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배는 뜻하지 않은 진영의 전화를 받자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평 대천학원에 학생들을 빼앗겨 학생이 없어 당장이라도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서 화성그룹에서 앙숙으로 자신의 자리까지 넘보고, 게다가 가평 대천학원의 원장인 바로 그 정아와 동거하고 있는 이진영이 학원으로 전화를 해 찾아오겠다고 하자 이 일련의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이진영이 자신이 이 대천 아카데미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학원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다고 했는데 학원 홈페이지를 보게 된 연유가 무엇 때문인지 궁금했다.
창배는 혹시 얼마 전 대천학원을 방문했을 때 정아가 대천 아카데미를 자기네 분원으로 하겠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오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룹 기획실의 부서장으로 차 한 잔 제대로 앉아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쁠 진영이 한가하게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오겠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필요하면 창배 자신이 화성그룹 근처까지 갈 수도 있는데 말이었다. 혹시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이 화성그룹과 관련된 일은 아닐까. 창배는 생각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거의 이 년 만에 보는 진영은 옛날과 많이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배는 안내를 받아 원장실로 들어오는 진영을 보곤 깜짝 놀랐다. 주눅이 든 듯 주뼛하며 들어서는 진영을 보고 창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참 얼마 만인가?"
"그…… 글쎄……."
창배는 예전 화성그룹에서의 앙금이 아직 남아있긴 했지만 오게 된 연유가 궁금해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태연한 척 진영을 맞이했다. 창배는 자신이 권한 의자에 앉은 진영을 유심히 바라다봤다. 등을 뒤에 붙이지 못하고 곧추세워 앉았다. 그전의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많이 변했군."
"그야, 벌써 이 년이 흘렀으니깐."
"그럼 이제 이사 자리 하나쯤은 꿰차고 앉았겠군."
"아니, 그만뒀어. 석 달쯤 됐나?"
"……?"
창배는 진영이 화성그룹을 그만뒀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좋은 대학 나와 잘나가다 왜 갑자기 그만뒀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당했던 자신감이 사라지고 행색이 초라해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 왜 그만둬? 그렇게 나를 씹고 막강한 당신 후견인 박두식 전무가 있는데."
"그건 개인적인 문제라 말하기가 좀……."
"그런데 나를 찾아온 용건은 뭐지?"
"저…… 그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전에 비서실에 근무하던 유정아라고 알지?"
"유……정아?"
"그래, 최 부장 있을 때 비서실에 근무하던 여직원 있었잖아?"
"아, 이제 생각나는군. 알지."
창배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사실 걔하고 나하고 동거를 했었어."
"그래? 난 몰랐는데."
"하긴, 최 부장은 그전에 관뒀으니까."
"그런데?"
"대천학원 알지?"
"……!"
창배는 이진영의 입에서 대천이란 말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대천학원……?"
"그래, 대천학원. 사실 그 학원 원장이 유정아인 것 알고 있나?"
"알아. 처음엔 깜짝 놀랐지. 왜 하필 우리하고 같은 학원 이름을 사용하나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
"사실…… 그 학원 화성그룹에서 투자 한 거야."
"……!"
"조만호 회장이 개인 돈으로 투자하고 내가 알기로는 유정아도 아마 30억을 투자한 거로 알고 있어."
"그게 사실이야?"
놀란 창배는 진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창배는 그 30억 원이 정아가 자신이 대현 빌라에 숨겨 놓았던 비자금을 사용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두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정아가 어떻게 학원사업을 하게 되었으며 조만호 회장은 또 어떻게 정아와 엮어져 그 사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럼 정아가 화성그룹을 그만둔 후에도 계속해 조만호 회장과 교류를 했던 것이 분명한데 왜 화성을 떠나서도 정아는 조만호 회장을 만났던 것일까.
"이 부장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
"그야, 정아가 나하고 같이 살았으니까 알지."
"유정아가 30억 이상,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 그건……."
진영은 자칫 화성의 중국 공장 매각 시 돈을 챙긴 사실이 발각될까 순간 멈칫했다.
"좋아. 됐어. 어쨌든 지금 한 얘기는 틀림없는 거지?"
"무, 물론이지. 자, 이걸 한번 봐!"
"……?"
진영은 가방 안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게 바로 그 증거야."
