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곰 인형보다 귀여워요.
"배우자 모집 광고라니, 엄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단 이거부터 먹어. 먹고 나서 얘기해.“
송이는 조 여사가 손수 찢어주는 살코기를 받아먹으며 불퉁하게 물었다.
"한겨울에 무슨 삼계탕이야?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삼계탕 대신 칠면조 요리 해주면 안 돼?“
"너는 이게 닭으로 보이니?“
"닭 아니야?“
조 여사는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게 무슨 닭이야, 오리지. 이건 삼계탕이 아니라 오리 백숙이야. 너는 명색이 한식 대모 딸인데 닭이랑 오리도 구분 못 하니?“
조 여사가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내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송이는 억지로 오리고기를 씹었다.
"근데 첫째 오빠도 오리고기 좋아하잖아. 오빠나 주지 나는 왜.“
"됐어. 걔야 지 마누라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너나 많이 먹어. 국물 뽀얀 거 봐. 이건 요리가 아니라 약이다, 약.“
각종 약재를 넣어 오리 백숙을 끊인 조 여사는 혹여나 막내딸 송이만 챙기는 것이 며느리에게 들킬까 싶어서 계속 문 쪽을 쳐다보았다.
"엄마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왜 지현이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거야?“
"왜긴 왜야. 다 너 때문이지.“
"왜 또? 엄마는 뭐만 하면 나 때문이래.“
송이가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자 조 여사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너 때문이니까 너 때문이라고 그런 거지. 엄마가 괜히 그러겠어?“
지금은 저세상으로 간 남편과 함께 육안동에서 한식집을 시작했던 조 여사는 어느새 한식 대모라 불리는 요리 거장이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요리 좀 배우라고 했잖아. 그냥 가만히 옆에서 사람들 하는 거 지켜보고만 있어도 닭이랑 오리는 구분할 줄 알겠다. 이것아!“
조 여사가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밥상을 딱, 내려치자 송이는 뜨끔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엄마가 요리 비법 같은 거 다 알려주고 무궁화도 물려줄 테니까 요리 좀 배우라고 했더니 귓등으로도 안 듣고. 너 엄마 말 안 들어서 지금 집에서 놀고 있는 거잖아.“
"엄마, 난 요리하는 거 진짜 싫어. 나보고 새벽에 일어나서 매일 요리 재료 다듬으라고? 그것도 평생? 난 못 해. 아니, 안 해!“
송이의 말에 조 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 늦둥이라서 곱게 키워서 그런가, 왜 이리 철딱서니가 없어.
"어휴, 자식이 원수다, 원수야."
딸에게 무궁화를 물려주려고 했던 조 여사의 거대한 계획은 요리에는 소질도 흥미도 없는 송이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
"엄마 또 그 소리 하려고 그러지? 난 무궁화 물려받기 싫으니까 그냥 새언니보고 이어받으라고 해. 솔직히 지금 무궁화의 안주인은 새언니나 마찬가지 아니야? 10년 전부터 새언니가 무궁화 운영하고 있는데 그냥 새언니한테 물려 주자.“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무궁화를 걔한테 왜 물려주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조 여사가 크게 언성을 높이자 기가 죽은 송이가 얼른 젓가락을 들어 오리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음, 마, 맛있다. 역시 엄마 요리 솜씨 어디 안 가네? 무궁화의 진정한 안주인답다니까.“
송이는 실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조 여사의 눈치를 살폈다. 조 여사는 쯧, 하고 혀를 튕겼다.
"나도 뭐 지현이를 진짜로 결혼시키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집 나간 그 계집애가 내 말을 듣겠니?“
"근데 왜 지현이한테 결혼하라고 그러는 거야?“
아이 참, 얘는 내 딸이지만 눈치가 없어.
답답해진 조 여사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탁 내려치며 송이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애미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지.“
"생각? 무슨 생각?“
“내 생각이 뭐냐면…….”
