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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작가 : 카렌
작품등록일 : 201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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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보고 있다! 6화
작성일 : 17-12-17     조회 : 266     추천 : 0     분량 : 7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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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여기에서 한 비서 마음에 드는 거 다 가져와요.

 

 

 

  "한지현 씨, 나랑 데이트할래요?“

 

  "데이트요?“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현은 사장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 거야?

 

  "네,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습니까?“

 

  "내일 저녁이요?“

 

  “네, ……어때요?”

 

 사실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내일 저녁에 시간 맞춰 차 보낼 테니까 그때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지현은 설레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짓고 허리를 굽혀 사장님께 인사했다.

 

  "그럼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잘 가요.“

 

 사장님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지현은 이동식 테이블을 끌고 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사장님이랑 데이트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벌써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마신 심장이 혼자 콩닥거리자 당황한 지현은 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뭐야, 나 왜 이렇게 들떠 있는 거야? 데이트 한 번 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지현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기 위해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냥 데이트 한 번 하는 거지. 무슨 다른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덤덤했던 우빈의 표정을 떠올린 지현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식혔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사장님이 내 눈치를 봤던 이유가 나한테 데이트하자는 말이 하고 싶어서였나.‘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던 사장님의 모습을 떠올린 지현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데이트라……, 내일 어떤 옷을 입을까.”

 

 지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사뿐사뿐 내려갔다.

 

 

 

 ***

 

 

 

 말없이 옆에 앉아있는 우빈을 힐끔거리던 지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답 없는 우빈을 보고 입술을 삐죽거린 지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주려면 왜 부른 거야?

 

 리무진의 좌석은 당장이라도 잠이 올 것처럼 푹신했지만, 지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밖에는 거리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구나. ……하암.’

 

 푹신한 좌석에 편안하게 기대앉았더니 눈꺼풀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저절로 감겼다. 차 안의 따뜻한 히터 바람을 느끼며 설핏 잠이 들었던 지현은 차가 멈춰 서자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려요.“

 

 사장님은 짧게 한 마디하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홀로 차 안에 남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현은 백미러로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차에서 내렸다.

 

  '여긴 AK 백화점이잖아?‘

 

 첫 월급을 타고 부모님의 선물을 사기 위해 들렸던 AK 백화점에 들어온 지현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여긴 왜 아무도 없어요?“

 

  "오늘은 백화점 휴무입니다.“

 

  "네? 오늘이 휴무라고요?“

 

  "네, 난 사람들이 많은 건 딱 질색이라서요.“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활동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우빈은 지현에게 팔 한 짝을 내밀었다.

 

  "왜요?“

 

  "이제 한지현 씨가 해야죠.“

 

  "아, 맞다.“

 

 지현은 그가 내민 팔을 덥석 잡고 올라가는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휴무인 백화점에는 왜 온 거예요?“

 

  "백화점에 쇼핑하러 오지, 왜 오겠습니까.“

 

  "쇼핑이요?“

 

  "한 비서 쇼핑 안 좋아합니까?“

 

 그럼 혹시 나를 쇼핑시켜 주려고 여기에 데려온 건가?

 

  “올라가서 한 비서 마음에 드는 거 전부 골라요.”

 

 엘리베이터에 사장님의 은근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마음에 드는 걸 전부 고르라고?

 

  "사장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요.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 비서한테 농담한 적 없습니다. 한 비서는 내가 하는 말을 전부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군요.“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우빈은 흰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빈이 쉽게 방향을 잡지 못하자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지현이 그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이러는 걸까.

 

 안으로 들어서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럽고 화려한 명품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잡지에서만 보던 명품들을 실제로 처음 본 지현의 동공이 저절로 커다래졌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고, 괜히 사지도 못할 것 구경만 하면 마음만 심란해질 것 같아서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던 7층이었다.

 

 친구들은 월급 타면 돈을 모아서 명품을 사기도 했지만, 혼자 나와서 사는 지현은 월세에 주유비에 보험료에 통신비에 생활비 등을 내기에도 월급이 빠듯했다. 반짝거리는 명품을 보고 이내 지현의 반응이 심드렁해졌다.

 

 사람이 주제 파악을 해야지, 나한테 이런 게 어울리기나 할까.

 

  "여기에서 한 비서 마음에 드는 거 다 가져와요.“

 

  "네? 됐어요. 필요 없어요.“

 

 명품이 있어도 출퇴근만 하는 지현은 어차피 들고 나갈 곳도 없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가져와요. 이게 내가 원래 쇼핑하는 방식이니까.“

 

  "계산도 안 하고 그냥 가져가는 게 사장님이 쇼핑하는 방식이세요?“

 

  "네.“

 

  "왜요?“

 

  "여긴 내 백화점이잖아요.“

 

 우빈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지현이 입이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문이 잠긴 AK 백화점 안에 사장님과 단둘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사장님의 개인 코디네이터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현과 어울리는 명품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개인 코디네이터는 사장님의 명령이라며 그녀에게 어울리는 명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골라주었다.

