처럼 감회에 젖었다.
이제 철 좀 들었을까.
창배는 자기가 해결사 역할을 한 아이리스 백화점에 수입품 매장을 갖고 있던 박두호의 사촌 누나 박희진, 조영기의 지시로 애인 정예를 화성건설 말레이시아 리조트 현장의 모델로 시에프를 찍었던 일 등 조영기 사장의 여성 편력을 떠오르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 이게 누구냐?”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야, 최 부장, 너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뭐, 한 칠팔 개월쯤 됐죠?”
“벌써 그리됐나? 이리 앉아라. 그런데 네가 하던 그 유진 나노테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고 있나? 공연히 우리 화성증권에서 주간사를 맡아가지고…….”
“죄송합니다.”
“하긴, 최 부장 너도 피해자 아니가. 누가 그리될 줄 알았나. 세상에 별 희한한 놈들도 참 많다.”
“회장님은 건강하시죠?”
“회장님이야 뭐……. 왜 한번 찾아가 인사라도 하지 그래.”
“아, 아닙니다. 이번에 뉴스난 것을 보니까 베네수엘라에 있는 철광석 광산을 인수했더군요.”
“응. 그거야 화성철강에서 필요하니깐 한 거겠지. 난 몰라. 회장님이 내 아버지지만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는 게 많아. 최 부장은 그저 내가 머리 아픈 건 질색이라는 건 알잖아. 참, 그런데 뭘 해? 놀아?”
“사실……얼마 전에 학원을 하나 차렸어요.”
“뭐? 학원……?”
“네.”
“아니, 최 부장이 무슨 학원을 한다고 그래.”
“재수하는 애들 모아놓은 기숙학원이요.”
“기숙학원……?”
“네.”
“하하, 거참, 소가 웃을 일이네. 최 부장이 학원을 하다니……. 거기는 그럼 애들이 먹고 자며 공부하는 데 아닌가?”
“말 그대로 기숙학원이니까요.”
“그럼 재학생들은 안 되겠구나.”
“누가 있습니까?”
“우리 작은 놈 재영이 있잖아. 최 부장도 알지? 거, 전에 우리 집에 한 번 왔을 때 봤을 텐데. 그놈이 올해 고등학교 들어갔는데 내가 아주 그놈 때문에 속이 터져 죽겠다. 큰놈 재남이는 재수한다고 과외를 하고, 어쨌든 걔는 그런대로 하는 것 같은데, 재영이, 아주 이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 학원 다닌다는 핑계로 못된 놈들하고 매일 피시방이나 싸돌아다니고 우리 집안이 아주 걔 때문에 암울하다. 누구를 닮아 그런지 이젠 집구석에 들어가기도 싫다.”
"혹시 재영이가 사장님을 닮은 것 아닙니까?“
"뭐? 나……?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 아무래도 그놈은 제 엄마를 닮았는가 보다.“
“재영이 방학했죠?”
“아마, 그제 했을 거야. 벌써 친구 놈들하고 어디 놀러 간다고 난리야. 걔 엄마가 속이 터진다.”
“그럼 이번에 재영이를 제가 한번 맡아보겠습니다.”
“재수생들을 한다면서, 방학에는 할 수가 있는 건가?”
“네. 이번 여름 방학 동안만 고등학생을 상대로 캠프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거 아주 잘 됐구만. 잠깐, 기다려 봐!”
조영기는 바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재영이 지금 있나? 알았어. 지금 어디 내보내지 말고 꼼짝없이 잡아놔. 잠깐만……. 최 부장! 그런데 거기 가려면 뭘 가져가야 되는 거야?”
“……?”
“거기 가려면 준비물이 뭐 있어야 하냐구?”
“아……, 덮을 이불하고 운동복, 세면도구 정도면 되겠죠.”
“알았어. 이봐, 재영이를 지금부터 한 달간 여행을 보낸다고 생각하고 준비해줘. 뭐?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이불은 꼭 있어야 하고, 아무튼 그렇게 준비해놔. 지금 당장 데리러 갈 테니.”
창배는 전화를 끊은 조영기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니, 지금 데리러 가다니요?”
“최 부장이 오늘 갈 때 아예 우리 집에 들러서 재영이를 데리고 가라.”
“제가 데리고 갑니까? 그것도 갑자기…….”
