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뽀뽀한 거 비밀로 해줘요
우빈이 야외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AK 그룹의 공식행사로 이루어지는 정민의 생일파티 준비에 한창이었다. 한쪽에는 고기와 술, 음식을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뷔페가 마련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회장 일가가 앉는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야, 어마어마하네. 생일잔치에 손님들한테 푸아그라를 대접하다니.“
석환은 놀란 표정으로 행사장 이곳저곳을 살피며 기함했다.
"그래, 오늘은 할아버지 생신이시니까.“
"회장님 생일파티를 여기서 하는 거예요? AK 그룹 공식 행사장에서?“
“할아버지는 당신께서 회삿돈을 마음대로 쓰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회장님의 생신은 항상 AK 그룹 공식행사로 열리지.”
"그래요? 그럼 경비는 AK 그룹 돈으로 내는 거고?“
"그래. AK 그룹에 일반 사원이 법인카드로 자기 담배 한 갑을 사면 바로 징계를 받는데, 회장님은 언제나 회삿돈을 마음대로 쓰시지.“
"왜요?“
"그거야 회장님은 일반 사원과 '신분이 다른 사람'이니까.“
우빈의 말에 석환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시렁댔다.
"언제부터 한국이 계급사회였다고.“
석환의 자동차 옆좌석 앉은 우빈은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권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회사 공금으로 유럽 귀족 흉내 내기를 좋아했다.
"형, 그런데 나 한 가지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
"형은 왜 재벌이면서 서민처럼 생각해요?“
"…….“
"내가 변호사 생활하면서 여러 사람 만나봤는데 형 같은 별종은 처음이에요.“
석환의 솔직한 말에 무안해진 우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과 이익에 맞게 생각하거든요. 재벌은 재벌답게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근데 형은 재벌인데 노동자처럼 생각해요.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노조.“
핵심을 찌르는 석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우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예전에는 재벌처럼 생각했었어. AK 그룹에 노조가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왜 바뀐 거예요?“
"……그냥 생각이 바뀌었어. 심경의 변화랄까.“
우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석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AK 그룹의 후계자인 우빈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의아했고 의심스러웠지만, 지난 1년 동안 지켜 봐온 우빈은 진심으로 AK 그룹의 경영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는지 궁금했지만, 석환은 우빈이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어있던 자리가 회장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꽉 차고 행사 준비가 끝나자 우빈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행사의 주인공인 할아버지가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시니까 난 이제 저기로 가야겠다. 넌 손님들 자리에 앉아서 맛있는 거 챙겨 먹어.“
"알겠어요. 아, 형. 괜찮으면 내가 음식 가져다줄까요? 형은 마음대로 못 움직이잖아요.“
"아니, 됐어. 음식 가져다줄 필요 없어.“
"왜요?“
"저쪽엔 셰프가 더 좋은 재료로 특별히 신경 쓴 음식이 따로 제공돼.“
"그, 그래요?“
"그래. 권씨 집안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순 없지.“
"……신분이 다르니까?“
우빈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내년에 채린이가 소개해준 사람과 결혼하면 너한테 AK 면세점을 물려주겠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우빈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우빈이 미간을 좁히든 말든 권정민 회장은 무감각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가 결혼을 해야지 부하 직원들에게 무시 안 당한다. 앞 못 보는 병신이라도 멀쩡하게 결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권위가 서는 거야.“
"맞아요, 사장님. 회장님 말씀대로 하세요. 회장님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앞에 마주 앉아있던 양숙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정민의 말을 거들었다. 양숙은 A 항공 조 회장 첩의 딸로 우빈의 친모가 먼저 목숨을 끊은 후 영한이 기업을 위해 정략결혼 한 여자였다. 옆에는 양숙의 외모를 빼다 박은 채린이 앉아있었다.