 

 휴무에 출근한 직원들은 솜씨 좋게 지현의 명품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분주하게 지현에게 어울리는 가방, 구두, 원피스, 코트, 정장, 액세서리 등등을 고른 개인 코디네이터는 이제 사장님의 옷을 고르는 데 한창이었다.

 

 백화점은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조용했다. 소파에 앉은 지현의 옆에는 갖가지 명품이 담긴 쇼핑백이 있었다.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 같아서 지현은 사장님의 쇼핑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애꿎은 손톱을 뜯었다.

 

  "자, 이제 내려갑시다.“

 

 쇼핑을 다 마친 우빈은 지현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로 갔다. 황송하게도 직원들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지현도 그들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에 그와 단둘이 남은 지현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사장님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아무리 AK 백화점이 사장님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파는 물건이 사장님의 소유인 건 아니지 않나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이 백화점이 사장님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산은 하고 가져가야 한다 이 말이죠.“

 

 대학에서 경영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현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난 저것들을 그냥 가져가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계산할 겁니다.“

 

  "나중에요?“

 

  "네, 저기에서 파는 물건들은 하나에 몇백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 제품입니다. 매출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고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 알고 있죠?“

 

  "네? ……네.“

 

 실제로 있는 물건의 수와 장부에 적혀 있는 수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만으로도 손해가 적어진다는 것을 들었던 지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원들이 재고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내가 전부 확인할 수 없으니 가끔 이렇게 불쑥 찾아가서 내가 마음에 드는 것들을 가져옵니다. 그러고 나서 직원들에게 무엇이 없어졌는지 찾으라고 하죠. 그럼 재고 관리를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현의 입이 또 한 번 크게 벌어졌다.

 

 헐, 뭐야? 이 남자 왜 이렇게 똑똑해? 난 손톱을 보는 데 이 사람은 달을 보네.

 

 우빈의 탁월한 경영 능력에 감탄한 지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빈이 AK 백화점의 경영을 맡은 이후로 매출이 수직상승 했다는 사실을 지현은 모르고 있었다.

 

  "볼일 다 끝났으니까 이제 집에 갑시다.“

 

 지현에게 어울리는 명품을 사주는 김에 쇼핑도 하고, 백화점 재고 관리도 한 우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지현의 팔 대신 활동 보조인의 팔을 잡았다. 주차장에 세워진 리무진으로 걸어가는 우빈을 보면서 지현은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잠깐, 근데 이게 데이트야?'

 

 

 

 ***

 

 

 

 사장님의 지시로 고른 명품들을 모조리 차에 싣는 바람에 지현의 주변은 명품들로 가득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기대했던 지현은 왠지 허탕 친 기분이라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앉은 우빈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척 신이 나 보였다.

 

 백화점을 나온 우빈은 운전 기사에게 지현의 집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지현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소중한 일요일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 같아서 싱숭생숭했다.

 

  "죄송한데 지금 내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왜 그러는 겁니까?“

 

  "제가 저녁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요.“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면 무척 우울할 것 같아서 지현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는 사촌 동생 은비 얼굴이나 보고 가기로 했다.

 

  "약속 장소가 어디입니까. 데려다줄 테니까 얘기해봐요.“

 

  "여기서 멀어요. 주말이라 차도 막히는데 지하철 타면 더 빠를 거예요.“

 

  "상관없으니까 말해요.“

 

 사장님은 상관없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혼자 지하철 타는 게 더 편해요.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오는 월요일이 두려워진 지현은 속으로 투덜대면서 은비가 일하고 있는 대학병원을 말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창밖만 보는 것도 지겨워진 지현은 앞 좌석에 탄 활동 보조인에게 라디오를 켜달라고 부탁했다. 활동 보조인이 머뭇거리며 사장님의 눈치를 보자 지현은 옆에 앉은 사장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죄송한데, 라디오 좀 켜도 될까요?“

 

  "그래요. 한 비서 마음대로 하세요.“

 

 활동 보조인이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로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한 곡당 보통 길이가 40분이 넘어가는 클래식은 지루해서 질색이었지만, 음악을 트니 무거웠던 분위기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주말을 즐기기 위해 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 때문에 리무진은 클래식 음악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지루해진 지현은 빨리 음악이 끝나고 DJ의 멘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 여러분, 곧 있으면 올림픽이 시작됩니다. 올림픽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농담이 있는데요.

 

  - 그게 뭔가요?

 

  - 패럴림픽 마라톤에서 1등 하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마라톤에서 1등 하면 금메달 아닌가요?

 

  - 아뇨. 그냥 병신이죠.

 

  - 으하하, 진짜 DJ님 대단하세요. 역시 DJ님 말발 앞에서 저는 항상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니까요.

 

 저게 재밌나?