문이 제대로 잠겨 있나 확인한 조 여사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육안동이 강남 노른자 땅인 거 알지? 여기 땅을 좋은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땅값 이야기가 나오자 송이는 귀를 기울이며 초집중했다.
"너도 알다시피 네 새언니가 오죽 독하니? 만약에 내가 무궁화를 닫는다고 하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난리 칠 거야.“
"맞아. 새언니는 진짜 그럴 것 같아. 사실 무궁화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 새언니 사람들이잖아. 새언니 성격에 무궁화 닫으면 그 사람들 전부 직장 잃는다고 난리 칠 게 뻔하지.“
"그러니까 걔는 절대 이 땅을 못 팔게 할 거라고.“
조 여사는 더 작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
"지현이가 결혼 못 하겠다고 하면 엄만 그걸 핑계 삼아서 네 새언니를 여기서 내쫓을 생각이다.“
“엄마는 참,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 땅을 팔 수 있을 것 같아?”
“왜 아니야?”
“그럼 지현이 계집애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분명히 우리가 여기 땅을 팔 거라는 걸 미리 눈치챈다니깐”
머쓱해진 조 여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송이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냥 엄마 마음대로 팔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여기 엄마 땅이잖아.”
“그래도 되나?”
“그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내 땅 내 맘대로 팔겠다는데 그걸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나쁜 짓 할 때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송이는 조 여사에게 기발한 묘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엄마, 지현이가 거기서 만난 사람이랑 진짜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그럼 다 망하는 거잖아.“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세상에 '절대'라는 말이 어디있어. 솔직히 지현이가 결혼하기 싫다고 싫다고 해도 괜찮은 사람 만나면 마음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지현이 좋은 일만 시키는 거잖아.“
송이가 잔뜩 이맛살을 구기자 조 여사는 낄낄대며 손을 공중에서 휘저었다.
"설마 내가 뽑은 남자들을 뽑았겠니. 1차 서류 전형에서 다 형편없는 놈들을 뽑았으니까 지현이가 맞선 본 남자랑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정말?“
"그래, 다들 지현이보다 10살 정도 많거나, 아니면 한 번 갔다 왔거나, 애가 딸려있거나. 그렇게 하자 있는 애들만 뽑아서 초대장 보낸 거야.“
"우와, 엄마 진짜 똑똑하다.“
안심한 송이가 환하게 미소를 짓자 조 여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엄마가 다 너 생각해서 한 일이니까 괜히 입방정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겠지?“
"응. 당연하지. 내가 미쳤다고 다른 사람한테 말하겠어?“
어느새 오리 백숙 한 그릇을 다 비운 송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랬구나. 아, 난 또 괜히 걱정했네.“
"걱정? 무슨 걱정?“
"지현이가 괜찮은 남자랑 결혼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지현과 나이가 비슷했던 송이는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 지현에게 내심 질투를 하고 있었다.
‘흥, 하자 있는 남자랑 맞선 보다니, 꼴 좋다.’
***
'에휴, 정말 유치하다. 아니, 클래식하다고 해야 하나?‘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내려간 지현은 자신이 늘 앉는 자리에 있던 의자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딱히 지정석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긴 항상 내가 앉던 자리였는데. 교복 입은 애들도 안 하는 짓을 누가 한 거야.‘
분명히 날 괴롭히려고 일부러 의자를 숨긴 것이 분명해.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은…… 분명히 한 사람밖에 없지.‘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던 지현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지은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범죄자는 다시 범죄 현장에 나타난다. 주모자는 항상 왕따를 주시하고 있다.’
또각또각.
지현은 성큼성큼 걸어가 밥을 먹고 있는 지은의 앞에 당당하게 섰다.
