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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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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4화
작성일 : 17-12-17     조회 : 269     추천 : 0     분량 : 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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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뒤돌아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사무실에서 외투와 가방을 챙겨 나온 지현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이 복도의 끝에 있는 코너를 돌기만 하면 저택을 나갈 수 있는 출입문이 나온다.

 

  '여기 계속 있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지현은 여정의 눈에 띄지 않고 나가기 위해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고지가 눈앞이야.‘

 

 지현은 집으로 돌아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월요일 아침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차로 사장님께 깨지고, 2차로 부사장님께 깨진 지현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울렁거렸고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졌다.

 

 도대체 사장님과 부사장님은 내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거야?

 

  '안 그래도 처음 하는 일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괴롭히기나 하다니.‘

 

 대한민국에 자신 같은 불쌍한 신입이 어디 한둘이랴.

 

 드디어 코너를 돌아 현관문 앞에 다다른 지현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지현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지현 씨,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네? ……네!“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떨어트릴 만큼 깜짝 놀란 지현이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에는 팔짱을 낀 채 사악하게 웃고 있는 여정이 보였다.

 

  "가는 거면 나한테 얘기하지. 내가 김 기사 시켜서 지현 씨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네? ……네. 그, 그러셨죠.“

 

  ㅡ 운전기사 불러줄 테니까 차 타고 집에 가.

 

 그 말은 데려다준다는 말이 아니라 '꺼져'라는 말을 아주 고상하고, 품위 있고, 우아하게 한 말이 아니었나?

 

  “그런데 괜찮습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지현은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김 기사를 불러서…….”

 

  "아니에요.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지하철 타고 가면 금방이에요.“

 

 여정이 또 자신의 길을 막을까 두려워진 지현은 얼른 탈출구를 열었다.

 

 휘이이잉.

 

  "……엄마야!“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지현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여기가 시베리아야 대한민국이야.

 

 바람과 함께 실내로 들이닥치는 눈 때문에 지현은 재빨리 문을 닫았다.

 

  "어머, 어떡해. 진짜 눈이 많이 오네.“

 

  “네, 정말 많이 오네요.”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데 지현 씨 집에 가기 힘들겠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그냥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라.”

 

 여정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지현에게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집에 돌아가기 vs 불편한 직장 상사와 한집에서 1박 하기

 

 마치 신이 자신에게 '고추냉이를 먹을래, 식초를 먹을래?'라고 묻는 것 같았다.

 

 오, 신이시여,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사실 근처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가면 어떻게든 집에 갈 수 있었지만, 여정의 호의를 두 번 이상 거절하면 눈치 보일 것 같았다.

 

  "……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지현의 표정은 비 오기 전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

 

 

 

  - 어떡하냐. 아무래도 우리 계획이 그쪽에 들킨 것 같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현우의 목소리에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우빈이 인상을 구기며 일어섰다.

 

 이런 젠장, 일이 꼬여도 하필 이렇게 꼬일 줄이야.

 

  "나 지금 유성이 사무실로 갈 테니까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 뭐? 지금 유성 씨 사무실로 가겠다고? 야, 너 지금 시각장애인이라고 사람들한테 뻥 쳐놨는데 거길 어떻게 가려고?

 

 우빈은 창문 상단에 고정된 철제 고리에 준비해 둔 밧줄을 걸었다.

 

 이 건물에 큰불이 나지 않으면, 절대 쓰일 일이 없었을 애물단지였지만 지금 우빈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다.

 

  "재주껏 나갈 테니까 일단 한남동 저택 근처에 차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어.“

 

  - 뭐라고? 내가 왜?!

 

 현우의 커다란 목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뻔한 우빈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 야, 지금 폭설 내려서 옴짝달싹 못 하는데 어딜 오라는 거야?

 

  "폭설이 내렸다고?“

 

  - 그래. 아까 엄청 많이 내려서 지금 도로에 눈이 한가득 이야.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덩어리에 우빈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 쌓인 정원은 어느새 설원이 되어있었다.

 

  "지금은 눈 안 오는데.“

 

  - 지금은 안 와도 아까는 엄청 많이 왔었다니까.

