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왜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를 하는 거지?
다음날, 한남동 저택.
담벼락 사이에 있는 뒷문 앞에 선 지현은 크게 심호흡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
"AK 그룹 권우빈 사장님 개인 비서 한지현입니다.“
하지만 인터폰은 고요하기만 했다.
'응? 아무도 없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지현은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벨을 눌렀다.
딩동, 딩동.
"사장님 개인 비서 한지현입니다! 안에 아무도 안 계세요?“
담벼락 너머로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터폰이 고장 난 것 같군요."
느닷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지현은 얼른 뒤를 돌아봤다. 강인한 체격에 유난히 선이 날렵한 얼굴,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있는 우빈의 얼굴이 지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지?
항상 정문을 통해 저택을 드나드는 사장님과 우연히 뒷문에서 마주친 지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님께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지금 출근하는 겁니까?”
“네, 그런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을 안 하네요.”
"문은 잠겨 있는 겁니까?“
"네, 그런 것 같아요.“
지현이 문을 살짝 흔들었지만, 자물쇠가 걸리는 둔탁한 소리만 들려왔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니 밖에서 문을 열어야겠군요. 내 옷 주머니에 열쇠가 있는데 어느 주머니에 있는지 한 비서가 찾아보세요.“
"네?“
사장님이 자신에게 지시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지현은 빠르게 속눈썹을 움직였다.
"내 양복 주머니에 열쇠가 있습니다. 잘 찾아보세요.“
"제, 제가요?“
우빈은 더듬대는 지현의 목소리를 듣고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이대로 지각할 작정입니까?“
"아, 아닙니다.“
당황한 지현은 재빨리 우빈의 양복 겉주머니를 뒤졌다.
"사장님, 열쇠가 없는데요.“
마네킹같이 우뚝 서 있던 우빈은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 가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겉주머니에 없으면 안주머니도 뒤져보세요.“
침이 꼴깍, 넘어가는 우빈의 명령에 지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위를 바라봤다. 아래로 지그시 내린 우빈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검었다.
"한 비서는 나까지 지각하게 만들 셈입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지현은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우빈의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현은 양복 상의 왼쪽에 있는 사장님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래, 이건 그냥 열쇠를 꺼내려는 것뿐이야.
애써 무덤덤하게 사장님의 지시를 따르려고 했던 지현은 손으로 무언가를 덥석 잡았다. 그녀가 잡은 것이 열쇠가 아니라 그의 탄탄한 근육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이거 열쇠가 아니었어?‘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지현이 급한 마음에 덥석 잡은 것은 사장님의 매끈한 가슴 근육이었다. 지현은 서둘러 열쇠를 찾으려 했지만, 다른 주머니보다 훨씬 깊었던 안주머니에서 진짜 열쇠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여, 여기 열쇠가 있네요.“
1초가 1분처럼 느껴졌던 상황이 지나가고, 열쇠를 찾은 지현이 황급히 문을 열려고 했지만, 당황해서 그런지 손이 덜덜 떨렸다.
철커덕.
조심스럽게 문을 연 지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우빈을 부축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반년 동안 출근한 한남동 저택은 3년 연속 '전국에서 가장 비싼 집' 1위를 차지한 위용에 걸맞게 억 소리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외관과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정원을 자랑했다. 사장님과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앞으로 간 지현은 그를 멈춰 세웠다.
"사장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저 정원을 따라 걸어왔을 뿐인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지현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단단히 붙잡고 다시 벨을 눌렀다.
딩동.
- 누구십니까?
"권우빈 사장님 개인 비서 한지현입니다. 그리고 지금 옆에 사장님도 함께 계십니다.“
- 네, 알겠습니다.
긴장한 표정의 지현은 우빈의 옆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반듯이 서 있었다.
퍽. 퍽.
오늘따라 문이 늦게 열리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현의 귓가에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퍽’ 하는 소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듯 점점 커졌지만, 지현은 옆에 있는 사장님을 의식하며 정면만 주시했다.
이 소리는 뭐지? 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휘익.
지현은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잡고 안쪽으로 강하게 이끄는 손길에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우빈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의 품 안으로 이끌었다. 거의 빽허그랑 비슷한 자세라 귀까지 새빨개진 지현은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등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잡은 우빈은 무뚝뚝한 어조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건물에 맺힌 고드름이 바닥으로 추락하는군요.“
고드름?
붉어진 얼굴의 지현이 고개를 돌리자 건물에 달려있던 고드름이 그녀가 있던 곳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이, 이걸 어떻게 아셨어요?“
우빈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커다란 손을 떼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알았습니다.“
삐, 철커덕.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렇게 우빈은 문을 열고 나타난 활동 보조인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지현의 주변에 휘잉, 찬바람이 불었다. 건물 앞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지현은 빠르게 속눈썹을 깜박였다.
