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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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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5화
작성일 : 17-12-17     조회 : 254     추천 : 0     분량 : 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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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어제 만난 강도가 혹시 사장님이 아닐까

 

 

 

  "권우빈. 왜 이렇게 늦었어. 한 시간이나 기다렸잖아.“

 

 아닌 밤중에 눈밭에서 구르느라 온몸이 젖은 그는 현우의 질문에도 말이 없었다.

 

  "아까 사이렌 울리는 소리 들리던데 혹시 들킨…… 어이구, 이게 뭐야. 옷이 다 찢어졌네.“

 

 담장을 둘러싼 철조망을 뚫고 나오느라 그가 입고 왔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너 경호원한테 들킨 거야?”

 

 현우가 건넨 따뜻한 캔커피를 마시자 얼어붙은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진짜로 들킨 거야?“

 

 말없이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빈 깡통을 뒷좌석으로 던진 우빈이 짧게 대꾸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어서 출발해.“

 

  "그래, 알았어.“

 

 눈썹을 구기며 그를 쳐다보던 현우는 얼른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사실 나오다가 한지현을 만났어.“

 

  "뭐야? 그럼 들킨 거야?“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녀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우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장난 아니야.“

 

  "뭐가 장난 아니라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우의 옆에서 팔짱을 낀 우빈이 픽 웃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장난 아니게 마음에 들어.“

 

 

 

 ***

 

 

 

 우빈은 AK 그룹 권정민 회장의 손자 중 가장 영특하고 총명했다. 공부도 잘했고, 머리도 좋았으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로 즐비한 환경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지혜로움도 갖췄다.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기업 경영을 철저히 배우도록 강요했던 AK 그룹의 권우빈 회장 때문에 아버지는 일주일 중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야 했다. 하지만 영한은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우진과 우빈을 정원에 데리고 가서 캐치볼을 하는 가정적인 남자였다.

 

 AK 그룹은 원래 장자 승계가 원칙이었지만, 청각 장애라는 불운을 타고난 첫째 형 우진이 자동 탈락하면서, 우빈은 일찌감치 AK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할아버지는 삶을 오직 '성공'과 '실패', 두 가지 기준으로 판단했고, '승자'가 '패자'를 착취하고 갈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할아버지는 우빈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라고 가르쳤고, 우빈은 항상 승자로 자랐다.

 

 실패한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 '무시해도 좋은 사람'이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우빈은 단 한 번도 우진을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정민은 우빈을 '성공작'이라고 불렀고, 우진을 '실패작'이라고 불렀다.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우진을 보며 가슴 아파하던 어머니가 옷걸이에 목을 매면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우빈의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적 부진을 할아버지에게 집요하게 추궁당하던 아버지마저 회사 옥상에서 몸을 던지면서, 그의 가치관은 산산조각이 났다.

 

 AK 그룹의 모든 것이 전부 오류투성이였다.

 

 우빈은 자신보다 똑똑하고 감도 있었던 우진에게도 회사 업무를 맡겨달라고 정민에게 부탁했지만, AK 그룹의 황제인 정민은 우빈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ㅡ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병신한테 뭘 맡긴다는 거야!

 

 AK 그룹에서 정민에게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빈은 어떻게 하면 뿌리까지 썩은 AK 그룹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집안에서 투명인간 취급당하던 우진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온 가족을 잃은 우빈은 비밀리에 위크스를 만들었다.

 

 비밀 단체 위크스의 목적은 AK 그룹의 파멸 혹은 멸망이었다.

 

  "권우빈 왔나.“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직 양복을 벗지 않은 유성이 보였다. 단정하게 잠겨 있는 단추를 풀어헤친 유성의 가슴팍에는 무궁화 모양의 배지가 달려있었다.

 

  "갑자기 호출은 왜 한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석환이 몸을 돌려 우빈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같이 있었으면서 또 말 한마디도 안 한 모양이었다. 같은 로스쿨 출신인 유성과 석환은 닮은 부분도 많으면서 이상하게 서로를 싫어했다.

 

  "석진이랑 준이는 아직 안 왔나?“

 

  "연락했으니까 금방 오겠죠.“

 

 서울 도심에 있는 건물에 있는 사무실은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우빈이 몰래 사들인 건물의 13층은 한낮에는 인권 변호사의 허름한 사무실이었지만, 한밤에는 비밀 단체 위크스의 은밀한 밀담 장소로 변했다.