 

  "타이어에 스노체인 걸고 오면 되잖아. 기동성 좋은 차는 이럴 때 쓰라고 사준 건데.“

 

 머릿속으로 대충 저택을 빠져나갈 동선을 그린 우빈은 가죽 장갑을 끼고 상체식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 뭐야, 진짜야? 진짜 유성 씨 사무실로 가겠다는 거야?

 

  "그래. 난 이미 준비 다 했으니까 넌 얼른 차 끌고 한남동으로 와.“

 

  - 미치겠네. 추워죽겠는데 어딜 오라고 하는 거야.

 

  "장현우 씨가 뭘 잊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내가 장현우 씨 보스 아닙니까?“

 

  - ……제길, 알았다. 알았어. 간다, 가. 이 자식아.

 

  "전화 끊지 말고 후딱 와라.“

 

 급히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가 들리자 우빈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만히 눈의 정경을 보고 있던 우빈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지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빛보다 눈빛이 밝은 지금 한비서는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의 독설에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히 맞받아치던 지현을 떠올리며 우빈은 입꼬리를 올렸다.

 

  ㅡ 저는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ㅡ 여기서 다 말할 순 없지만, 신문에 저의 배우자 모집 광고가 나간 건 제 뜻이 아니라 제 할머니의 뜻이었습니다.

 

 한지현의 할머니는 왜 그녀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배우자 모집 광고를 낸 거지?

 

  "한지현도 나랑 비슷한가.“

 

  - 뭐라고? 비가 오고 있다고?

 

  "……하늘에서 아무것도 안 떨어지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서 오기나 해라.“

 

  - 알았다, 알았어. 지금 옷 챙겨 입었으니까 얼른 갈게.

 

 현우가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스피커에서 '내려갑니다'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런데 말이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윤세아라는 여자 혹시 남자친구 있냐?

 

  "……신경 꺼라.“

 

  - 신경 꺼? 왜 신경 꺼? 난 신경 못 꺼.

 

  "윤세아라면 눈 동그랗고 머리가 갈색인 여자 아니야?“

 

  - 응, 그래. 되게 예쁘게 생겼더라.

 

  "그 여자 임자 있어.“

 

  - 임자 있다니,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신경 꺼. 윤세아 남자친구 헬스트레이너야. 괜히 집적거리다가 어금니 나갈 수도 있어.“

 

  - 아…… 진짜 아깝다.

 

 시무룩해진 현우의 목소리에 우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너는 어때? 결혼 준비는 잘 돼 가냐?

 

  "거의?“

 

  - 한지현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는데. 얼굴도 못 보고 그냥 와버렸네.

 

  "예뻐. 키도 커서 모델 같으면서도 모델 같지 않지.“

 

  - 모델 같으면서 모델 같지 않다고?

 

  "마냥 마르지는 않았단 얘기야.“

 

  - 마냥 마르지는, ……아, 가슴이.

 

  “거기까지만 해라.”

 

  - 권우빈, 이거 완전 팔불출 다됐네. 진짜 안 믿긴다. 클럽에서 예쁜 여자가 득실득실해도 무감각하게 쳐다만 보던 네가 첫눈에 반했다니. 솔직히 예쁜 여자보고도 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하길래 난 네가 어디 문제 있나 했어.

 

  "너 평소에 날 그렇게 생각했냐?“

 

  - 뭐, 아니. 그게 아니라…… 야, 나 지금 차에 시동 걸었다.

 

 부르릉.

 

 자동차 엔진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우빈이 굳어 있던 손마디를 부드럽게 풀었다. 상체식 안전벨트의 버클에 밧줄을 단단히 고정한 우빈은 마지막으로 동선을 확인하고 창문 난간에 뛰어올랐다.

 

 휘잉.

 

 갑자기 불어온 거센 바람에 우빈은 하마터면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마른침을 삼킨 우빈은 철제 고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 눈 때문에 저택이 있는 골목까지는 들어갈 수 없어. 보는 눈도 있고, 아직 골목에는 눈도 많이 쌓여 있으니까 네가 큰 도로까지 나와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한 30분 정도?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1년 전, 우빈이 비밀리에 만든 단체, 위크스.