"채린아, 사장님한테 소개해줄 친구가 어떤 친구라고 했지?“
"네, 정말 예쁘고 참하고 괜찮은 친구예요. 이름은 미선인데, 되게 얌전하고 조용한 타입이라 남자 힘들게 할 스타일은 절대 아니에요. 미선이는 경제적인 부분만 충족된다면 뭐든지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진짜 괜찮다. 경제적인 부분이야 AK 그룹의 후계자인 우리 사장님한테는 식은 죽 먹기지. 진짜 잘 어울리는 한 쌍이겠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빈이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었다. AK 그룹에 며느리로 들어온 양숙은 영한과 결혼하면서 채린을 AK 그룹의 경영에 참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채린에게 AK 그룹을 물려받게 하려는 양숙의 야욕은 우빈이 부친이 사망한 후 더욱 노골적여졌다.
채린이 소개해주는 여자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양숙의 의도는 뻔했다. AK 그룹의 황제나 다름없는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서 회사를 이어받아 경영하길 원하는 것이다. 우빈이 예민하게 날을 세우자 정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는 할아버지 앞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채린이가 너 생각해서 여자 소개해주겠다는 건데 이따위로 굴다니. 아무리 AK 그룹의 후계자라도 너 같은 병신이랑 누가 결혼하려고 하겠니.“
부모님에 이어서 형까지 목숨을 끊자, 좋았던 할아버지와 우빈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형의 죽음을 계기로 할아버지의 가치관이 틀렸다고 생각한 우빈은 정민의 경영 방식에 관해 정면으로 도전했다. 언제나 할아버지 말에 복종하던 우빈이 그의 대척점에 서자 정민은 격노했다.
"어디서 이상한 물이 들었는지, 원.“
정민이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차자 우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 거야?“
"답답해서 바깥 공기 좀 마시겠습니다.“
고집스럽게 흰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사라지는 우빈을 보고 정민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
끼이익.
사무실 문을 여니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곤히 잠들어 있는 지현이 보였다. 잠든 지현을 보고 안심한 우빈은 성큼성큼 그녀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곁으로 다가간 우빈은 세상모르고 잠이 든 그녀를 재밌는 영화 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에서 무언가를 먹는 듯 우물거리는 지현을 보고 우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 비서."
우빈이 그녀를 불렀지만 얼마나 깊이 잠든 건지 지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한 비서, 업무시간에 자면 어떡합니까?“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지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우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평온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자신의 마음도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지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우빈의 귓속에서 단호했던 정민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ㅡ 내년에 채린이가 소개해준 사람과 결혼하면 너한테 AK 면세점을 물려주겠다.
정민은 항상 우빈을 손자로 대하지 않고 AK 그룹의 후계자로 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빈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에게 철저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머리가 좋아 선생들의 애를 먹이는 질문도 자주 했던 우빈은 자신이 남들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특별하게 자라는 대신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했던 우빈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년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은 형과 함께 아버지와 정원에서 캐치볼을 하던 것밖에 없었다.
정민이 특별히 우빈을 아끼면서 그는 부모님과도 평범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자신을 어려워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자신에게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AK 그룹의 후계자로 키워졌던 우빈은 자신이 정민에게 사육당했다고 생각했다.
우빈은 발소리를 죽이고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그녀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지현 씨."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잡니까?“
그녀는 역시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달게 자는 그녀를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우빈이 피식 웃음을 짓고 뒤돌아섰다.
'깨우지 말아야겠다.‘
그녀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온 우빈은 3층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지현의 사무실을 다시 찾은 우빈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더니, 문틈으로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가까이에 다가간 우빈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그때였다.
"으음.“
조용히 잠이 들어있던 지현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응? 사장님?"
우빈은 놀라지도 않고 침착하게 그녀의 이마에서 입술을 뗐다.
"들켰네. 몰래 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지현을 내려다보던 우빈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로 해줘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지현이 물었다.
"뭘요?“
우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뽀뽀한 거요.“
***
한남동 저택에는 운동장만 한 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길을 잃은 지현은 우연히 남자아이를 만났다.