"지현 씨,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왜 그런 살쾡이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야? 무섭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자기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시치미 떼는 지은을 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제 의자 어디에 있어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은이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지현은 살짝 떨린 그녀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제가 늘 앉던 의자 치워놓기. 그다음엔 뭐예요?“
"글쎄, 지현 씨 책상 위에 쓰레기 올려놓기?“
"푸훗.“
지현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튀어 나가자 앉아있던 지은이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지금 웃은 거야? 진짜 무섭다. 사이코패스네, 사이코패스야. 세아 씨, 지금 지현 씨가 나 비웃는 거 봤어? “
"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세아가 지은의 말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세아 씨, 얼른 말 좀 해봐. 지금 지현 씨가 가만히 있는 나한테 시비 걸고, 막 이상한 소리 하고, 나보고 픽 하고 비웃는 거 봤잖아. 못 봤어?“
"제삼자는 건드리지 말죠?“
지은이 괜히 옆에 있는 세아를 쥐 잡듯이 잡자 지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세아 씨는 건드리지 마요. 이거 지은 씨랑 나와의 문제잖아요.“
지현의 똑 부러지는 말에 뾰족하게 올라가 있던 지은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럼 툭 터놓고 얘기하자.“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지현 씨. 내가 사장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앞으로는 아닌 척 척하면서 뒤로는 사장님한테 꼬리나 치고 다니고, 그거 장희빈이나 하는 짓 아니야?“
졸지에 희대의 악녀 장희빈이 된 지현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호흡을 고른 지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은 씨, 나도 지은 씨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고백도 하기 전에 실연당한 것 같아서 억울하고 열 받겠죠.“
어느새 식당에 있는 직원들은 언쟁을 벌이는 지은과 지현을 보고 있었다.
“지은 씨, 그래도 사람을 뒤에서 몰래 괴롭히거나 아무 죄 없는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면 안 되죠. 난 진짜로 사장님한테 꼬리 친 적 없어요.“
지현을 빤히 주시하던 지은이 풋, 하고 비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차라리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
지은이 삐딱한 말투로 쏘아붙이자 지현은 답답한 듯 표정을 구겼다.
속고만 살았나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을까.
"지은 씨, 나 정말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지현 씨가 거짓말할 사람은 아닌데…….“
옆에 가만히 있던 세어가 지현의 편이 들자, 지은은 다시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왜 이렇게 소란이야?“
식당이 소란스러워지자 여정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여정이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지은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렸다.
‘아, 이 사람 또 시작이네.’
"선배님. 죄송해요! 다 제가 모자란 탓이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지현 씨가 사장님을 꼬셔도 제가 뭐라 할 권리는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끝난 기분이라 많이 슬펐고 절망스러웠어요.“
울먹거리던 지은이 테이블 위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어 통곡했다. 지은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지현은 얼른 티슈를 뽑아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지은 씨,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치켜보고 있던 여정이 시크하게 말했다.
"지은 씨, 가사 도우미 하지 말고 아예 연기자로 전향하는 게 어때?“
"……히히, 티 났어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은이 고개를 들며 소름 끼치게 웃자, 어이가 없어진 지현은 입을 벌렸다.
‘진짜 우는 게 아니라 우는 척 한 거였어? 부, 분명히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울고 있었는데…….’
황당함에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지현을 보고 옆에 있던 세아가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티 나지 그럼 안 나? ‘지갑 얇은 남자는 만나면 안 된다’,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 ‘내 꿈은 취집’이 좌우명인 지은 씨가 그럴 리가 없지.“
“아씨, 진짜 여정 선배님은 날 너무 잘 알아.”
“잘 들어. 한 번만 더 지현 씨 괴롭혔다가 당장 한남동에서 쫓겨날 줄 알아.“
황송하게도 여정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옹호하자 지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아, 정말로 여기서 버티길 잘했어. 구여정 선배가 내 편을 들어주는 날이 오다니!
"딱 봐도 사장님이 일방적으로 한지현 씨 따라다니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안 되지.“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지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건 사장님의 일방통행입니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밥 먹으면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고 조용히 좀 해. 알겠어?“
여정의 큰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리고 몸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지현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여정은 그녀를 본체만체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한 비서,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왜요?"
