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나는 가장 찌질 했는가?
오래된 칠판에 흰 분필로 대충 휘갈겨 쓰여있다.
요즘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춰볼 거라고 애써 쿨한 척 하는 명문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가 말했다.
"언제 나는 가장 찌질 했는가? 얘기해 볼 사람 있어요?"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너도 나도 손을 들어 발표했다.
"어제 술 먹고 진탕 울었을 때요."
"왜 울었죠?"
교수의 질문에 남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여자 친구랑 헤어졌거든요."
그 뒤로 연애, 사랑에 관련해 찌질 했던 과거들이 쏟아져 나온다.
"돈 없어서 라면 반 개 끓여먹고 남은 거 그 다음 날 먹을 때요."
하지만 이 발표를 한 친구 이후로 더는 손을 들지 않았다.
밝히고 싶지 않은 자신의 찌질 함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찌질 함이 경쟁이 되어 이 친구의 찌질 함이 최종 승리한 것이다.
교수는 자신의 의도대로 수업이 재밌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수업은 초반에만 흥미를 끌 뿐, 30분 후면 모두 지겨워하고 말 것이다.
그런 교수의 눈에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갈색의 머리칼. 꽃무늬 상의.
수업에 흥미가 없는 듯이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발표 하는 내내 심드렁하게 주변을 살피던 여학생.
저 친구라면 교수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가 당황해하면, 교수는 이렇게 얘기할 셈이었다.
[누군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찌질 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수 있겠죠]
그러면 모든 학생이 가슴에 하나씩 감동을 하겠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교수가 한 여학생을 지목했다.
"거기 학생?"
모두가 그쪽으로 일제히 뒤돌아보았다. 턱을 괴던 여학생은 곧바로 바른 자세를 하고 교수를 쳐다보았다.
"학생은 어떤가요?"
사실 아까부터 그녀의 수업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업 시작부터 턱을 괴고 있질 않나, 다리를 꼬지 않나, 거기다 단 한 번도 손을 들거나 관심 있게 보 적이 없었다.
교수는 '분명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에 준비된 멘트를 하려고 목을 가다듬었다.
"없어요."
큼큼. 켁.
목을 가다듬으려던 교수는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사레가 걸렸다.
"없다고요? 캑캑."
여학생은 교수의 생각과 다르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 전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도 찌질 했던 순간이 될 수는 있겠네요."
**
'망했네.'
세라는 자신을 바라보던 교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강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수치심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돌직구였어.'
교수란 자고로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이 있는 직업이다.
성인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만큼의 지식이 필요한 직업.
그런 교수가 자신의 커리큘럼을 바꿔보며 처음 선보인 강의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물론 세라는 그 교수의 사정을 알 리는 없었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후회한들 어떠하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땐 이 방법이 최고지.'
세라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책략 중 하나를 생각했다.
'빠른 후퇴다!'
삼십육계 줄행랑.
저 교수가 다음 학기 강의까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세라는 나가자마자 수강신청을 취소할 것을 마음먹었다.
'전공필수 과목이긴 한데....'
불행인건 이 과목이 전공수업이라는 것.
다행인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저 교수가 자신을 잊힐 때 즘 그때 다시 강의를 들으면 된다.
강의가 끝나자 교수와 세라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교수는 아까의 답변이 인상 깊었다며, 그녀를 불러 이름을 알아볼 참이었다.
반면 세라는 교수가 말을 걸지 못하는 타이밍에 부리나케 나가려고 했고.
조금의 접전도 더는 허락할 수 없었다.
승자는 과연 누구일 것인가?
영화와 같을 뻔했던 순간이 와장창 무너져 비극에 맞은 교수인가.
조용히 학교생활을 마치고 어느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고 싶은 학생인가.
"교수님!"
한 학생이 그를 불렀다.
"저 이 수업 인원이 다 차서 수강신청을 못했는데요, 전산 상으로 이게 교양으로 들어가서 타과학생도 신청 했다고 하던데 ……."
지금이었다.
충분히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릴만한 그물망에 걸렸다!
세라는 속으로 이를 가는 교수를 보며 유유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잠시만!"
누군가가 이곳을 빨리 뜨고 싶은 세라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복도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 내려가는 게 빠르겠지만, 여긴 6층이었다.
'그리고 내 소중이들은 고생하면 안 돼.'
그녀는 자신의 구두를 바라보고는 마음속으로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기를 재촉했다.
그녀를 부르며 따라오던 사람이 어느새 옆에 있었다.
"아니 뭐 내가 잡아먹냐? 너 이번에 편입한 애 맞지?"
