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왜 나한테 앞이 보인다는 걸 알려준 거예요?
"언제까지 날 피할 겁니까?“
나한테 할 말이 겨우 그거였어?
어이가 없어진 지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 물어보시려고 저를 찾아온 거였어요?“
"네, 그렇습니다.“
말문이 막혀서 어버버하던 지현이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나쁜 놈아!“
지현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자 우빈이 한족 눈썹을 추켜 올렸다.
"한 비서. 술 마셨습니까?“
"네, 마셨어요.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요?“
"진짜 많이 취했군요. 내일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럽니까?“
지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눌러서 말했다.
“골목길에서 혼자 걷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였고, 내가 달리니까 등 뒤에서 남자가 쫓아오고 제가 얼마나……!”
"많이 무서웠습니까?"
당연한 질문을 하는 우빈을 보고 울컥 감정이 치솟아 오른 지현은 크게 소리쳤다.
“그럼 무섭지, 안 무서웠겠어요?”
우빈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살며시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난 지현 씨가 나를 계속 피하길래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우빈이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과하자 지현은 코를 훌쩍이며 그의 어깨에 턱을 파묻었다.
"지현 씨, 왜 나를 피한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안 돼요. 물어보지 마요.“
지현의 단호한 말에 작게 웃음을 지은 우빈은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지현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있는 우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어.‘
처음부터 지현은 우빈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항상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우빈의 외모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치곤 키가 큰 자신을 내려다볼 만큼 우람한 체격에 조각상처럼 잘 다듬어져 있는 이목구비.
AK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로 가진 것도 많고 공부 머리도 타고나서 남부럽지 않은 그가 왜 시각장애인 연기를 하는 걸까.
세상 모든 신의 축복을 받은 것 같은 우빈의 내면은 기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현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어둡고 쓸쓸해 보이는 그의 내면이 궁금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장님이 섹시해 보이는 거지?‘
사장님은 잘생기기도 했는데 특히 아랫입술이……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지현 씨,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네? 네, 드, 듣고 있어요.“
"오늘 내가 내 집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왜 안 왔습니까.“
“사장님, ……사실은요.“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했던 지현의 눈에 탄탄하게 솟은 그의 가슴 근육이 보였다.
사장님 가슴 근육이 왜 이렇게 성나 있지?
"한지현 씨, 지금 내 말 듣고 있습니까? 왜 자꾸 정신을 놓고 있어요?“
정신을 번뜩 차린 지현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이게 다 사장님 때문이잖아요.“
지현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왜 나 때문이라고 거예요?"
우빈이 낮은 목소리로 지현에게 물었다.
"왜긴 왜에요. 제가 사장님 때문에……!“
음란마귀가 됐잖아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그의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야하게 보였다. 의식하지 않았던 그의 탄탄한 근육이 눈에 들어왔고 온몸에 열기가 올랐다. 우빈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자꾸 자신의 머릿속에 음란마귀들이 출몰하는 건 전부 다 권우빈, 이 남자 때문이다.
한지현, 너 설마 키스 한 방에 홀라당 넘어간 거야?
"……?“
그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우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 다음엔 부르시면 바로 집무실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섹시해요.
달밤에 우빈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던 지현은 기운이 쪽 빠져있었다.
“전 이제 집으로 가보겠습니다.”
지현이 집으로 가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
"잠깐만요. 한지현 씨.“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또 무슨 일이세요?“
지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야식 먹을래요?“
***
우빈과 지현이 찾은 곳은 뜨끈한 가락국수 국물이 맛있는 실내 포장마차였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센 찬바람을 맞았던 지현은 따뜻한 가락국수 국물을 마시자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아, 맛있다. 사장님은 실내 포장마차 처음이죠?“
"아니요. 처음은 아닙니다.“
"그럼요?“
"1년 전에 혼자 실내 포장마차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혼자 왜 실내 포장마차를 찾으셨어요?“
지현이 물었지만, 우빈은 아무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지현 씨는 실내 포장마차 좋아합니까?“
"네, 자주 찾아요.“
"언제가 마지막이었어요?“
"언제였더라……. 음, 아마 AK 그룹에 입사하고 나서 연수원 동기들이랑 왔었던 것 같아요.“
연수원에서 만났던 동료들과의 유쾌했던 회식 자리를 떠올리며 지현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대학 때도 많이 왔었던 것 같아요.“
"그래요?“
추억에 잠겨 있는 지현을 유심히 바라보던 우빈이 짓궂게 물었다.