"많이 슬픈 것 같아서요.“
그를 바라보며 눈꺼풀만 깜박이던 지현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음 그게…… 신기하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요?.“
우빈이 오른손으로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듣고 알았어요. 오늘따라 지현 씨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거든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우빈이 다정한 목소리에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요. 별일 없었…….”
우빈이 얼른 품 안에 있던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냥 전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나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나 때문에 지현 씨가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합니다.“
"에구,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우빈의 손수건으로 찍어낸 지현은 감성을 추스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할머니 때문이에요.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유독 싫어하셨어요. 내가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다고 뭐라고 하시고, 공부하면 공부한다고 뭐라고 하셨죠.“
"뭘 해도 구박하면 대체 어쩌라는 건가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정말 답답했어요."
이미 지난 일이고 과거니까 훌훌 털어버리려고 해도, 아직도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할머니를 보면 서러움에 목이 메어왔다. 지현의 고백에 우빈은 진심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지현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 진짜 신기하네요. 목소리만 듣고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의 감정을 알아챌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요?“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있어요. 멀리서 들어도 귀에 쏙쏙 박히고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쁜지 슬픈지 화가 났는지, 감정이 바로 여기로 전달되는 목소리.“
우빈이 손바닥으로 그의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지현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하게 아니라 특이해서 잘 기억하는 거 아닌가? 제 목소리가 좀 특이하잖아요.“
"아뇨. 특별해서 기억하는 겁니다.“
무심한 말투로 대답한 우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자 지현의 심장에 알싸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내 심장이 왜 이래. 무슨 병이라도 생긴 걸까.‘
요즘 들어 자주 나타나는 심장의 이상 증세의 원인이 무엇인지 지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병의 이름은…… 설마 상사병?’
옆으로 고개를 돌린 지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와, 사장님, 밖에서 눈이 와요.“
"그런가요?“
겨울에 태어난 그녀는 유독 눈이 내리는 날을 좋아했다. 원래 나이 먹으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똥으로 보인다던데, 지현은 다행히 아직도 눈 오는 날이 좋았다.
"이번 해 12월에 눈이 엄청 자주 오네요. 이러다가 정작 크리스마스에 눈이 안 오면 어떡하죠?“
"지금 오나 크리스마스에 오나 똑같은 거 아닌가요?“
"아뇨. 달라요. 전 꼭 크리스마스에 눈이 왔으면 좋겠어요.“
우빈이 아무 리액션도 보이지 않자. 지현은 피, 하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때 꼭 눈이 오게 해달라고 산타할아버지한테 기도해야겠어요.“
"선물로 눈 내려 달라고 빌까요?“
“농담으로 하는 말인데 정말 기도하게요?”
“네, 전 착한 어른이니까 들어주실 거예요.”
앞에서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현은 꿋꿋이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착한 어른이는 아니지만…….”
지현은 기도하는 손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화들짝 놀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자신의 손 위로 두 손을 겹치고 기도하는 우빈의 얼굴이 보였다. 지현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하지만 결 좋은 피부. 말려있는 긴 속눈썹. 일자로 다문 다부진 입매에서 강단 있는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보였다.
지현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우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도할 때 눈 뜨면 신이 소원 안 들어주는 데.“
"어머, 정말요?“
우빈의 말에 얼른 눈꺼풀을 닫은 지현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쓰담 쓰담.
다정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우빈의 손길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지현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덤덤하게 물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냥 지현 씨 머리 쓰다듬어 주고 싶어서요.“
"내가 무슨 곰 인형이에요?“
우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곰 인형보다 귀여워요.“
이미 공기 중에 흩어진 우빈의 희미한 목소리가 지현의 가슴 깊은 곳에 은근하게 들어왔다. 우빈의 커다란 손은 계속해서 지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지현 씨, 지현 씨는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요.“
고막을 울리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지현은 깜박이던 눈꺼풀을 멈췄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걸까.
"위로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해요. 내가 언제든지 머리 쓰다듬어 줄 테니까.“
그 말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지현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네, 고마워요. 사장님.”
불타는 고구마가 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내린 지현은 들고 있던 보고서 한 장을 팔랑,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