"뭘 보니?"
"누나 봐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몰래 자신을 따라와 놓고는 도도하게 대꾸했다.
"왜 누나가 예뻐서 보는 거야?"
유명 아이돌 기획사의 연습생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남자아이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너 지금 나 비웃는 거니?"
똘똘한 얼굴의 꼬마는 대답하는 대신 픽 웃기만 했다.
"근데 너 왜 아까부터 내 주위에 있었던 거야?“
"거기 제 자리인데.“
윤성은 손가락으로 지현이 앉아있는 벤치 모양 그네를 가리켰다.
"아, 그랬어?“
지현이 얼른 엉덩이를 옆으로 옮기자 윤성이 바로 달려와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제 보고서를 준비하느라 밤을 새웠던 지현은 점심시간에 깜박 잠이 들었다.
ㅡ 비밀로 해줘요.
ㅡ 뭘요?
ㅡ 뽀뽀한 거요.
'정말 이상한 꿈이야. 내가 왜 그런 꿈을 꿨지?‘
현실성 없는 꿈이었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현실같이 생생했던 꿈이라 지현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꿈은 자신의 욕망을 반영한다던데,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해?
지현은 우빈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에 살며시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찌르르 떨려왔다.
고개를 내저은 지현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윤성이요. 이윤성.“
눈빛은 진지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생기 없어 보이는 윤성에게 지현은 쾌활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이윤성. 이름 정말 멋있다. 얼굴처럼 이름도 멋있네?“
무표정이던 윤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지현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근데 넌 누구니? 혹시 아버지가 여기서 일하시니?“
"아뇨. 우리 부모님 다 돌아가셨어요.“
덤덤한 윤성의 목소리에 지현은 말문이 막혔다.
"괜찮아요. 저한텐 형이 있으니까요.“
"형? 그게 누군데?“
지현의 질문에도 윤성은 대답 없이 발장난만 쳤다.
"근데 너는 어디에서 왔어?“
윤성이 벌떡 일어서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윤성아, 어디가? 갈려면 나도 데려가. 무섭단 말이야!“
사라지는 윤성을 뒤따라간 지현은 소담하게 자리 잡은 주택을 우연히 발견했다. 문고리를 잡자 밀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2층짜리 주택의 내부는 깔끔하고 넓었지만, 저택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소박했다. 고급스럽고 위압감이 넘치는 저택과는 다르게 이곳은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 감돌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층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업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일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는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와 미술 도구들이 놓여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지현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빈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누구십니까.“
뒤를 돌아보자, 흰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는 우빈이 보였다.
"사장님, 여기 계셨네요.“
우빈과 마주치자 아까 꿈에서 그에게 이마 키스를 받은 것이 생각난 지현은 얼굴이 살짝 붉혔다.
"지현 씨였습니까?“
"네, 사장님.“
지현은 떨리는 심장 소리를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비서, 여긴 웬일입니까?“
"그냥 우연히 들렸어요.“
"우연히요?“
"……네.“
평소와 다르게 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어서 그녀는 우빈의 표정을 살폈다.
"구여정 씨가 별채에는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미리 경고해주지 않았습니까?“
우빈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지현은 처음 이곳에 왔던 여름을 떠올렸다.
ㅡ 한지현 씨, 반가워요. 난 구여정 이라고 해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한 여정은 한남동 저택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 세 가지를 알려주었다.
첫째, 사장님을 만나면 언제 어디서나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할 것.
둘째,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외부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 것.
셋째, 별채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 것.
사실 세 가지 규칙을 지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지현은 그동안 잘 지켜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별채였어?‘
지현은 경악한 표정으로 우빈을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사장님. 저는 여기가 별채인 줄 몰랐어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이에요.“
지현이 겁먹은 새끼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우빈은 팔을 굽히고 턱을 매만졌다.
불쌍한 고양이 눈빛 발사!