진영은 봉투 안에서 '화성그룹 학원사업 타당성 검토'란 제목의 보고서를 꺼내 창배에게 건넸다.
창배는 보고서의 내용을 훑어 나갔다. 국내 기숙학원의 실태와 전망에 관해 조사한 내용으로 대천 아카데미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조만호 회장이 내게 직접 지시한 걸 몰래 녹음한 거야."
이진영이 녹음기를 작동시키자 조만호 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두식 전무가 알아서도 안 되고, 심지어 조영기 사장이 알아서도 안 돼. 알겠나?'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의 주인공이 조만호가 틀림없음을 확인한 창배는 눈이 번쩍 떠졌다. 잘하면 대천학원을 한 방에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틀림없군! 그런데 이걸 나한테 가져온 이유는 뭐지?"
창배가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지금 대천 아카데미가 그 대천학원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나?"
"뭐, 별로……."
창배는 진영이 그 증거자료를 들고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과적으로는 대기업인 화성그룹이 중소기업 업종인 학원사업 진출을 터뜨려 밝히라는 것인데, 진영이 무슨 이유에서 그러는지 궁금했다.
"사실, 정아가 나를 배신했어."
"하하하. 고작 사랑싸움 때문이란 말인가?"
"뭐, 그런 셈이지."
진영은 정아에게 30억 원을 넘긴 것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배신 받은 사람싸움의 대가치곤 너무 큰 것 아닌가. 그리고 이건 똑똑한 이 부장이 직접 할 일이지, 이걸 왜 나한테 가져온 건지 알 수가 없군."
"단순 사랑싸움치곤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커. 그리고 나는 내가 직접 송사의 당사자가 되고 싶지 않거든. 싫으면 그만둬, 그냥 없던 일로 하지, 뭐."
"하하하. 이제 다 알았는데 뭘. 알았어. 이걸 나한테 넘겨. 내가 이 부장의 시원한 대리 복수전을 해 줄 테니!"
진영은 가져온 증거물 모두를 창배에게 건넸다.
"그런데 이 부장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뭐, 어떻게 되겠지. 밥이야 굶겠나? 그럼 믿고 이만 일어나야겠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업을 다 하고."
창배의 학원 사업이 이례적인 듯 진영이 일어나며 말했다.
진영이 가고 난 후 창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업 계획서와 녹음테이프를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곤 곧바로 윤수에게 전화했다.
"뭐? 그 대천학원이 화성 그룹에서 투자 한 거라고! 그게 정말이야?"
"그래. 아마, 조만호 회장이 개인적으로 투자한 것 같다."
"재벌 회장이 개인적은 무슨 개인적이야. 그거 잘 됐다. 좀 만나자. 저녁에 그거 갖고 시내로 좀 나와. 아니,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 신문사로 좀 가져와라. 내일 초판에 내 보내게. 요즘 중소 업종에 대기업들이 참여한다고 볼멘 목소리가 높아 대통령도 관심을 갖고 있는데, 시원하게 잘 됐다. 이제 네가 한시름 놓게 생겼구나."
"야, 윤수야, 막상 네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리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뭐?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답지 않게 쫄았냐?"
"인마, 그래도 한때 내가 몸담았던 직장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뭐? 그럼 어떡하려고? 당장 네 학원이 죽을 판인데."
"내가 한번 직접 찾아가 설득을 해 봐야겠다."
"누구? 조만호 회장을……?"
"그러든가."
"야, 창배야, 좋은 수 있다."
"뭐, 좋은 수……?"
"그래. 우리 그전에 한 것처럼, 조 회장에게 장난 한번 칠까?"
"……?"
"그거 갖고 신문에 제보가 들어왔는데 취재를 하겠다고 한번 해 볼까?"
"끊어, 새꺄! 너 그때 조만호 회장에게 돈 받을 때 아주 시골에 들어가 살겠다고 했잖아?"
"도로 나왔다고 하지, 뭐."
"시끄러, 끊어!"
창배는 윤수와의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쨌든 대천 아카데미만 관계되지 않는다면 정말 윤수 말대로 한 건 올릴 수도 있을 기회였다.
***
“아우, 생각만 해도 정말 미치겠다. 그날 정아에게 당한 생각만 하면 열이 뻗쳐 내가 정말 미쳐!”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빨리 끝내라고 했잖아. 내 말 안 듣더니 이게 뭐야. 내 얼굴은 또 뭐가 되고.”