"소리로 알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 지현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대답하자 아래층 직원이 문을 열고 지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지현 씨. 지하 1층에 있는 응접실로 가세요.“
“왜요?”
“사장님이 부르셨어요.”
반년 넘게 이곳에서 일했지만, 응접실로 호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지현은 다부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를 따라 계단 앞에 선 지현은 멈춰서 잠시 망설이다가 응접실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느린 걸음을 옮기는 지현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지하로 내려가자 어깨가 짓눌린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그녀를 맞이했다.
"한지현 씨? 이쪽으로 오세요.“
응접실 담당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현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 손님이나 정치인의 접대가 이루어지는 응접실의 바닥에는 우아한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에는 고풍스러운 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다. 지현은 중앙에 있는 밤색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 한 잔 갖다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사장님이 곧 오실 겁니다.“
직원이 밖으로 나가자 소파에 앉은 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직전에 응접실로 불려온 지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얼마 전,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사장님의 '내가 지원하고 싶습니다'가 현실이 되었다. 지현의 어머니는 할머니께 '배우자 광고 모집'에 대단한 사람이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 대단한 인물이 ‘AK 그룹의 사장 권우빈’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지현에게 그와 무슨 관계냐고 물어왔다. 지현은 사장님이 정말로 자신의 '배우자 모집 광고'에 지원했다는 사실에 놀라, 그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내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네, 그거 나 맞습니다.]
째깍째깍.
벽에 걸려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정말 사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야.‘
사장님의 진심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던 지현은 그의 꿍꿍이를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라는 것이 자신과의 결혼인 건지 아니면 자신의 퇴사인 건지 분명히 알아내야 했다.
탁, 탁, 탁.
멀리서 작게 들려오던 흰 지팡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지현의 심장은 더욱더 빨라졌다.
'한지현, 지금부터 정신 놓으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리자.‘
숨을 크게 들이쉰 지현이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지현이 자동반사로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 갈색 구두와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사장님은 활동 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을 소파에 앉힌 활동 보조인은 짧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거운 침묵 위로 사장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현 비서.“
"네! 사장님. 오랜만…… 아니, 아까 뵈었죠. 음…….“
갈 곳을 잃은 지현의 눈동자는 이곳저곳 방황했지만, 우빈의 눈동자는 아무 동요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사실 매일 출근하는 평소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사장님이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사실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지현은 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한 화장이 더 예쁘네요.“
“네?”
“……아니, 내 활동 보조인이 오늘 한지현 씨 화장이 더 예쁘다고 하더군요.”
오늘따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걸 느낀 지현은 빠르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한 비서, 혹시 향수 뿌렸습니까?“
"네? 어떻게 아셨어요?“
"늘 한 비서에게 나던 샴푸 냄새가 아닌 다른 향수 향이 나는 것 같아서요.“
민망해진 지현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는 그 샴푸 향이 한 비서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나는 향수 향도 나쁘지 않군요.“
지현은 고개를 들어 우빈을 주시했다.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선명한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할까요?“
우빈의 무심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현이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전 정말 ……사장님이 왜 이러시는 건지 궁금해요.“
"그걸 내가 또 설명해야 합니까? 설명은 저번에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아니요. 충분하지 않았어요.”
“나는 할 말 다 했습니다.”
우빈의 말에 지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히려 내가 한 비서에게 묻고 싶군요. 왜 나는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겁니까?”
"제가요?“
지현이 놀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우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라 안 된다. 뭐, 그런 거 아닙니까?“
"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맞는 것 같은데.“
가시가 돋친 우빈의 말투에 지현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아니에요. 정말로,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사장님.“
"그럼 이유가 뭡니까? 내가 한 비서가 마음에 들어서 배우자 모집 광고에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왜 이러냐고 계속 묻는 건 내가 시각장애인이라 자격 미달이라고 돌려 말하는 거 아닙니까?“
빈정거리는 우빈의 말투를 듣고 지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삐뚤어진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휩싸진 우빈에 대한 지현의 감정은 짜증보단 연민이 더 컸다.
"정말로 사장님이 시각장애인이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고개를 돌린 우빈의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전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두 사람에게 속물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누가 아깝다느니, 누가 손해 보는 거라느니, 수군대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빈과 눈이 마주친 지현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잠깐…… 지금 날 보고 있잖아?’
잠시 숨을 고른 지현은 입술을 떼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는 배우자 모집 광고에 지원하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결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믿음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제 나이, 제 학벌, 제 조건을 보며 한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보통 시각장애인의 탁하고 흐린 눈동자와는 달리 우빈의 눈동자는 맑고 선명했다.