“우리 집 알고 있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예 오늘 해치워 버려.”
“……해치워요? 밤에 데리고 가 해치워요?”
“마, 말이 좀 이상한가? 여하튼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재영이가 이제 고1이니까 지금부터 잘 준비하면 서울대는 못 가겠습니까. 이번 기간이 한 달 남짓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서성한 까진 도달하도록 만들죠.”
“아니, 제발 수도권만이라도 진입시켜도 좋아.”
“공부는 잘 합니까?”
“잘 하긴…… 바닥이지.”
“그럼 재영인 제가 따로 영어, 수학 지도를 받게 하죠.”
“그러면 더 좋고. 그런데 그놈이 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걱정 마십쇼. 그런데 비용이 좀 많이 들어갑니다.”
“그거야, 뭐. 얼만데?”
“과목당 오백입니다.”
“오백만 원이나……?”
“뭘 그걸 갖고 놀라십니까. 강남 최고 일타 강사인 고스트 선생과 쪼이 선생의 일대일 지도인데…….”
“알았어. 그건 갈 때 재영이 엄마한테 받아 가.”
“참 사장님도, 제가 뭐 이 밤에 빚 받으러 갑니까? 사장님이 직접 주세요.”
“내가 지금 어디 현금이 있나? 가만…….”
조영기는 지갑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곤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자, 여기 있다.”
조영기는 서랍 안에서 검은 가죽 가방을 꺼내더니 고무 밴드로 묶어 놓은 수표 뭉치에서 열 장을 헤아려 창배에게 건넸다.
“얼맙니까?”
“두 과목, 천만 원이라며.”
“한 달 수강료 있잖습니까.”
“그건 얼마야?”
“이백오십이요.”
“자, 그럼 석 장 더. 나머진 갈 때 기름 넣어가.”
“뭐,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지금 가서 재영이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모처럼 왔는데 술이나 한잔 하고 갔으면 좋겠구만.”
“요즘 어디 좋은 곳 터놓은 데 있으십니까?”
“암, 많지.”
“그럼 재영이 사람 만들어 온 후 그때 하기로 하죠.”
창배는 서둘러 조영기 방을 빠져나왔다.
***
“재영아, 너 지금 어디 가는지 알지?”
“…….”
“왜 말이 없어. 사내 녀석이 그까짓 것 갖고. 그렇게 공부하기 싫으냐?”
“……아니에요.”
“그럼, 아까 집에서 왜 울고 그랬어?”
“집 떠나기 싫어서요. 애들하고 놀지를 못하잖아요.”
“놀긴, 인마. 네가 지금 놀 때냐. 지금부터 눈을 부릅뜨고 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 안 해도 돼요. 아빠 회사 물려받을 거니까.”
“쯧쯧……, 이런 한심한 놈. 넌 학원가기만 하면 혼날 줄 알아라. 너 이런 말 들어 봤지. ‘알아야 면장을 해 먹는다’ 마찬가지야, 인마. 네가 공부를 해서 뭘 알아야 아빠 회사를 물려받아 잘 꾸려갈 수 있는 거지. 홀라당 말아먹을래?”
“…….”
“네가 지금부터 기초를 잘 닦아 놔야 이삼 학년 때 힘들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야. 그래야 남보다 앞서 잘 할 수 있는 거고, 알았냐?”
“그럼 거기 가면 가끔 게임 같은 건 할 수 있어요?”
“게임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자, 이거나 먹어.”
“이게 뭐예요?”
“엿이다. 갱엿이라고 하는 거야. 몸에 좋아 먹어봐.”
“왜 이리 까매요. 싫어요.”
“그럼, 관둬.”
“저…… 선생님!”
“왜 할 말 있냐?”
“저기, 제 친구 좀 데리고 가면 안 될까요?”
“뭐, 친구……?”
“네. 제가 가자고 하면 갈 애들 있거든요. 잠깐 친구들한데 전화해 보게, 핸드폰 좀 줘 봐요.”
“안 돼. 너만 가.”
“왜요?”
“왜 요는 인마, 무슨 왜 요야! 거기 가면 다른 친구들 많아. 걔들하고 사귀도록 해. 알았어?”
“……네에, 알았어요.”
창배가 눈을 부라리자 재영이 무서운 듯 마지못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