"지현 씨도 술 먹고 막 테이블에 머리 박고 쓰러지고 그랬습니까?“
"아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코도 드르렁드르렁 골았죠?"
"제가 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요. 저 원래 코 같은 안 골거든요? 이도 안 갈고 엄청 조용히 자요."
"그럼 막 토하고 그랬어요?"
"……."
지현이 아무 말 없이 가락국수를 먹자 우빈이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니 지금은 안 그러네요. 진짜로 토했어요?“
새내기 환영회.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선배들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어야지 사랑받는 후배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던 지현의 최후는 처참하고 비참했다.
그때, 실내포차 직원이 새빨갛게 버무린 떡볶이와 바싹하게 튀겨진 튀김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음, 맛있겠다.“
지현은 포크로 떡볶이를 콕 찍어서 우빈에게 건넸다.
"자요, 받으세요.“
"먹여줘요. 저번에는 나한테 잘 먹여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사장님이 앞이 안 보이는 줄 알고 그랬죠. 이거 그냥 내가 먹어요?“
지현이 다시 자신의 입으로 떡볶이를 가져가려 하자 우빈이 얼른 포크를 잡았다.
"맛있게 먹어요. 떡볶이는 내가 쏠 테니까.“
"고맙군요.“
"대신 순대는 사장님이 쏘세요.“
사준다더니 혼자 떡볶이의 반을 비우고 있는 지현을 보고 우빈의 입술 사이로 픽, 하는 웃음이 터졌다. 참 이상했다. 혼자 실내 포장마차를 찾았을 때와 달리 그녀와 함께 있으니 싸구려 떡볶이가 맛있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소한 행복이 이런 것일까.
별거 아닌 것에도 웃고 즐기고 행복해하는 지금 이 순간, 우빈은 32살이 되어서 처음 느끼는 감정에 감격스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난 대체 그동안 무얼 하면서 살았던 걸까.
"근데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걱정되네요.“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우빈은 입술을 소매로 훔치며 피식 웃었다.
"내일 출근하지 말아요.“
"우와! 정말요?“
"네, 내가 내일 휴가 줄게요.“
"진짜요? 연차가 아니라요? 앗싸!“
진심으로 기뻐하는 지현을 빤히 바라보던 우빈이 그녀의 입가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보고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어른이가 아니라 어린이네요. 묻히고 먹으면 어떡합니까.“
애정 어린 타박을 하며 우빈은 휴지를 뽑아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지현은 민망한 듯 빨개진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요?“
"그러니까. 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우빈은 먼저 선수를 쳤다.
"왜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를 하는 거냐고요?“
"……."
"그게 궁금한 거잖아요. 그렇죠?"
지현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우빈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합니까?"
우빈이 은근슬쩍 질문을 피하려고 하자 지현이 살짝 눈을 흘겼다.
"예전에 한남동 저택으로 첫 출근 하기 전에 연수원 사람들한테 사장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
"1년 전부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서 성격도 괴팍해지기 시작했다고 했죠. 활동 보조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고, 개인 비서는 석 달에 한 번씩 바뀌고."
"나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나 있군요."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 앉은 실내 포장마차 의자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내가 왜 시각장애인인 척 연기를 하는 건지 그렇게 궁금합니까?"
당장은 그녀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우빈은 우회적으로 지현에게 물었다.
"궁금하긴 한데…… 지금 얘기 안 해줘도 돼요."
"……."
"나중에, 먼 훗날에 사장님이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해 주세요. 뭐, 아니면 영원히 말 안 해주셔도 전 괜찮아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지현의 배려에 우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꼭 얘기해줄게요.”
가락국수를 다 먹은 지현은 마지막으로 국물을 마셨다.
"음, 행복하다. 내일 출근 안 해도 된다."
"내일 출근 안 하는 게 행복합니까?"
"네, 그럼요. 추운 겨울날 찬바람 맞으면서 출근하는 게 얼마나 싫은데요. 조금이라도 이불 속에 있고 싶은 게 평범한 직장인의 마음 아닌가요?"