 

  "안녕하세요. 장현우 씨라고 하셨나요?“

 

  "네, 반가워요. 장현우라고 합니다.“

 

  "저보다 형이시라고 들었는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일 나중에 위크스에 합류한 현우와 대형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석환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우빈은 헐렁해 보이지만 리더십이 있는 현우가 자갈같이 개성 강한 위크스 멤버들을 잘 통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석환, 너 정말로 얘들한테 연락한 거 맞아?“

 

  "네, 석진이는 클럽에서 여자들이랑 놀고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요.“

 

  "클럽에서 놀고 있어? 그럼 네가 클럽에 가서 끌고 와야지.“

 

  "전화로 오라고 하면 되지 뭐하러 그래요.‘

 

 책임감 강한 유성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석환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뭐, 조금 늦을 수도 있죠. 올 때까지 얘기나 하면서 기다리죠.“

 

 자칫 살벌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현우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풀어놓았다.

 

  "아, 그런데 여러분도 우빈이한테 결혼할 여자 있는 거 알았어요?“

 

  "헐, 우빈이 형 결혼해요? 이 상황에?“

 

  "권우빈, 정말이야?“

 

 유성이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응, 결혼해.“

 

  "우와, 진짜요?“

 

  "자세한 건 얘들 오면 말할게. 일단 지금 내가 멤버들을 긴급 소집한 이유는 내 결혼 때문은 아니니까.“

 

 때마침 석진과 준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우빈이 형, 결혼한대.“

 

  "결혼? 정말요? 신부가 누군데요? 예뻐요?“

 

  "예쁘대. 엄청 예쁘다고 나한테 자랑하더라.“

 

  "내가 알기로는 비서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오오, 사장님과 비서? 삼박 한데?“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우빈에게 물었다.

 

  "여우가 소개하는 여자랑 결혼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

 

  "……그래, 맞아.“

 

 여우가 누구인지, 또 여우가 소개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영문을 모르는 멤버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우리가 세운 '플랜 A'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말해주려고 불렀어. 저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아무래도 '플랜 B'로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우빈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석환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을 들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렇게 계획을 이랬다저랬다 바꾸는 거예요?“

 

  "지금 우빈이가 말했잖아. 넌 안 듣고 뭐 했냐?“

 

  "진짜 유성이 형은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네. 형,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솔직히 말해요.“

 

  "자, 자, 여기서 싸우지는 마시고.“

 

 당장이라도 서로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유성과 석환의 사이를 현우가 막아섰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갑자기 피곤이 밀려온 우빈은 잔뜩 미간을 구겼다. 안타깝게도 우빈은 사람들 사이를 잘 조율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잠깐! 왜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는지 우빈이 대신 내가 설명할게.“

 

 현우가 위크스 회원들에게 변경된 플랜 B에 관해서 설명할 동안 우빈은 아까 만났던 지현을 떠올렸다.

 

 다음에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러다가 제일 먼저 한지현한테 들키는 거 아니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우빈에게 준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근데. 형.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덩치는 크지만, 마음은 여린 준의 목소리에 우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리 위크스의 최종 목적은 뭐예요?“

 

 준과 시선을 마주친 우빈이 십 년 동안 응축되어 있던 한을 터트리듯이 말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AK 그룹의 공중분해야."

 

 

 

 ***

 

 

 

 새벽까지 위크스 멤버들과 회의를 마치고 집에 온 우빈은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면 어깨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피로가 금세 풀릴 것 같았다. 목욕을 즐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우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욕실 안에서 청바지와 검은 브래지어만 입고 있는 지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느라 지현은 우빈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우빈의 눈길은 막 샤워를 하고 나와서 뽀얘진 지현의 얼굴에서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하얀 목, 깊숙이 패인 쇄골, 매끈한 어깨선, 봉긋한 가슴, 잘록한 허리.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쿵.

 

 문이 활짝 열리면서 머리를 말리던 지현의 시선이 우빈에게 꽂혔다. 우빈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분명히 지금 지현은 자신을 시각장애인으로 알고 있는데, 놀라서 기겁하고 문을 닫으면 모든 것이 들통나게 된다.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연기를 해야 했던 우빈은 초점을 흐리고 정면만 주시했다.