 

 라디오에서 DJ와 패널이 웃긴다면서 떠드는 말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짜증만 유발했다. 빨리 음악이나 틀던지 다른 주제로 넘어갔으면 좋겠건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 게시판에 올려온 사연 읽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장애인인 친구를 따라 하면서 놀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정의감 넘치는 아저씨께서 '친구 놀리면 안 되지!'라고 화를 내시며…… 장애인 친구의 뺨을 때리셨습니다.

 

  - 으하하하하!

 

  "저기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를 듣고 지현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활동 보조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죄송한데 라디오 좀 꺼주시겠어요?“

 

  "네? ……네, 알겠습니다.“

 

 조금 신경질적인 그녀의 말투에 활동 보조인은 당황하며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시끄러운 소리 대신 정적이 감돌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지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층간 소음에 맞먹는 소음을 듣고 있느니 그냥 조용히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우빈은 여전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우빈은 자는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자는 게 더 낫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진 지현은 빠르게 높아진 차의 속도에 안심하며 좌석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전화.“

 

  "네?“

 

  "전화 왔습니다.“

 

 우빈의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현은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 언니, 나 은비야.

 

  "은비야, 일 다 끝났어?“

 

  - 응, 언니는 지금 어디?

 

  "나 지금 가는 중인데 차가 막혀서 조금 시간 걸리겠다. 먼저 끝났으면 근처 카페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

 

  - 알았어. 언니. 그럼 도착하면 연락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통화를 한지현은 전화를 끊고 다시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친구랑 만나는 겁니까?“

 

  "아니요. 동생이에요.“

 

  "친동생입니까?“

 

  "아니요. 사촌 동생이요. 저도 외동딸이고 은비도 외동딸이라서 서로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한 비서가 외동이었군요.“

 

  "네. 사장님도 외동 아니신가요?“

 

  "…….“

 

 지현의 물음에 우빈은 다시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기사가 운전한 리무진이 은비가 일하고 있는 병원 근처에 다다르자 지현은 어깨에 가방을 메고 내릴 준비를 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여기서 내릴게요.“

 

  "잠깐만요. 한 비서의 집 비밀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 집 비밀번호요?“

 

 사장님의 뜬금없는 질문에 지현은 내리려다 말고 다시 좌석에 주저앉았다.

 

  "우리 집 비밀번호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여기 있는 거 한 비서의 집 안에 가져다 놓으려고요.“

 

 우빈은 백화점에서 산 명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내 개인 코디네이터가 한 비서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직접 고른 겁니다. 내가 한 비서 집에 가져다 놓는 게 불편하다면 내일 한남동 저택에서 전해 줄까요?“

 

 한남동 저택에서 우빈이 지현에게 쇼핑백 한 꾸러미를 건넨다면 그녀의 뒤에서 직원들이 이상한 말들이 쏟아낼 것이 분명했다.

 

  "이거 그냥 사장님 가지시면 안 되나요?“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가집니까. 난 여자 옷 입는 이상한 취미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사장님이 그녀에게 쇼핑백을 주려는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한남동 저택에서…….“

 

  "아니,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지금 들고 갈게요.“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겠습니까?“

 

  "네, 들고 갈 수 있어요.“

 

  "집에 갈 때는 어떻게 하려고요?“

 

  "집에 갈 때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가을에 천 포기씩 김장하는 한식집의 장손녀답게 은근 팔뚝 힘이 장난 아니었던 지현에게 쇼핑백 열 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직원들 보는 앞에서 받느니 그냥 지금 내 손으로 들고 가는 게 몸을 불편해도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양손에 쇼핑백을 든 지현은 씩씩한 목소리로 사장님께 인사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사장님.“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지현은 아까 사장님의 어색한 침묵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장님에게 다른 형제가 있었나?’

 

 리무진에 앉은 우빈이 그녀가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현은 미처 알지 못했다.

 

 

 

 ***

 

 

 

 대학병원 근처 카페에 도착한 지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은비를 찾았다. 일단 양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올려놓기 위해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지현은 주먹으로 저릿한 팔뚝을 두드렸다.

 

  '에고, 역시 쇼핑백 열 개 한 번에 들기는 무리였나.‘

 

 커피를 시키기 위해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 지현의 등 뒤에서 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현이 언니, 나 저기에 자리 잡아……어어어? 이게 뭐야?“

 

 눈을 크게 든 은비가 지현이 들고 온 쇼핑백을 보며 기함을 했다.

 

  "언니,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야 쇼핑백이지.“

 

  "이거 다 명품이잖아? 버는 족족 적금 통장에 들이붓던 언니가 이게 웬일이래. 언니, 드디어 인생 즐기기로 한 거야?“

 

  "얘도 참, 호들갑은…….“

 

 은비의 호들갑에 대충 대꾸한 지현은 계산대로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갑자기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려서 왜 그러나 했는데 언니 때문이었구나. 이야, 예쁘게 화장도 하고 평소에 안 입던 치마도 입었네. 언니, 혹시 오늘 데이트했어?“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받으며 지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데이트가 아니라 재고 관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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