떡 벌어진 어깨에 큰 키. 옷에 가려지지 않는 근육은 이 남자가 헬스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옷 입는 센스하고는…….'
"아까 교수님 표정 봤어? 와 장난 아니던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세라는 서둘러 타서 '닫힘' 버튼을 연사했다.
옆의 남자도 지지 않고 함께 타서는 계속 세라에게 말을 걸었다.
"하여간 거물이 들어왔네. 난 이형식. 3학년인데 26살이라서 아마 너보다 나이 많을 거야. 편하게 식이오빠라고 불러."
형식이 계속해서 세라에게 말을 걸었지만 세라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그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남색 추리닝 세트. 흐릿한 문에는 브랜드가 보이진 않지만 학생이 입기에는 비싼 브랜드일 것이다.
평범한 얼굴. 하지만 큰 얼굴을 더 강조하듯 잔뜩 무스를 발라 이마를 깐 머리스타일은 누가 봐도
'허세 왕이겠군.'
성현은 시종일관 자신의 말에 하나도 대꾸고 안 하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내리는 세라를 보고 화가 났다.
"야. 선배가 말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는 거칠게 내리는 세라의 팔을 잡았다.
세라는 최대한 참고 있었다. 속에서 부글거림을 참는 이유는 남은 학교생활, 아니 이제 겨우 시작하는 학교생활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단추야, 웬만하면 참자. 죄송해요 지금 급해서요. 라고 하자.'
"그냥 가지 말고 연락처 주고 가라."
세라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꼰대 자식인 줄 알았는데, 이게 작업 거는 거였어? 설마.'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형식은 자신이 꽤 박력 있게, 그녀에게 대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좋은 몸매에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곰 같은 남자. 하지만 미련하게 보이면 얕잡아 볼 거니까 박력 있게 그녀의 팔을 잡고 번호를 물어본 것이다.
십여 년 전 유행했던 경상도 남자의 '오다 주웠다'라고 하며 상남자의 모습!
형식은 스스로 어찌나 자신 있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세라는 형식의 표정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껴졌다.
그저 선배라고 후배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자기 딴에는 꼬시는 거라니?
뚜껑이 열린다.
"놔."
싸늘하게 식어선 세라의 표정.
'이게 아닌데.'
형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당황해하며 세라의 팔을 놓았다.
세라는 다른 팔로 형식이 잡고 있던 팔을 먼지 털어내듯 툭툭 쳤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거 엄연히 폭행이에요. 알아요?"
형식은 얼굴이 빨개졌다.
"니, 니가 내 말을 계속 씹잖아!"
형식이 소리치자 1층에 있던 학생들이 그곳을 주목한다.
그렇게 뚜껑은 열렸다.
"첫째. 초면부터 반말했죠? 사람 됨됨이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꾸 안 했어요. 둘째. 상대방이 자기 말을 무시한다고 해서 폭행을 저질러요? 제가 그 됨됨이를 진작 알아봤네요."
"그러니까 왜 내 말을 쌩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야! 방금 내가 뭐랬어?"
세라가 크게 소리쳤다. 형식이 얼굴이 벌게져 분노를 참지 못하는 외침이라면, 세라의 외침은 굵고 간결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다그치듯, 선생님이 학생을 다그치듯.
"첫째. 반말한 것. 둘째. 그래서 내가 무시하니까 내 팔목 잡은 거. 언어폭력이고 물리적 행사도 한 거야 지금!"
주위는 어느덧 세라와 형식을 두고서 많은 사람이 둘러 쌓여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 남자가 반말했는데, 여자가 쌩까니까 폭력행사 했나 봐."
"저 사람 형식 선배 아냐?"
이상하기도 하지. 군중이 이렇게 모이면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아야 할 텐데, 형식은 부끄러움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방식을 택했다.
탁
"미친년"
형식이 세라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그는 그렇게 다시 그와 세라의 관계에서 우위가 된 듯 과시했다.
"헐, 미쳤나 봐."
"쓰레기..."
애석하게도 모든 군중은 그가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형식 홀로 멋있다고만 생각하는 찰나.
-띠링
동영상 녹화 음이 들렸다.
**
시간은 거슬러 5분 전으로 흘러간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세라가 핸드폰을 보자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 지금 바로 중앙관 1층이야. 빨리 와!]
"아니 뭐 내가 잡아먹냐? 너 이번에 편입한 애 맞지?"
형식이 그녀에게 말을 걸 때, 그녀는 눈으로는 그를 쳐다보았지만,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답장을 하고 있었다.
[응응. 옷 진짜 못 입은 애가 나 쫓아옴.]