 

 머리카락의 맺혀있던 물방울이 지현의 가슴을 타고 또르르, 브래지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공이 확장된 우빈이 점점 혼탁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면서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지?"

 

  "사장님?"

 

  "이 목소리는…… 한지현 비사?“

 

  "네, 저 한지현 비서예요."

 

  "집에 간 거 아니었습니까?"

 

  "네? 그게 실은 사정이 있었어요.“

 

 드라이기를 내려놓은 지현이 속옷만 입은 채로 그에게 다가왔다. 검은 브래지어만 입은 그녀가 뽀얀 속살을 자랑하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우빈은 안간힘을 쓰며 평정을 유지했다.

 

 우빈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지현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실 어제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여정 선배님께서 저택에서 자고 가라고 하셨어요.“

 

  "그랬습니까?“

 

 우빈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려는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고, 지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네?“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목욕을 하러 들어오셨네요. 활동 보조인의 도움도 없이.“

 

 예리한 시선으로 정곡을 찌르는 지현을 보고 우빈은 몽골이 송연해졌다.

 

  "내가 내 집에서 목욕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지현은 여전히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 우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난 이 집안의 구조를 다 알고 있어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활동 보조인은 외출할 때만 도움받습니다.“

 

 지현은 우빈과 시선을 부딪치기 위해 눈동자를 위로 올렸지만,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분명히 아까 내 몸을 어깨선부터 발목까지 훑는 시선이 느껴졌었는데.‘

 

 우빈의 눈동자가 자신의 몸을 훑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던 지현은 창피함을 무릎 쓰고, 당당하게 우빈의 앞에 섰다. 오로지 우빈의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였다.

 

  '왠지 아까 날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

 

 지현이 우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내 욕실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움찍한 지현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뗐다.

 

  "여기가 사장님 욕실이었나요?“

 

  "그래요, 2층 복도 왼쪽 끝에 있는 욕실은 나만 사용하는 개인 욕실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욕실인 줄 알았어요.“

 

 지현은 황급히 옷을 입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지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현은 힐끗 화장대에 놓인 옥가락지를 쳐다봤다.

 

  '어제 만난 강도가 혹시 사장님이 아닐까.‘

 

 너무나도 익숙했던 강도의 목소리. 지현을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강도는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내부 사람인 것 같았다.

 

 똑똑.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있던 지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현 씨,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네, 선배님.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근데 오늘 토요일인데 무슨 약속 있어?“

 

  "아니요. 약속은 무슨…… 저기, 선배님.“

 

  "왜?“

 

 여정이 돌아보자 지현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여정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지현이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아니에요.“

 

 자신이 물어봐도 여정은 솔직하지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현 씨, 미안한데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이요? 무슨 부탁이요?“

 

  "사장님 방에 아침 좀 가져다줄 수 있겠어?“

 

 여정의 뜬금없는 부탁에 놀란 지현이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사장님 방에 아침을요?“

 

  "응.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오늘은 내가 아침에 약속이 있거든.“

 

 지현이 주춤하는 사이 여정은 식기가 담긴 이동식 테이블을 방으로 후다닥 끌고 들어왔다.

 

 참 나, 이러려고 나보고 자고 가라고 한 건가.

 

  "그럼 부탁 좀 할게.“

 

 여정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

 

 

 날이 밝자마자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지현은 또 한 번 여정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역시 그냥 호의를 보인 게 아니었어.“

 

 지현은 이동식 테이블을 끌고 사장님의 집무실 앞에 섰다.

 

  ㅡ 사장님은 항상 집무실에서 아침을 드시니까 가져다드려.

 

 내가 사장님의 아침 시중을 들게 될 줄이야.

 

 사장님의 집무실 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지현은 망설이다가 손등으로 살며시 노크했다.

 

 똑똑똑.

 

  "개인 비서 한지현입니다.“

 

  "들어오세요.“

 

 다시 한번 숨을 고른 지현은 테이블 손잡이를 세게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우빈이 아침상을 끌고 들어오는 지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현은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우빈에게 인사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우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현에게 물었다.

