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가 자살이란 극단적 죽음을 택한 이틀 후.
창배는 자기 앞으로 온 발신인 표기가 없는 편지 한 통을 받고 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꼭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보낸 것 같은 그리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창배는 조심스레 편지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꺼냈다.
글씨체가 눈에 익었다. 그 전에 전단지에 급히 썼던 글씨체와 같았다.
정아였다.
최창배 원장에게
모든 게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게 될 줄이야. 어떡하든 대천 아카데미가 문 닫는 것을 꼭 보고 싶었는데. 처음엔 과거에 내 자존심을 짓밟았던 증오심 때문에, 그리고 나중엔 원장으로서 학부모들로부터 받는 존경심 때문에.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잖아.
내가 살아온 인생을 회상해 보니까, 내 인생은 학원을 하면서 꽃 피우려 했던 것 같아.
비록 피기 전 봉오리로 끝나고 말았지만. 나에게 자식들을 맡긴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대학에 대한 기대치가 크면 클수록 나에 대한 맹목적 존경심과 경외심은 나를 정말 행복하게 했어. 이제 내가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는구나 하고 말이지.
그러나 어쩌다 학원 문을 닫게 되어 이제 내 인생에 어떠한 것도 그것들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기에 이렇게 끝을 마치려 결심했다.
끝으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최 원장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곳 학원에 등록했던 학생들 모두 환불해 주고 대천 아카데미로 갈 생각이 있는 학생들은 그곳 학원비를 모두 내가 대신 내주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많은 학생이 동의해 돈 좀 썼지. 아무튼, 이젠 대천 아카데미가 잘되길 바라는 것밖에 없어.
지나온 일을 돌이켜 보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사람이 살아가는 게 모두 한순간이고 아무것도 아닌데. 만일 그걸 진작 깨달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결혼해 부부로 살고 있었을까.
안녕. 정아가
"그러니까, 이게 정아가 네게 보낸 편지란 말이지?"
"그래."
"복잡하다. 정아와 너, 마치 멜로드라마 속의 주인공 같다. 참 그런데 정아 씨 웬 돈이 그리 많았냐? 죽기 전 오십억이나 되는 돈을 교육 장학금으로 내놓고 가다니, 참 대단하다. 난 정아 씨가 그렇게 의리가 있는 여자인 줄 몰랐어. 그때 네 일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성지일보에 있다는 걸 지금까지 기억하곤 우리 신문에 교육 장학금으로 그 돈을 기탁해 올 줄이야. 처음에 대리인이 나를 찾아와 정아 씨가 보내서 왔다기에 정말 깜짝 놀랐어. 인마, 정아 씨랑 어떻게 잘 좀 해보지 그랬냐? 정말 괜찮은 것 여잔 것 같았는데."
"시끄러, 새꺄!"
창배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야, 윤수야!"
"왜?"
"내가 곰곰이 생각한 건데, 우리나라 대학시험 말이다."
"대학시험……?"
"그래."
"왜? 그게 어째서?"
"아무래도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그것 하나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 말이야?"
"학원을 하면서 가만히 지켜보니까 대한민국 온 가정이 자기 자식 대학 시험 하나에 전부 매달리고 있더라. 마치 대한민국 사람들은 사는 목적이 오직 그것 하나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얘기야. 그러니 지디피가 아무리 높으면 뭐하냐? 삶의 질은 바닥인데."
"그게 현실인데, 그럼 어쩌냐?"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그 사교육비가 도대체 얼마냐? 부부가 길거리에 나 앉아 떡 볶기를 만들어 팔아서도,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서라도 악착같이 힘들게 번 돈 들이 전부 자식들 사교육비에 다 쏟아붓고 있으니."
"어쭈, 네가 교육 행정전문가가 되려나 보다."
"깐죽거리지 말고 들어 봐, 새꺄!"
"새끼는 말끝마다 새끼라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데, 이러면 어떻겠냐?"
"……?"
"애들이 입학하는 학교 순위를 매겨 돈을 떼는 거야. 서울대는 A등급, 나머지 대학은 B, C 등급순으로 죽 매겨서, 나중에 졸업해 취직을 하게 되면 서울대 입학하는 애들한테는 한 30%, B등급은 15%, C등급은 10%, 이런 식으로 매달 월급에서 돈을 떼는 거야. 사회 기부금으로 퇴직할 때까지. 어떠냐? 이렇게 하면."
"하하하. 참나. 인마! 공산주의도 아니고 그게 뭐냐? 그러면 나라가 무슨 발전을 하겠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끝까지 한번 들어 봐! 너는 그렇게 되면 경쟁도 없으니 애들이 공부를 안 할까 봐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 예를 들어 부자들에게 누진소득세를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란 말이다. 부자들에게 세금 더 내게 한다고 그 들이 돈 안 벌겠어? 마찬가지야. 그렇게 해서 걷는 그 기부금을 사회 전체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거야. 결국은 그들한테도 혜택이 돌아 간다구. 서울대, 연대, 고대 들어가려는 경우 이렇게 매달 차등해서 떼면 명문대로 애들이 몰려드는 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 시킬 수 있지 않겠냐? 그래, 안 그래?"
"글쎄, 그런가?"
"그래도 명문대를 가려는 애들은 정말 어떤 사명감이 있어 더 열심히 할 거란 말이다. 그렇지 않은 애들은 취직 후 제 돈을 다 받게 되니 비싼 돈 내며 과외나 학원에 가 공부하려는 동기,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형평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 아니겠냐?"
"너, 교과부 장관 한번 해라. 대통령한테 편지 쓸까? 드디어 고질적 대학 입시 문제 대천 아카데미 원장이 해결했다고."
"이런……. 자, 그만 술이나 마시자! 오늘 왠지 한번 마음껏 취하고 싶다."
"너, 내일 학원가잖아?"
"글쎄, 내가 오늘 기분이 더럽다."
"정아 씨 때문이지?"
"정아는, 무슨……."
"다 안다, 인마. 야, 창배야! 너 아직 괜찮지? 술 안 먹었지?"
"술 먹긴, 새꺄. 이제 시작인데."
"자, 일어나. 우리 강원도 가자!"
"뭐! 강원도?"
"그래. 지금 출발해서 우리 한 며칠 있다가 오자. 거기 가서 바다도 보고, 정아 씨 일 일랑은 깨끗이 지우고 오자. 사실 나도 요즘 기분이 영 안 좋다."
"나야 괜찮지만, 넌 출근 안 하면 잘리잖아?"
"야, 인마! 50억 원을 우리 신문에 기탁하도록 끌어온 게 누군데 그래. 만일 국장이 뭐라고 하면 도로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들어가면 애들 공부 때문에, 난 마누라하고 섹스한 지가 언젠지도 몰라."
"우린 큰 애 초등학교 들어가고부터 벌써 섹스 리스로 산다. 그저 공부, 공부."
"시발,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데, 이젠 애들 공부가 부부간 섹스까지 못 하게 하네. 이러단 남은 식욕마저 잡아먹혀 앞으론 밥도 집에서 못 얻어먹게 될지 몰라."
"쉿, 조용히 말해. 쳐다본다."
창배가 나오며 옆 테이블을 힐끗하자 그들 중 누군가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