내일 그녀와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우빈은 대답하는 대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사장님."
"왜요?"
"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뭔데요?"
"대답해 줄 거에요?"
"……뭐, 들어보고요."
"사장님은 왜 나한테 앞이 보인다는 걸 알려준 거예요?"
사실 그녀에게 자신이 앞을 보인다고 밝혔던 것은 충동적으로 했던 짓이었다. 별채에서 우연히 지현을 만난 우빈은 저도 모르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눈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과 무슨 관계인 건지. 미리 생각했더라면 키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와의 키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벌인 일이었다.
"글쎄요. 그것도 나중에 알려줄게요."
"뭐에요. 치사하게."
"지금 알려주고 싶지만……."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목구멍으로 삼켰다.
"싶지만, 뭐요?"
"아닙니다."
지현이 입술 사이로 피, 하는 소리를 냈지만, 우빈은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내가 떡볶이도 사줬는데 그것도 하나 대답 못 해줘요?"
집으로 오기 전에 칵테일을 마셨다던 그녀는 뒤늦게 취기가 오르는지 점점 말꼬리가 늘어졌다.
"치사해. 진짜 치사해. 내가 떡볶이도 사줬는데……."
옹알이 같은 술주정을 하던 지현이 벽에 기대어 잠이 들자, 우빈은 또 한 번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
"뭐? 할머니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지현의 손이 달달 떨렸다.
- 응, 언니, 지금 당장 본가로 와야겠어.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던 은비가 평소와 달라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지현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분명 자신의 결혼과 관련해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은비야, 알았어. 내가 지금 당장 본가로 갈게."
전화를 끊은 지현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본가로 향했다.
부르릉.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안동 생가를 개조해서 만든 무궁화는 외관이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 전통 궁중 한식을 자랑하는 무궁화는 국빈과 재벌들의 접대 장소로 사랑받았는데 그 중심에는 며느리 고영란의 공이 컸다. 조덕만 여사와 며느리 고영란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는데, 무궁화 건물 뒤로 한옥을 개조한 주택은 지현이 대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었다. 본가에 도착한 지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정말 왜 그러시는 거예요?"
집으로 들어서자 안방에서 영란의 목소리가 들렸고, 지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머님이 왜 이렇게 지현이를 빨리 시집 보내시려고 하시는지, 전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요.“
"결혼은 빨리하는 게 좋아. 나도 지현이 나이보다 훨씬 어릴 때 시집와서 석호도 낳고 석준도 낳고 송이도 났고, 아무것도 없었던 육안동에서 무궁화도 세우고 할 건 다했다."
"그래요, 어머님. 어머님 시대에는 그게 당연한 거겠죠. 하지만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요."
덕만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영란의 목소리에 지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예상대로 자신의 문제 때문에 할머니와 엄마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하니. 일단 신문에 광고를 냈고 그걸 본 사람들이 전화했는데 그걸 인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수 없지 않냐.“
"그냥 지현이 핑계 삼아 저를 무궁화에서 내쫓으려고 하시는 거 아니에요?"
"너는 어째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보는구나."
"그게 아니면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평소 할머니의 행동이 모두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지현 언니, 이리와, 이리와."
작은방에 있던 은비가 그녀를 손짓으로 불렀다. 작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본가에 들렸던 은비는 할머니와 엄마가 싸우는 걸 목격하고 바로 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부터 저러시고 계신 거야?"
"아까부터 계속 싸우시고 계셔."
진한 피로감이 밀려와 지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시작된 거야?"
"언니, 아까 본가에 양복 입은 남자가 왔었어."
"양복 입은 남자? 그게 누군데?"
"신문에 난 광고 보고 언니 만나러 온 사람이래."
"뭐라고?“
“그 사람이 여길 왜 와?”
어이가 없어진 지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한우에 꽃다발에 별거 다 가지고 왔더라고. 난 뭐 장인·장모 보러 오는 예랑 인줄 알았어."
"그래서?"
"알고 보니 할머니가 큰엄마한테 말도 제대로 안 하고 무작정 남자한테 집으로 오라고 한 거야."
긴 한숨을 내쉰 지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나 진짜 깜짝 놀랐다.