[뭐야~ 문세라 한물 다 갔네]
엘리베이터에 형식이 따라 들어오며 말했을 때
"하여간 거물이 들어왔네. 난 이형식. 3학년인데 26살이라서 아마 너보다 나이 많을 거야. 편하게 식이오빠라고 불러."
[꼰대 같은데, 그냥 무시하고 있어.]
[크크, 영상 찍어야지. 네 남자친구라고.]
[죽는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세라는 자신의 친구가 멀리서 자신을 찍고 있는 것을 봤었다.
'저걸로 오늘 저녁에 열릴 파티에서 한참을 나를 놀려먹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형식이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이다.
그 뒤로 모든 상황을 녹화한 동영상 녹화 음이 끝나자 형식은 그 소리를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눈으로 좇을 필요가 없었다.
세라의 친구가 형식에게 다가와서는 형식을 밀치고는 쓰러져 있는 세라를 일으켰다.
"니가 감히 누구를 쳐?"
"이건 또 뭐야!"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넘어진 형식은 황당했다. 짧은 검은 머리와 자신을 한 번에 밀친 그 힘. 목소리만 아니었으면 남자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저씨! 여기 문세라 다쳤어요!"
세라의 친구는 멀리 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은 자들에게 소리치자 두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두 명 중 한 명은 세라의 친구와 함께 세라를 부축했고, 뭐라고 수군거리더니 다른 한 명이 형식에게 다가왔다.
"학생, 우리 아가씨가 폭행죄로 고소하실 거라네요."
형식은 기가 찼다. 그저 한 대 쳤을 뿐인데, 폭행죄라니?
눈치가 없는 그도 지금 상황에서 욱해봐야 소용없는 일임을 알았다. 심리학과 학생들이 다 보고 있는데 걸핏하면 더 안 좋게 휘말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우리 아가씨에게 해야죠."
형식은 일어서서 세라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미안."
"아가씨에게 미안이 뭡니까? 다시 똑바로 사과하세요."
"미안해."
"아가씨, 이 분 아가씨 친구입니까?"
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똑바로 사과하세요."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는 형식을 빤히 쳐다보는 세라.
"김 실장, 그래도 폭행죄로 고소하세요. 합의는 없습니다."
"아가씨, 그래도..."
형식은 세라의 말에 화가 나 숙였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말했다.
"사과했잖아!"
세라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형식을 똑바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정확하지.'
"김 실장, 보셨죠? 별로 안 미안해하네요. 저 사람. 이름 이형식. 명문대 심리학과 3학년. 증거자료는, 여기 윤주가 가지고 있어요."
"이년이 진짜!"
형식의 막말을 하며 세라에게 한 번 더 손찌검하기 위해 손을 들었고, 김 실장이 형식의 팔을 잡아챘다.
"이년이라뇨? 어디 재활용도 안 될 것 같은 게 감히 아가씨에게!"
"아가씨, 아가씨, 말끝마다 아가씨는 무슨!"
"야!"
이 모든 언성보다 더 높은 목소리로 형식을 부른 건 윤주였다.
"얘 월광그룹 회장 딸이야. 문세라."
**
월광그룹.
대한민국 3대 대기업 중 하나. 월광, 신화, 금산. 특히 월광전자와 월광건설은 한국을 뻗어나가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는 그룹.
선대 회장이었던 문흥국의 뒤를 이어 경영을 맡은 문지학은 인정사정없이 회사를 크게만 만드는 데 집중했던 문흥국과는 다르게 자기 사람은 챙긴다는 신념으로 입지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슬하에 자녀는 네 명.
그 중 한 명이 명문대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정보가 몇 해 전에 떠돌았다.
그가 누구일지는 경영학과에서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 찾았지만 결국 찾지는 못했었다.
곧이어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분명 저 학생은 이번에 편입한 학생일 텐데, 월광그룹 상속녀라고?
모두가 소곤소곤 말하지만, 그 소곤이 합쳐져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정체를 듣고 난 이후로, 그 말의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녀가 두르고 있는 모든 것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촌스러워 보이는, 꽃무늬 블라우스와 검은색 에이 라인 스커트는 Y 사로.
동대문에서 흔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가죽으로 덧댄 가방이 C사의 가방으로.
아침에 하고 나온 고대기 머리가 미용실 드라이 머리로.
구두는 G사의 구두로.
이 마법은 마치 신데렐라의 요정처럼 일어났다.
잿빛에서 아름다운 공주님으로.
마법의 주문은, 단 세 글자였다.
문세라.
월광그룹 문지학 회장의 막내딸.
**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비는 형식도.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는 세라도.
그날의 수업이 떠올랐다.
언제 나는 찌질 했는가?
누군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찌질 했던 순간으로 기억 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