 

  "왜 한 비서가 들어옵니까?“

 

  "그게 사실 여정 선배님이 아침에 약속 있으시다고 하셔서요.“

 

  "약속이요?“

 

  "네.“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대신 사장님께 아침 드리려고 여기 왔어요.“

 

 지현은 이동식 테이블 끌고 우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각종 반찬과 식기를 가지런히 창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물.“

 

  "네?“

 

  "물이요, 물. 목이 마릅니다.“

 

 물? 그런데 물이 어디에…….

 

  "물은 책장 옆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지현은 얼른 냉장고로 가서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왔다.

 

  "아.“

 

  "네?“

 

  "먹여줘야죠.“

 

 우빈의 말에 지현은 눈꺼풀을 동시에 깜박였다.

 

 원래 여정 선배님도 이런 걸 하셨나?

 

  ㅡ 사장님. 앞이 잘 안 보이시는 거 알지? 잘 드실 수 있도록 꼭 도와드려.

 

 여정이 지나치듯 했던 말을 떠올린 지현은 우선 물이 담긴 컵을 우빈의 입가에 가져갔다. 우빈은 입을 벌리고 지현이 주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마치 새에게 모이를 주는 느낌이라 지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빈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현은 본격적으로 그의 아침 시중을 들었다.

 

  "자, 아, 하세요.“

 

  "이게 뭡니까?“

 

  "마늘종이요.“

 

  "음, 그건 싫어요. 다른 거 줘요.“

 

  "그냥 주는 대로 드세요. 건강에 좋아요.“

 

 지현이 억지로 그의 입 앞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자 우빈을 구시렁대면서도 받아먹었다.

 

  "다음에는 마늘종 말고 다른 거 줘요.“

 

  "그럼 김치 드릴게요.“

 

  "아니, 김치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없어요.“

 

 지현은 큭큭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의 입 앞에 잘게 자린 김치를 올린 밥숟가락을 들이댔다. 밥에 올려진 반찬이 김치라는 것을 알고 우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군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맛있는 거 좀 주죠?“

 

  "알았어요. 맛있는 거 드릴게요.“

 

 이번에도 마늘종을 우빈의 입에 넣어준 지현은 큭큭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뭡니까. 마늘종이잖습니까. ……또 속았네.“

 

 한껏 기대에 찬 우빈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지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러려고 온 겁니까.“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진짜로 맛있는 거 드릴게요.“

 

 지현은 밥 한술을 떠서 우빈의 입에 넣어주고 잘 익은 소 불고기를 그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래요. 이런 걸 주세요. 소 불고기 맛있네요.“

 

 어미 새가 된 지현은 뿌듯한 시선으로 우빈을 바라보았다.

 

  "됐어요. 이제 내가 먹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 무슨 반찬이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아니에요. 제가 계속 드릴게요.“

 

  "…….“

 

  "그냥 뭐…… 하던 건 끝까지 해야죠.“

 

 바닥을 주시한 채 잠시 고민하던 우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계란말이 드릴게요. 아, 하세요.“

 

 '사장님 아침 먹여주기'에 재미 들린 지현은 젓가락으로 집은 계란말이를 집었다. 그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린 우빈이 망설이다가 입을 크게 벌렷다.

 

  "이번에는 마늘종 드세요.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드셔야죠.“

 

 잠시 고민하던 우빈은 그녀가 건넨 마늘종을 받아먹었다.

 

  "잘했어요. 사장님! 이번에는 김치, 김치.“

 

 신이 난 지현이 밥숟가락에 김치를 올려놓자 우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지현 씨.“

 

  “네?”

 

  “재미있습니까?”

 

  "……네.“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픽 웃음을 터트린 우빈은 또 그녀가 내민 김치를 받아 우물거렸다.

 

 지현은 어느새 다 비워진 식기를 다시 이동식 테이블로 옮기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우빈이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아닙니다.“

 

  “……?”

 

 지현이 다시 남은 식기를 정리하는 데, 톡톡 하고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한테 할 말 있는 건가?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저기…….“

 

 지현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 우빈의 손이 허망하게 공중을 휘저었다.

 

 왜 사장님이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같지? 아무래도 오늘 정말 이상하네.

 

  “사장님, 솔직히 말해봐요. 저한테 할 말 있으시죠?”

 

  “……네, 있습니다.”

 

 지현이 성큼 우빈의 곁으로 다가가자 헛기침을 하며 머뭇거리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지현 씨, 나랑 데이트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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