언니랑 맞선 보겠다고 온 사람 머리 벗겨진 40대 아저씨던데?"
"……."
"그러면서 할머니가 큰엄마한테 언니 부르라고 난리 난리 생난리를 치는 거야. 진짜 난 아까 할머니 제정신 아닌 줄 알았어."
ㅡ 너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되니? 왜긴 왜야. 초대장 보낸 남자한테 연락이 와서 그렇지.
지현은 얼마 전 할머니가 전화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뒤로 아무 말이 없길래 없던 일이 된 줄 알았던 지현은 할머니에게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큰엄마가 남자 보고 엄청 화가 나신 게 내 눈에는 보였거든? 근데 할머니는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계속 언니 부르라고…… 어휴."
드르륵.
"뭘 그리 붙어서 속닥대는 거야?"
문이 열리고 갑자기 송이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송이 고모, 오랜만이에요."
"그래, 지현이 왔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너만 일찍 왔으면 우리 집안에 이런 큰소리 안 났을 텐데."
"……."
"뭐, 대충 사정은 옆에 있는 짹짹이한테 들어서 알고 있지?"
송이가 턱으로 은비를 가리키자, 기분 나빠진 은비는 표정을 구겼다.
"진짜 요즘 새언니가 많이 변한 것 같아. 처음에 시집왔을 때는 우리 엄마한테 찍소리도 못했는데 이제는 막 소리 지르고…… 나 진짜 어이가 없어."
송이는 지현을 열 받게 하려고 작정한 듯 그녀 앞에서 영란을 마음대로 물고 씹고 뜯었다.
"고모는 알고 계셨어요?"
"뭘?"
"오늘 저랑 맞선 보기로 온 남자가 여기로 온가는 거요."
"아니? 난 몰랐는데?"
일부러 뻔뻔하게 지현에게 들이댄 송이는 능구렁이처럼 모르는 척했다.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진짜 처음 아빠랑 무궁화 세우고 고생 엄청 많이 했는데. 며느리라는 여자는 엄마한테 요리 비법 배워서 성공했으면서 자기가 잘해서 성공할 줄 알고."
송이는 덕만이 영란에게 궁중음식에 대해 잘 알려준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영란은 덕만에게 간단한 양념장의 비법도 전수 받지 못했다. 18년 동안 재료 손질, 인력 관리, 설거지 등 잡일만 해오던 영란이 본격적으로 무궁화 요리의 간을 보게 된 건 10년 전부터였다. 무궁화가 이만큼 성장한 건 책을 찾아보며 궁중음식을 연구하고, 외국인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음식 개발을 한 영란의 노력 덕분이었다.
"우리 엄마는 뒷방 늙은이 취급받아도 너 시집 잘 보내려고 했었던 건데, 넌 할머니 소원 하나 못 들어주니?"
"……."
"여기서 쑥덕거리고 있고 엄마랑 새언니 싸우는 걸 말릴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지현은 혹여나 자신이 안방으로 들어가서 상황만 더 악화시킬까 봐,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송이의 말을 듣고 있던 은비가 픽, 하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고모, 고모가 지현 언니 상황이라고 생각해 봐요. 결혼 생각 없다는 데 계속 결혼하라고 잔소리하고. 마음대로 신문 광고를 내서 언니 당황스럽게 하고, 맞선 안 하겠다는데 계속 맞선 보라고 시키고. 그리고 대뜸 남자를 불러들이고 만나라 그러고, 이런 식인데, 고모는 화가 안 나겠어요?“
은비의 말에도 송이는 콧방귀만 뀌며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난 솔직히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할 것 같아. 만나고 나서 판단해야지. 엄마가 괜히 지현이 이상한 데로 시집 보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안방에서 호통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지만, 지현은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쩌지,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지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에서 나온 영란은 분노를 삭이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새언니,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영란이 안방에서 나오기 무섭게 송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엄마가 다 지현이 생각해서 한 일이잖아요. 우리 엄마 면을 생각해서라도 언니가 그러면 안 되죠.“
"아가씨, 나중에 얘기해요.“
영란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송이는 끈질기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고모, 잠깐만요.”
조용히 참고 있던 지현이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드르륵.
안방에는 부채질하며 화를 식히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던 지현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할머니, 저 맞선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