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
진영은 자신도 모르게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람의 일이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지만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자신을 생각하니 기막히고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정아가 집으로 들어가든가 오피스텔이라도 하나 얻으라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가평 대천학원에 상주하게 될 일이 많아 혼자 남을 자신을 배려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채 나가기도 전에 집이 팔리게 돼 쫓겨나듯이 이곳 원룸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라도 집으로 들어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회사마저 관두게 돼 눈치가 보여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딱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답답함으로 진영은 정아가 있는 대천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그간 정아의 핸드폰으로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그때마다 `전화를 해봐도 지금은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원장님 좀 바꿔 주세요.”
“어디 시라고 전할까요?”
“저, 이진영이라고 하면 압니다. 몇 번 전화드렸었는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원장님이 지금 안 계시네요.”
학원 번호로 전화해도 매사 이런 식이었다.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게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럼 자신이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그냥 끝이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이대로 끝이 난다면 자신이 정아에게 건네 30억 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끝을 내려도 일단 돈은 받고 끝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진영은 지금 정아와의 관계가 원점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리기에는 자신의 처지는 너무 형편없는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정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백수였다. 정아의 꼬임으로 30억 원을 횡령해 정아에게 넘겨줄 때는 둘 간의 밝은 미래가 암묵적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처지를 볼 것 같으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 게 아닌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진영은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어 직접 학원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정아와 통화할 수 있는 한 가지 복안이 떠올랐다.
진영은 대천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학부모 편지 난에 들어가 학생 이름 하나를 종이에 적었다. 잠시 후 진영은 대천학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굵직한 남자 목소리를 냈다.
“거기 선행반에 있는 김수빈 학생 아빤데 원장님하고 통화를 한번 하고 싶습니다.”
이번엔 조금 전과 달리 남자 직원이 받았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우리 애가 거기 식당에서 밥을 먹다 돌을 씹어 이에 금이 갔다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남자가 그 상황을 원장에게 이야기하는지 조금 있자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아였다.
“네, 아버님 학생 이름이 누구라고 했죠?”
진영은 정아의 음성을 듣자 벅찬 감정에 가슴이 떨렸다.
“저…… 정아 씨, 나야, 나! 이진영!”
“……?”
“나라니깐.”
“누구……?”
“나, 이진영!”
“학부모가 아니고, 진영……?”
“그래, 맞아. 나, 진영이야.”
“그런데 왜 장난하는 거야?”
“장난? 장난이 아니고 하도 통화를 할 수 없어 그런 거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그래.”
"……."
“나 지금 바빠, 할 말 없으면 끊어.”
“저……정아 씨, 왜 그래?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우리 무슨 사이였어?”
“……?”
“앞으로 내가 전화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끊어!”
“저, 정아 씨, 왜 그래? 우리는 함께 살았었잖아. 그리고 저……, 내가 정아 씨한테 30억 준 것도…….”
“뭐, 30억? 웃기지 마. 당신이 누구에게 무슨 돈을 줘? 난 돈 받은 적 없어.”
“그 돈 학원에 투자했다고 했잖아?”
“어디 차용증 있으면 가져와 봐. 그리고 이런 말 하려면 전화하지 마. 이런 전화 재수 없어.”
“정, 정아 씨……!”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으……악!”
흥분한 진영은 한껏 소리를 질렀다. 정아가 자기와 연락을 끊은 게 이상은 했지만, 학원 일로 바빠 그러려니 애써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진영은 비로소 그것이 자신의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너무 억울했다.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딱히 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영은 대천학원이 연천 대천 아카데미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대천 아카데미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대천 아카데미는 가평 대천학원과 시설과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건……!"
한참 이것저것을 살피던 진영은 학원 운영진에 최창배란 이름을 보곤 깜짝 놀라 사진 속의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창배였다! 화성그룹에서 자기와 앙숙이던 최창배가 어떻게 기숙학원 대천 아카데미에 있을까. 진영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화성그룹에 있던 정아도 창배도 어떻게 학원들을 하고-그것도 같은 이름으로-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진영은 혹시 정아가 자신과 동거하면서도 뒤로는 창배와 따로 은밀히 내통하지 않았는가 생각했다. 거기다 돈을 투자한 화성그룹 조만호 회장까지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머리가 쑤셔왔다.
진영은 차분히 하나하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최창배가 무슨 벤처회사 대표로 간다고 화성그룹을 떠난 이후 정아와 화성그룹 조만호 회장과 계속해서 연결될 명분은 없어 보였다.
진영이 학원의 연혁을 보니 정아와 조만호 회장이 대천학원을 만들기 그 이전에 이미 대천학원은 추측 하건대 창배와 혈연관계인 듯한 인물인 최창식이란 자가 그 학원을 인수해 대천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꾸고 창배는 아마 그때부터 그곳에 근무를 해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천학원과 대천 아카데미는 이름만 같았지 관계가 없음은 가평 대천학원이 연천 대천 아카데미를 이어받은 원조라고 굳이 계속해 강조하는 것을 보면 둘의 관계는 더욱 분명했다.
대천학원 설립자 부인인 김연아 회장이 대천학원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천 아카데미에는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또한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뒤늦게 생긴 대천학원이 대천 아카데미가 잘 되는 것 같으니까 설립자를 매수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진영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렇다면……!'
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불현듯 조만호 회장에게 넘겨준 '신규 사업 타당성 검토' 보고서 사본과 대화 내용을 녹음한 녹음테이프가 생각났다. 그것은 중국 공장 매각 시 이면계약으로 횡령한 자금에 대해 안전책으로 혹시나 싶어 준비해 둔 것이지만 어쩌면 엉뚱한 곳에 사용하게 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