 

  "나도 지금 내려갈 거야.“

 

 그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바로 AK 그룹의 몰락이었다.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어제부터 집안을 감시하는 경호원들이 늘었어.“

 

  - 조심해. 잘못해서 걸리면 끝장인 거 알지? 네가 걸리면 위크스는 자동 해산이야.

 

 마지막으로 심호흡한 우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을 빠져나가면 큰 도로로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 알았어.

 

 통화를 끝낸 우빈은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꽂아두고 두 손으로 단단히 밧줄을 잡았다. 하얀 눈이 쌓인 덕분에 시야는 환했지만, 눈 때문에 경호원들에게 들킬까 싶어 우빈은 평소보다 빨리 양발로 벽을 짚었다. 어느새 2층까지 내려온 우빈은 주변을 경계하며 밑을 내려다보다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한 비서? ……한 비서가 왜 여기 있는 거야?”

 

 

 *

 

 

 이럴 줄 알았으면 바득바득 우겨서라도 집에 가는 건데.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던 지현은 자고 가라는 여정의 제안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하아…….“

 

 예상에 없었던 한남동 저택에서 하룻밤.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지현은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결국 밖으로 나왔다.

 

  "정말 내 반지는 어디에 있는 거야.“

 

 정원을 거닐며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꼈다 하는 장난을 하다가, 옥으로 만든 가락지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진짜 애 그런 장난을 쳐서…….“

 

 허리를 굽히고 옥가락지를 열심히 찾았지만, 어디로 도망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오늘 왜 이러나.“

 

 모두가 잠든 밤에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있는 지현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거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양손으로 볼을 감싼 지현은 계속 반지를 찾았지만, 아무리 잦아도 반지는 없었다. 거센 겨울바람이 옷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자, 이가 덜덜 떨리며 세게 부딪쳤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그냥 내일 찾아야 하나. 낮에 날이 밝으면 찾아볼까.

 

 눈밭에 주저앉은 지현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풍성한 속눈썹을 떨었다.

 

 포기해야 하는 데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다.

 

  “나한테 정말 소중한 반지인데…….”

 

 매서운 바람에 그냥 안으로 들어갈까 하고 돌아서던 지현은 눈 위에 얌전히 떨어져 있는 옥가락지를 발견했다.

 

  "……차, 찾았다!“

 

 지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눈밭에 있는 옥가락지를 주웠다.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지현은 또 잃어버릴세라 재빨리 손가락에 옥가락지를 끼워 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넓은 눈밭에서 기어코 옥가락지를 찾아내고 말다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승리이자 의지의 승리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옥가락지도 찾았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

 

 지현이 걸음을 옮기는데, 뒤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구지? 경호원인가?

 

 지현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뒤로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등에 차가운 쇳덩이를 들이댔다.

 

  "뒤돌아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 이런, ……가, 강도잖아!

 

 지현은 덜덜 떨리는 잇새를 조이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역시 그냥 집에 갈 걸 그랬어.‘

 

 눈을 질끈 갑은 지현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옥가락…… 아니, 반지, 반지를 찾고 있었어요.“

 

  "야밤에 나와서 반지를 찾고 있었다고? 정말 그게 다야?“

 

 목덜미가 서늘해질 만큼 싸늘한 목소리에 지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슨 다른 짓을 하려고 한 거 아니야?“

 

  "아니, 아니에요!“

 

 잠깐 이 목소리는 어쩐지 낯설지가 않은데?

 

 머리에 손을 올린 채 떨고 있던 지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지현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는 듯 남자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살려주…… 으읍!“

 

 지현이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남자가 눈치채고 재빨리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어디서 큰 소리야?“

 

 손수건으로 지현의 눈을 가린 남자는 그녀를 앞세워서 눈밭을 걸어갔다. 저택의 삼엄한 경비를 의식하는 듯 남자는 조심스러운 발길로 지현과 함께 걸었다. 그녀는 훌쩍거리며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사, 살려주세요. 저 진짜로 우연히 여기서 하룻밤만 묶게 된 거예요. 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라고요.“

 

 지현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안쓰럽게 애원하자, 우빈이 머리는 점점 더 깨질 듯 아파졌다. 안 그래도 우연히 지현과 마주쳐서 머리가 복잡한데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심장이 괴로웠다.

