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내가 지난 18년 동안 지내왔던 익숙한 내방임에도 불구하고 밤새 잠을 설쳤던 것은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오고가서일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아까 신전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었다.
“사실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오펠리아와 너를 짝을 지어주고 싶었단다. 그 애와 너만 좋다고 한다면 말이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벼락과도 같은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의 눈은 놀라움에 가득한 나를 바라보는 대신 작은 관에 누워있는 처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오래전부터 너와 그 애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니. 잘 어울리기도 했고. 그 아이의 아버지 해밀턴 백작과 서로 반은 농담 삼아 나눴던 약속이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어.”
“…….”
“공론화하지 않은 것은 말이다. 너희들의 마음을 아직 알 수 없어서였단다. 나중에 너희가 다 커서 서로에 대해 어떤 마음일 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미래를 결정할 수도 없고 말이지.”
“…….”
“어머니를 일찍 잃은 아이가 진짜 내 아이가 되어서 우리 집에서 와주면 서로 정말 좋겠구나 그저 생각한 거뿐이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쓸 필요는 없다. 물론 이제는 완전히 쓸데없는 과거의 이야기였기만 말이다.”
나는 계속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만 했다. 내 침묵을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이신 아버지께서 주저리주저리 부언을 다셨다. 하지만 나의 충격은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충격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이제껏 내 안에 있었던 오펠리아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누나이자 여동생과 같은 존재였다. 나의 충실한 조언자이자 의논 상대였으며, 열여덟이 된 내가 수도로 간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의 꿈을 이해하고 지지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의 지지와 설득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조금 더 쉽게 나를 수도로 보내주기로 허락하셨고 나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돌아보니 그녀는 생각보다 나의 삶에서 더 중요한 사람이란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녀는 나의 빛나는 유년이었으며 나의 순수였다. 나의 돌아갈 곳이며 내가 어머니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좋아했던 소녀가 바로 그녀였다.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그녀를 영원히 잃은 지금에야 깨닫는 것일까.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이제껏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니! 정말 인간이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장님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눈이 나빠서 땅바닥만을 바라보고 그저 앞으로 돌진하기만 하는 멧돼지처럼,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제껏 20년을 살아오면서 내 주변에 여인은 정말 많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여인에게 사랑의 말을 고백하겠노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여인이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귀하고 품위가 있었어도, 심지어는 여인 쪽에서 먼저 내게 고백했을 때에도 내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여인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 속 신전에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 거기로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주인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의 어릴 적 친구 오펠리아 그녀였다는 것을 지금이서야 알았다. 그녀가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고 난 다음에야 말이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천천히 더듬었다. 입술의 피부가 아버지와 신전을 나서며 그녀의 손에 했던 작별키스를 아직도 기억했다. 한겨울에 부는 삭풍 아래에 서 있는 눈에 휩싸인 차가운 바위와 같은 싸늘함이 내 입술에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오펠리아에게 느끼지 못한 차가움이었다.
생전의 오펠리아는 언제나 작고 말랑말랑하며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이끌면 그녀는 언제나 꽃이 피어나듯 화사한 미소를 내게 보여주곤 했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생각보다 너무나 크고 많았다. 다시는 그녀가 나를 위해서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테오.” 하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을 것이다. 들릴 듯 말 듯 부르는 다정한 콧노래도, 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차림을 정리해주던 다소곳한 손길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아무리 훔치고 닦아내어도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의 샘은 방언처럼 멈추질 않는다. 나는 그렇게 적막한 밤을 눈물의 기도와 함께 보냈다.
*
오펠리아의 장례식이 있는 다음날은 너무나 화창하고 좋은 날이었다. 오늘 있을 행사가 장례식이 아니라 결혼식이었으면 더 좋았을 정도로, 햇살은 찬란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아침부터 오만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꽃들은 자신의 향기와 빛깔을 한껏 뽐냈으며 향기로운 자연 위로 형형색색의 나비와 꿀벌이 오고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절정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싱그러운 봄날에 오직 인간들만이 침울했다. 오늘 자신들이 아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처녀를 영원히 땅속으로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산 날이 앞으로 살아갔을 날보다 너무나 짧았기에 아쉬움은 보이지 않는 한숨으로 그 형태를 드러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톰슨의 도움을 받아 장례식에 갈 채비를 서둘렀다. 해밀턴 가는 작위는 겨우 백작에 불과했지만 이 나라 에스틴 제국에서 몇 안 남은 오래된 가문이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직 스물도 되지 못한 백작 영애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내가 채비를 다 하고 내방을 나오자 거실에 침울한 얼굴을 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프란츠가 함께 있었다. 막내 빌헬름은 아직 어려서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전부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어머니는 소리 없이 계속 흐느끼기만 하셔서 우리의 침통함을 더욱 무겁게 하셨다.
오펠리아의 장례식은 예상했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해밀턴 백작가와 관련된 친척들을 비롯하여 이곳 해밀턴의 유지들, 그리고 오펠리아가 생전에 친하게 지냈던 근처 지방의 영애들이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남자들의 얼굴은 대부분 침통했고 여인들의 얼굴은 어머니와 비슷한 상태로 퉁퉁 부어있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장례식이니만큼 사람들의 복장은 천편일률 검은색 투성이었다. 색을 맞추기 위해 겨울옷을 꺼내 입은 사람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그늘로 가 있는 형편이었다. 아무리 장례식의 순간이 짧다 해도 초여름의 햇살과 기온 앞에서 장사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충 형편을 봐가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다른 처녀가 한명 등장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묘하게도 유행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에 그녀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가 내 시선을 느끼고선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2년 전에 오펠리아와 자매가 된 에리카 해밀턴이었다.
오펠리아의 아버지 해밀턴 백작은 딸이 열일곱이 되던 때에 재혼을 했다. 이 나라에서는 17세가 되면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다. 딸의 나이가 열 살이었을 때 상처(喪妻)했던 그는 오랫동안 혼자의 몸으로 딸을 키우다, 딸의 결혼 준비와 딸이 없는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혼자 몸으로 딸을 키우던 과부 칼리아 새튼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있던 그해 내가 이곳 해밀턴을 떠나 수도로 가 있었기에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오고간 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자면 백작님의 재혼에 상당히 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혼하여 새로 해밀턴 백작부인이 된 여인에게 상당히 안 좋은 소문이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혼한 이후 재혼한 부부가 각종 자선바자회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자매가 된 오펠리아와 에리카가 정답게 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면서 그런 소문은 점차 사라져갔다. 원래 소문이란 것은 전부 믿을 게 못되는 것이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테오 오빠.”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서 진행될 장례식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17세가 되어 이제 아름다움을 뽐내기 시작하는 그녀는 검은 장례식 원피스를 입고 있었음에도 단연 돋보였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에리카.”
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얼굴을 굳혔다.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녀와는 오펠리아를 통해서 인사말 정도만 주고받은 형편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소꿉친구의 자매인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는 편이었다.
내 눈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상당히 익숙한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내 죽은 친구가 평소에 유일하게 끼던 반지, 즉 오펠리아의 친모가 딸에게 물려주신 유품이었다.