'역시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어.‘
사장님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불안한 떨림이 삽시간에 그녀의 온몸으로 퍼졌다.
설마 사장님이 안 보이는 척 거짓말하고 계신 건가?
동요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신 지현은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다 말할 순 없지만, 신문에 저의 배우자 모집 광고가 나간 건 제 뜻이 아니라 제 할머니의 뜻이었습니다.“
우빈의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불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확실해. 분명히 지금 사장님이 날 보고 있어.
“사장님이 시각장애인이라서 사장님의 의도를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주위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자 오직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빈은 더듬더듬 손으로 주변을 짚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우빈은 말없이 지현을 응접실에 남겨 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풀린 지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
믿기지 않게도 지현은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과 언성을 높이고 격렬하게 말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분명히 사장님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사장님은 진짜 시각장애인이 아닐지도 몰라.
'어머, 어머,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로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신의 기적이 일어난 건가?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사장님은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왜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를 하는 거지?
"한지현 씨.“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정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까 사장님의 목소리가 굉장히 높아지셨던 것 같은데, 혹시 한지현 씨가 사장님께 실례되는 말을 한 건 아니겠지?“
여정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물었지만, 그녀에게 살기가 느껴져서 지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그게……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장님을 화나게 하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현은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고 움츠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여정의 입가에 생긋 미소가 떠올랐지만, 지현을 향한 살기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 불편하지?“
"예? 아, 아니요! 불편하지는…….“
"거짓말하지 마. 지현 씨는 자기가 거짓말 엄청 못하는 거 잘 모르나 봐?“
그럼 여기서 내가 뭐라고 대답하냐고.
마음속에서 억울함이 샘솟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택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반년 동안 일한 지현이 알아낸 것은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절대 구여정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저택에서 30년 동안 근무해온 여정은 회사로 치면 부사장급이었다.
"처음에는 사장님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장님의 배려 덕분에 조금씩 편해지고 있습니다.“
지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정은 그녀의 답변에 만족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계속 걸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해해. 사장님이 1년 전부터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예민해지셨어.“
1년 전부터?
지현은 저도 모르게 불쑥 여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1년 전에는 눈이 보이셨나요?“
앞서가던 여정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앗!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여정이 다시 앞으로 걸어나가자 지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저기…… 그런데요. 선배님.“
"왜.“
"사장님이 얼마나…… 안 보이시는 건가요?“
지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넌지시 묻자, 여정이 바로 몸을 돌렸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그게 사실은…… 사장님이 눈이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
가만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여정이 풋, 하고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사장님이 앞이 보이신다고?“
"…….“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혹시 홍하늘인가? 홍하늘이 그랬나?“
"아니요, 아닙니다.“
"사장님은 정확하게 1년 전부터 눈이 안 보이시기 시작하셨어. 그 전에도 눈이 안 좋으시긴 하셨는데 회사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갖고 계시던 지병이 악화하였지.“
"지병이요?“
"그래, 망막 관련 불치병이야. ……더 물어볼 거 있나?“
"아니요, 아닙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여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현은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군요. 1년 전부터 지병이 악화하셔서…….“
"그래, 굉장히 가슴 아픈 이야기지.“
"네, 정말 너무 안타깝네요.“
여정이 또렷한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자. 지현은 둥근 호를 그리며 억지로 눈웃음을 만들었다.
"밖에 눈이 정말 많이 오는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한지현 씨가 이곳에서 일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구나.“
"네,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이네요.“
"그래,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딱 한지현 씨 나이였는데.“
"30년 동안 계속 이곳에서 일하신 거세요?“
"그래,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서 일했지.“
창밖을 바라보는 여정의 눈동자에는 훌쩍 흘러 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그럼 이제 올라갈까?“
여정의 물음에 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 해서 선배님 퇴근이 늦어지신 것 같네요. ……죄송해요.“
지현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여정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난 괜찮아. 어차피 난 여기서 살고 있으니까.“
"여기서 살고 계셨어요?“
"아아, 몰랐나 보구나. 하긴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잘 모르겠지. 난 입주 가정부였어.“
"입주 가정부요?“
"그래.“
당황한 지현을 즐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지현 씨,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이요?“
"어디 가서 사장님의 눈이 보이는 것 같다는 소리 하려면, 다음부터 입도 벙긋 대지 마.“
그 말을 하는 순간, 미소를 짓고 있던 여정의 표정에서 사악하고 웃음이 걷혔다. 겨우 온도가 높아졌던 분위기가 다시 차갑게 식어버리자, 지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지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여정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두고 먼저 계단으로 올라가는 여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기사 불러줄 테니까 차 타고 집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