 

  “나 강도 아니야. 하늘이 두 쪽 나도 너한테 나쁜 짓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거미줄처럼 처져 있는 CCTV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걷던 우빈이 잠시 쉬어 기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가자.“

 

 ‘쉬었다 가자’라는 우빈의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건지, 그 소리를 신호로 지현은 저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강도야, 강도가 나타났어요!”

 

 지현은 남자가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차마 돌아볼 마음도 생기지 않았던 지현은 죽을 힘을 다해 앞만 보고 달렸다. AK 그룹의 저택에 침입한 강도는 기럭지도 남다를 건지, 재빠르게 따라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꺄악!“

 

 도망가다 붙잡힌 지현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단한 남자의 팔뚝이 그녀의 가슴 아래에 감겨 있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서 순식간에 에로틱 로맨스로 장르는 바뀌고, 그와 그녀는 눈 위에서 함께 뒹굴었다.

 

 위이이잉-!!

 

 뛰어가면서 지현이 무언가를 건드린 건지 사이렌 소리가 공원에 울려 퍼졌다.

 

  "……젠장!“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남자에게 사로잡힌 지현은 억지로 남자의 품에 끌어 당겨졌다. 남자에 의해 자신의 몸이 억지로 돌려지는 순간, 그녀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달빛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다시 눈이 가려진 지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단숨에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간 남자에게 수풀 사이로 내몰려진 지현은 뺨으로 남자의 숨결을 느꼈다. 지현은 남자의 얼굴과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하기 위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침입자다. 샅샅이 뒤져봐!“

 

 남자에게 넘어트려 진 동시에 사이렌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호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꼼짝없이 남자에게 사로잡힌 지현은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팀장님,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침입자가 아니라 도둑고양이인 것 같습니다.“

 

 지현은 속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아니야.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나라고! 여기 있는 침입자 따돌리려다가 실패한 거라고!’

 

 지현의 눈을 손으로 가린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용히 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남자의 강렬한 목소리에 지현의 눈가에 핑하고 눈물이 돌았다.

 

  ‘아, 진짜로 이렇게 한 방에 가는구나.’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옥가락지를 찾으러 왔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경호원들이 자신을 도둑고양이라고 착각하고 그냥 갈 줄은 누가 알았을까.

 

  “아무도 없는데? 사이렌이 고장 났나?”

 

  “몰래 들어온 도둑 고양이가 한 짓 같습니다.”

 

 경호원들은 자기네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지현은 눈물과 콧물을 동시에 흘렸다.

 

  "울지 마요. 절대 이상한 짓 안 할 겁니다.“

 

 강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밑에 갈린 지현은 믿을 수 없었다.

 

  "일어나요.“

 

  "사, 살려주세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나 강도 아니에요. 밤늦게 술 먹다가 내 집이라고 착각하고 담 넘어 들어온 겁니다. 지금 바로 나갈 겁니다.“

 

 자신의 설명에도 지현은 안심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공포감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우빈은 코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지현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현의 흰 피부가 차가운 바람 때문에 빨갛게 변한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일이 꼬여도 제멋대로 꼬였구먼.

 

 부채같이 풍성한 지현의 속눈썹을 보고 우빈은 새삼스럽게 그녀의 얼굴이 여성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강렬하게 자신의 왼쪽 가슴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다시 지현의 눈을 손수건으로 가린 우빈이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합니다. 일단 당신이 내 얼굴을 보면 안 되니까, 그래서 손수건으로 눈을…….“

 

 얌전히 우빈의 음성을 듣고 있던 지현이 이를 악물고 그에게 박치기했다.

 

 퍽!

 

  "으윽!“

 

 후다닥 우빈의 품에서 벗어난 지현은 저택으로 재빨리 도망치면서 크게 소리쳤다.

 

  "사람 살려! 강도야! 강도가 나타났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부딪친 이마를 매만지며 도망가는 지현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우빈이 픽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지현 진짜 장난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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