“아, 정말 열 받네.”
우진과 침대에 누워 있던 태영은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가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내 가져왔다.
“고게 여기 왔을 때 내 옷장 안 보자기에 있던 네 줄무늬 원피스를 본 거야. 그리고 모른 척 아주 그 앙큼을 떤 거야. 중계동 학원 계약할 때도 우리가 짜고 한 것도 다 알았고. 되레 제 사업에 우리를 역 이용해 먹은 거라구. 형사 고발한다는 바람에 참, 돈도 써 보지 못하고 다 물어 줬으니…….”
“우리 아무래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어.”
우진이 눈을 반짝이며 일어나 앉았다.
“뭐, 좋은 수라도 있어?”
태영이 말했다.
“아무래도 정아가 학원 차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한두 푼도 아니고.”
“아버지한테 받았다고 했잖아. 정아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한다는데.”
“…….”
“정아 씨 아버지가 한 번은 학원에도 찾아왔었다고. 창밖으로 내다보긴 했지만 중절모를 쓴 아버지가 정아 씨와 비슷하게 닮은 것 같았어.”
“……!”
“왜?”
“지금 중절모를 썼다고 했지?”
“응, 그게 왜?”
“혹시 차가 벤츠 아니었어?”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안에 들어가 내부 시설들을 보고, 돌아갈 때 서서 학원 주위를 한번 쭉 둘러보더니 세워 놓은 벤츠를 타고 갔거든. 기사가 문을 여는데 보니까 대머리였던 것 같은데.”
“으음. 역시…….”
“왜, 무슨 일인데?”
“그 사람 정아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조만호 회장이 틀림없어.”
“중절모야 그렇고, 돈 많은 사람이 벤츠 타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기사가 대머리라며?”
“응. 앞부분이 많이 벗겨졌던 것 같아.”
“내 생각이 틀림없어. 정아가 나와 같이 근무할 때 아버지가 사업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거든. 물론 그땐 돈도 그렇게 쓰지 않았어.”
“그럼 대천학원이 조만호 회장이 투자 한 거란 말이야?”
“맞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회장님 책상을 정리하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밑에서 ‘화성그룹 학원사업’ 어쩌고 하는 보고서를 본 것 같아. 그래서 속으로 계열사를 또 하나 만들려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었어.”
“그래? 내일 출근하거든 그것 좀 있나 한번 찾아봐 줘. 내게 좋은 수가 있어.”
“돈 뜯을 거라도 생긴 거야?”
“물론이지. 조만호하고 엮어졌다면 단위가 크지. 그런데 어떻게 조만호 회장이 정아와 학원 사업으로 엮어진 거냐? 정아가 그만두고 정말로 회장하고 만나고 했던 건가?”
“몰라. 내가 알기로는 회사로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그야, 다른 곳에서 만났겠지. 조만호 회장이 투자 한 거라면 의논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만났을 거야. 호텔 밀실이라든가.”
우진은 밀실 이야기가 나오자 조만호 회장실 안에 있는 밀실 모습이 그려졌다. 조만호 회장이 피곤하면 가끔 눈 붙이러 들어가는 곳, 그곳엔 침대와 샤워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정아 후임인 박미영이 들어가면 한참 있다 나오는 곳. 언젠가 회장이 출근했을 때 늘 따라 들어가 옷을 받아 들던 미스 박이 그날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기에 회장실로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우진은 조심스레 밀실 문안에서 숨 가쁜 소리를 듣고는 슬그머니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진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태영의 말이 확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간 정아가 선물한 백이며 옷 등 값비싼 명품 선물들. 이 모두가 조만호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알았어. 내일 당장 회장실을 뒤져서라도 그것을 찾아 나올 테니 계획이나 잘 짜봐. 언론에 증거 자료를 돌려 정아, 고것을 구렁텅이에 처넣든가 아니면 입막음으로 조만호 회장에게 협박 편지로 위협해 한밑천 우려내든가. 어휴, 여우 같은 것. 언제 회장님을 꼬셔 가지고선.”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정아와 진작…….”
“진작, 뭐?”
“아, 아냐……. 이제 돈이냐, 정아의 파멸이냐, 양 단 간의 문제만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