"그래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휴우,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지현은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요?“
"왜 저택에 가장 구석에 있는 별채까지 온 거죠?“
"아, 그게…….“
길을 잃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창피했다. 지현은 입을 꾹 다물고 양쪽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사실 제가 별채를 찾은 이유는…… 그냥 그럴 말한 사정이 있었어요.“
"무슨 사정이요?“
"그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우빈이 흰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내려치며 지현에게 다가왔다. 정확히 자신의 앞에 선 우빈과의 거리는 고개를 올리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우빈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꿈속에서 했던 이마 키스가 떠오른 지현은 시선을 내리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한 비서, 솔직히 말해봐요. 여기서 길 잃은 거죠?“
"어떻게 알았…… 엄마야!“
지현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나 진짜로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사장님 제가 길잃은 줄 어떻게 알았어요?“
"덜렁대는 지현 씨 성격 생각하면 뻔하죠.“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지현이 옆으로 눈을 흘기고 우빈을 바라봤다.
"제가 덜렁댄다고요?“
"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점심시간에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으면서.“
할 말이 없어진 지현은 입을 삐죽대고 그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우빈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 풀어져 있는 것을 보고 지현은 자수하듯이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요. 맞아요. 뒤숭숭한 꿈을 꿔서 기분전환 좀 하려고 나왔는데 정원이 너무 넓어서 길을 잃었어요.“
"무슨 꿈을 꿨는데요?“
"무슨 꿈이냐면…….“
저도 모르게 꿈에서 우빈에게 이마 키스 받은 사실을 털어놓을 뻔했던 지현은 엄지와 검지고 자신의 입술을 잡았다.
진짜, 너 오늘따라 왜 이러니. 가만히 좀 있자.
"무슨 꿈이었습니까?“
"음…… 그게, 무, 무슨 꿈이었냐면…… 그러니까…….“
지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서 꾸지도 않은 꿈 이야기를 지어냈다.
"굉장히 어두운 밤이었어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텅 빈 도시에 나 혼자 있었죠.“
"그런데요?“
그런데? 잠깐 그다음은 생각 안 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어요.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혼자 있는데 호랑이랑 마주친 거죠.“
"정말 무서웠겠네요.“
우빈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자 지현은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다.
믿는 건가? 그럼 나야 땡큐인데.
"네, 정말 무서웠어요, 꿈에서 호랑이가 나타나자마자 꿈에서 깼는데 뒤숭숭하더라고요. 계속 사무실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죠.“
"무서운 꿈을 꾸는 거 보니 지현 씨 몸이 아주 허해졌나 보군요.“
"그런가 봐요.“
"업무에 시달리는 한 비서한테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주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장님.“
지현은 완벽하게 그를 속였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어땠어요? 꿈에서 이마 키스 받으니까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 엄마야!“
뭐야,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지현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현의 얼굴이 불게 타오르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우빈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장님, 그런데 제가 거짓말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지현 씨는 거짓말하면 표정에서 다 티가 나니까요.“
"그래요?“
지현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티가 나는 데요?“
"거짓말할 때는 항상 바닥을 보잖아요.“
"그랬구나.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사장님 정말 눈치도 빠르시네요.“
손목시계를 보고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안 지현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지현은 뒤따라오는 우빈의 발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지금 내가 아주 중요한 걸 흘려버린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항상 사선으로 향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장님, ……지금 절 보고 계신 건가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지현은 심장이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뭐지?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거지? 거리가 너무 가깝잖아.
삐뽀삐뽀.
성큼성큼 다가온 우빈은 망설이지 않고 지현의 보드라운 입술을 머금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 우빈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우빈에게 밀린 지현은 살짝 허리를 꺾고 격정적인 그의 키스를 받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현이 그에게 떨어지려는 순간, 우빈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비밀로 해줘요.“
"뭘요?"
"키스한 거요.“
지현은 숨 쉬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채 우빈의 선명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사장님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